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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Jan 22. 2021

내가 나를 위로하는 나이 마흔둘.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면 진짜 어른이 될 줄 알았다.

나이에 흐르는 시간이 덧대여 지면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여기서 말하는 괜찮은 어른이란 올바른 생각과 개념을 기본 바탕으로 깔고도 경제적 상황이나 위치적으로도 안정이 된 사람을 뜻하는데. 나는 마흔, 불혹이 되면 자연스레 그런 (괜찮은) 어른이 될 거라 믿어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삶의 지혜를 갖게 되는 것일 테고, 지혜를 갖은 인간은 필히 발전하게 될 것이고. 

발전하여 진화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일 테니 (자신을 진화시키고픈 욕망이 가득한) 나 역시  나이를 먹게 되면 어떠하고도 특별한 것을 분명 이뤄 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간이 흘러넘치길 기대한 나이가 있었다.

흐르는 시간만큼 자신이 성장할 거라 믿었기 때문에 눈 깜박임에 1년이 지나갈 만큼 시간이 넘쳐 버려 준다면 그만큼 훌륭한 어른의 길에 빠르게 닿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서른을 넘겨 마흔을 바라볼 때가 되자 시간은 거짓말처럼 빨리 흘렀고 넘쳐흘렀다.


설레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시간을 흘려보내고 맞이한 마흔은 그야말로 인생의 황금기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렀으니 인간 본연으로서의 묵직한 철듦과 경제적인 자유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위치가 덩달아 따라올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나는 그저 나이 앞자리가 바뀐 주름 하나가 더 늘은 아줌마일 뿐이며, 지위도, 능력도,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은 그저 나이만 먹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나이만 늘어난 것이다.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채 나이만 먹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이 조차 예상하지 못한 나의 무능함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게 난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마흔을 넘겼고 그 뒤에 숫자 하나를 더 채워 넣었다.

마흔 하나의 시간부터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도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빨리 흘러주길 바랬던 시간이 약 올리듯 내 옆을 지나 치차 불안하기 시작했다. 간사하게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월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이는 내가 나이 들어감을 말하는 것이었고, 나아가 내가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마저 포기해야 함을 인정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후회가 몰려왔다. 예전의 그때, 나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했어야 했다고. 시간이 마냥 흘러주기만을 기대하기보다는, 망상에 빠져 허송세월에 인생을 낭비하기보다는 적어도 마흔을 맞이할 준비를 했어야 했다고. 

흘러넘치는 시간을 두고 보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고 자책했다. 지난날을 다시 주워 담고 되감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이미 속도조차 가늠이 안 되는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느끼는 나이가 아니던가.


헛물만 키우다 인생의 끝을 보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이뤄 놓은 것 없이,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차 몰라 속을 태웠고 걱정을 앞세웠다. 내 인생의 선두에 희망 대신 우려와 책망이 앞섰고 그 둘은 결국 원망을 낳아 나 스스로를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다.


무책임한 자신보다 무방비 상태로 인생을 내던진 스스로가 용서가 안됐다. 자괴감이 일었다. 순식간에 나 자신이 티끌보다 못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이러다 먼지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동안 내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스스로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깊은 동굴에 몸을 숨기며 더 깊이, 깊이 동굴의 끝을 향해 파고들었고 다시 한번 나이를 먹게 되었다.




자괴의 동굴에서 맞이한 마흔둘.

나는 아펐고, 또 아펐다. 아무것도 아닌 나 자신이 안쓰러워 보여, 그런 마음을 갖는 것조차 죄스러워 미안함에 아펐다. 그렇게 아프면서도 인생을 지금부터 다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끊임없이 고민했고, 노트에 적어 내려간 계획들에 다시 한번 망설였다. 흔들리지 않는 나이 마흔을 넘어 마흔둘이나 되었음에도 여전히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자신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결국 나락으로, 나락으로. 감정의 나락 그 끝으로 나는 나 자신을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나락의 끝과 마주하고 난 뒤. 사춘기 소녀보다 더한 열병을 앓고 난 뒤. 겨우 숨이 쉬어질 만큼 정신을 차린 뒤. 나이 먹음의 허세에 빠지지 않고, 겨우 절망에서 건져낸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내게 물었다.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뭘까? 지금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답을 할 수가 없어 답이 떠오를 때까지 물었다. 처참한 몰골의 자신에게 묻고 되묻고 생각하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심장을 둘로 쪼개는 아픔이 느껴졌다. 그 아픔 사이로 울음이 틈을 벌려 비집고 새어 나왔다. 차라리 왈칵 쏟아져 나왔더라면 아프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 만큼 혈관 사이사이를 조금씩 찢어 벌려가며 흐르는 눈물을 보고서야 나는 겨우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나를 위한 위로 같아.'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울었다기보다는 눈물이 쉼 없이 새어 나왔다는 게 맞겠구나. 알 수 없는 감정의 파편들을 눈물로 쏟아내고 나서야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었다. 잘하고 있다는 격려보다, 잘 될 거라는 희망보다, 걱정 말라는 위로. 어쩌면 나는 인생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지 못한 자책을 해결할 방도 보다 괜찮다는 위로의 한 마디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한 참을 울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쩌면 마흔둘.

그 나이는 흔들림 없는 견고한 나이가 아니라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는 나이 일지 모른다.

이뤄 놓은 것이 없어도, 자리잡지 못해도, 괜찮다고. 내가 나 스스로를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도록 보듬어 위로하는 나이 말이다.




애매한 나이지만 누구보다 나를 살 필수 있는 나이 마흔둘.

지금의 위로가 무사히 끝나면 나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견고히 다져지면 그다음 걸음은 서둘러 내딛지 않기로 했다. 느리지만 나와의 사랑을 단단히 하며 걷다 보면 다시는 나락으로 떨어져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일은 없을 테니. 여유를 담아 지켜 봐주기로 했다.

내가 나를 위로하는 나이, 나는 마흔둘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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