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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끼리 Dec 19. 2021

아빠의 독서

20년 만에 처음으로 한 권을 다 읽으셨다.

우리 아버지는 작년에 환갑을 넘기셨다. 그렇게 62년의 시간이 무심히 흘러가는 동안 책이라는 물건과는 꾸준히 멀리하셨다. 그저 취미가 아닌가 보다 생각했는데, 책을 뽑아 든 지 2주 만에 책을 다 읽었다며 웃어 보이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레 내가 또 무심했구나 하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의 독서는 나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높은 산처럼 보였고, 엄마에게는 그저 엄청난 놀림거리였을 뿐이었다.


  

처음으로 다 읽으신 책은 정세랑 작가의 신작 '시선으로부터'이다. 아주 우연히 함께 보는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 책을 소개해 주는 텔레비전 코너에서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책의 주제로 쓰였다는 작가의 인터뷰 내용이 흘러나왔고, 이 이야기가 아버지의 귀를 사로잡으신 것 같다. 때마침 아주 우연하게도 내 방 책장에 있었던 터였다. 일전에 내가 보고 싶었던 책이 중고 거래에 나와있었는데, 묶음으로 3권을 함께 사면 더 저렴하다 하여 그냥 내용도 모르고 구입했던 책이었다.

나는 관심을 보이시는 것도 모르고 싸게 샀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나는 다 읽은 책이야 저 책 지금 내 방에 있어" 했다. 나는 그제야  아버지가 관심을 보이시는 것을 깨닫고 냉큼 책을 가져다 드렸다.


그렇게 9시 뉴스가 끝나고 아버지는 안방에 들어가서 매일 50page 분량을 정해 놓고 책을 읽으셨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포기할 것이라는 엄마의 예상이 매번 빗나가고, 더 이상 아버지의 독서가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았을 무렵, 웃으시면서 "다 읽었어" 하고 책을 들고 나오시는 모습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와우." 엄마의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줄어들었고 나와 언니는 놀라고 기쁜 마음에 박수를 쳤다. 뻘쭘하게 다시 들어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에 마음이 살짝 찡하면서도 엄청 멋있어 보였다.   


다음날, 제사에 대하여 자기가 죽은 뒤에 이렇게 기억해 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살짝 멈칫했지만, 곧바로 "그럼 복잡한 제사 음식은 필요 없는 거지?"라고 농담으로 받았다. 처음으로 나와 아빠가 같은 책을 또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눈 대화였으며, 그 사실 만으로도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어머니의 푸념과 잔소리에 가려진 아버지의 무게는 얼마나 크고 무거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회에 웃음과 유머 속에 은밀하게 자리한 아버지의 든든함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고 언제나 우리 가슴에 깊숙하게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을 꼭 말씀드리고 싶다.  



아빠, 항상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곁에 있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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