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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Nov 24. 2020

내가 왜 싫은지 말해달라니까!!

사랑에도 배움이 필요할 테니.

"아니~! 그러니까~ 왜에~~ 말해보라고~오~!

내가 싫은 이유를 말하라고, 지금 당자앙~!"


아이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소란스러웠다. 이미 녹색 어머님들도(수업이 시작되는 9시면 봉사가 끝나신다.) 자리를 정리해 한산했던 길.

등교하려는 시간으로 치자면 서둘러야 했을 그 시각.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짜증이 담긴 남자아이의 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도 소란스러울까 싶어 뒤를 돌아보니 등 뒤엔 하늘색 원피스를 곱게 입은 여자아이와 그보다 반 뼘 정도 키는 작았지만 목소리만은 우렁찬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다기보다는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다지 즐거운 상황만은 아닌 것 같았다.

특히 여자아이의 얼굴에 어려있는 당황함과 수치스러움을 읽고는 본능적으로 상황이 분명 누군가에게는 난감할 것 이라 확신이 섰다. 그래서였을까? 신호등이 녹색불로 바뀐 뒤에도 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른이 필요한 상황이 올지도 몰라. 그것봐, 여자아이가 내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잖아.


'가지 마세요. 도와주세요.'



온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는 내 인기척을 느낀 여자아이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야~ 하지 마~ 나 학교 가야 해..."


그러자 그 앞을 막고 있던 남자아이가 억울해 죽겠다는 듯 악을 쓰며 여자 아이를  막아섰다.


"아니~ 왜냐니까~ 왜 내가 싫은 거냐고 오~! 이유를 말하라고 오~!"


이런... 뭐지? 남자아이의 고백 비슷한 말을 듣고는 풋풋한 10대들의 사랑 고백 시간이었나? 싶었다.

그랬다면 아줌마의 괜한 오지랖이 아이들의 풋사랑의 순간을 망쳐놓는 것일 테니 미안한 마음에 어서 자리를 피해 줘야지 는데 웬걸.

남자아이의 느닷없는 행동에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목소리만큼이나 순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여자아이가 자신의 질문을 모른척하고 지나가는 게 약이 올랐던 건지, 남자아이는 분노가 잔뜩 치민 표정으로 여자아이 가방 뒤 덜미를 낚아채듯 잡아끌며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힘에 의한 반동에 중심을 잃은 여자아이가 휘청하며 비틀거리더니 힘없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하늘 거리고 깨끗했던 원피스에 때가 묻었다.


여자아이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남자아이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 그냥 니가 싫다고. 내가 싫은 이유까지 너한테 설명해야 해? 이거 놔!!"


여자아이의 눈물 가득 섞인 목소리에 자신감을 얻은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간절했던 것일까? 남자아이는 무자비하게도 ' 니가 나를 싫어하는데 절대 동의할 수 없다'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여자아이를 협박했다.


" 너 빨리 내가 싫은 이유 말해! 안 그러면 너 학교 못 가게 할 거야. 가만 안 둘 거야!!

나는 니가 좋단 말이~야아~!! 그런데 너는 왜 내가 싫냐고!! 나를 대체 왜!!!! 왜!!!! 싫어하냐고오!!!"


여자아이 얼굴에 본인의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악을 쓰는 남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더 이상 두고 볼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들 앞에 나섰다. 나도 딸 갖은 엄마라 그랬을까? 이런 식의 사랑을 빙자한 폭력은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길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여자 아이의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 너무도 간절했기에.


"얘들아!  너희 등교 안 하니? 그리고 아줌마가 옆에서 계속 듣고 있었는데, 친구끼리 그렇게 무서운 소리 하면 안 되는 거야!"


여자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안도한 표정 뒤로 마치 큰 잘못을 들킨 듯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눈에 들었다. 반면 남자아이는  여전히 여자 아이의 한쪽 팔을 쥐어짜듯 틀켜 잡고서는 어른의 존재 따위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본인이 하고픈 말만 질러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짜증 섞인 화만 뿜어내는 남자아이가 괘씸하기도 또 한편으론 두렵기도 해 우선 어떻게 해서든 여자아이 먼저 떼어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고 달래며 여자 아이에게 엉겨 붙은 남자아이를 가로 막아봤지만 쉽지 않았다.

이미 분노로 잠식된 남자아이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씩씩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나는 ' 너네 엄마 어디 있니!'를 찾으며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강요하는 것도 친구를 괴롭히는 일 이라며 남자아이를 막았고 자기 엄마를 찾아서였는지, 아니면 이 오지랖 넓은 아줌마가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아서였는지 마침내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의 손을 후려 던지며 한 발 물러났다.


" 너 내가 한 번만 더 말할게. 나는 니가 진짜 좋다고, 그런데 넌 내가 싫다고 했으니까 난 이해 안 돼! 다음번에 내가 싫은 이유 말해라~~ 안 그러면 그땐 안 참아!!


가방 뒷덜미를 잡히고도, 팔 목을 잡힌 채 이리저리 휘둘리기까지 한 여자아이는 고개 숙이며 아무 말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대화하듯 협박을 내뱉은 남자아이는 당당하고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들었다.


고래고래 악을 쓰며 찰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사랑을 고백하는 상황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억울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그 억울함 조차도 폭력으로 대변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차 올랐다.


이 상황을 패기 넘치는 남자아이의 사랑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어른의 시선으로 확대 해석해 티비에서 종종 나오는 잠재적 '데이트 폭력남'으로 분리해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몹시 혼란스러웠다.


'이러다가 홧김에 여자아이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지? 엄마 연락처를 달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내가 이러는 거 오지랖이 아닐까? 이럴 때, 어른으로서 해야 하는 옳은 행동은 뭘까? '




어른스러움의 노릇과 그 경계에서 고민하던 순간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20년 전, 법대에 다닌 친구 녀석이 들려준 '토할 것 같이 끔찍한 사건' 이 말이다.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모의재판 수업을 하던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사랑하던 남녀가 있었는데 술만 마시면 폭력을 쓰는 남자 친구를 견디지 못한 여자 친구가 이별을 얘기했단다. 남자는 울고불고 여자에게 매달렸지만 남자의 폭력성에 위협을 느낀 여자 친구는 이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남자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겠다며 군대에 입대했더란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웠던 여자는 매일 보내오는 남자의 편지와 전화를 거절하며 자신의 흔들림 없는 의지를 보여줬다고.


그게 이유가 되었던 걸까? 어느 날 남자는 비밀리에 휴가를 나왔고 여자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렀지만 여자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자신의 사랑이 끝끝내 거절당하자 남자는 분노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여자를 원망했다.

남자는 여자를 산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칼로 코를 베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며 두 가지 선택 사항을 주었다고 한다.'


1. 나랑 계속 사귀던가. 그럼 헤치지 않을게.

2. 코를 베어버리고 내 곁을 떠나가던가. 그만큼 내가 싫은 걸 테니 널 보내줄게.


결과는 어땠을까? 결국 여자는 2번을 선택하고 자신의 코를 남자가 베어 가게 두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폭력은 결코 희석되지 않음을,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되지 않음을 그를 통해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지금도 이렇게 끔찍한데 순간의 두려움으로 폭력을 눈감게 된다면 그다음은 코가 아니라 생명을 베어 가게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그녀가 코를 포기하게 된 이유였다.


그런데 ' 코를 베어 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역겹고 끔찍한 현실' 은 20년이 지난 지금이나 그때나 별 반 달라지지 않았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둘러싼 사건들이 여전히 현실에서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을 당하면서도 주눅 들어 하지 말란 소리만 겨우 내뱉는 여자아이와 타인이 나를 싫어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거절당한 부분에만 집중해 억울함을 분노로 표출하는 남자아이를 모른 척 둬 버린다면 그다음은 어찌 될까.


과연 이 끔찍한 순애보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방금 내가 만난 남자아이가 흉내 내고 있는 사랑이라는 게 과연 어린 시절의 풋사랑이 맞긴 한 걸까?

그들 중 누군가가, 아니 더 나아가 내 주변의 누군가가 모의재판에서 만났던 사건의 주인공처럼 되지 않는다 장담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 결코 모를 일이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하고 섬뜩하다.


싫은 것을 '싫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싫은 것을 부드럽게 말하지 못해, 싫은 이유를 논리 정연하게 풀어내지 못해 욕을 먹는 게 당연한 게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내 친구들은 모두 나를 좋아할지라도 나와 인연이 닿는 다른 누군가는 내가 싫을 수도, 내 사랑을 '당연히'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을 거절한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거절당했다고 해서 불쌍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사랑에도 배움이 필요할 테니 거절에 대해 연연하지 말고 그다음에 맺어질 인연에 집중하다 보면 언젠가는 네게도 찰떡같은 사랑이 나타날 거라고. 남자아이에게 말해주었어야 했는데.....


등을 들썩이며 앞서가는 남자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잔뜩 움츠러든 여자아이와 학교 교실까지 나란히 걸었다. 함께 걸으며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묻고 싶은 말이,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저 여자아이의 빨갛게 부어오른 팔을 들여다보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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