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1부 가벼움과 무거움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9p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 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13p
그런데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그는 그녀 곁에서 죽고 싶었다고 학신했는데, 그 감정은 명백히 과장된 것이었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 자기가 사랑의 부적격자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한 남자가 스스로에게 사랑의 희극을 연기하면서 빠져들었던 신경질적인 반응은 아니었을까?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17p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 22p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에서 동정이라는 단어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와 공감한다는 뜻이다. 거의 같은 뜻을 지닌 연민이라는 단어는 고통 받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관용을 암시한다. /37쪽
축제가 끝난 지금, 그녀는 다시 그녀의 밤이 두려워졌고 밤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와 유사한 상황을 다시 찾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외국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었다.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49쪽
그와 테레자의 사랑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하기도 했다. 항상 뭔가 숨기고, 감추고, 위장하고, 보완하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질투심과 고토과 꿈에서 비롯된 비난을 감수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55쪽
난 동정심이라는 병을 앓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떠나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가 아니라 동정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동정심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58쪽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 /59쪽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이라기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65쪽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헝으로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자기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62쪽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잘못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았다. 모든 사람이 유죄였다. /77쪽
책은 그녀에게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의 도피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84쪽
2부 영혼과 육체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우연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이러한 엄청나게 많은 우연의 일치를 우리는 대개 완전히 무심결에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막 싹트는 사랑은 그녀의 미적 감각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녀는 그 음악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매번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감격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 주변에서 일어날 모든 일은 그 음악의 찬란한 빛에 물들어 아름다울 것이다. /91쪽
"당신이 나약하길 바라. 당신도 나처럼 나약하길 바라."였다. /129쪽
그들이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오류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행동 방식 혹은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존 불가능성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왜냐하면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강해질 줄 알아야 하는 사람 그리고 강자가 약자에게 상처를 주기에는 너무 약해졌을 때 떠날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약자다. / 132쪽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 하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주 대로에 쓰러지고 땅바닥에, 땅바닥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 /134쪽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135쪽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나는 팔레르모에 가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 다른 모든 도시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호텔, 똑같은 자동차가 있겠지. 내 아틀리에에서는 적어도 그림들은 항상 다르지." /143쪽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공적인 삶의 연장이 아니라 그 대척점이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언제 공격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44쪽
희극적인 것과 자극적인 것의 거리는 종이 한 장 차이일까? 그러나 뒤이어 희극적인 것은 자극 속에 파묻혔다. 중산모자는 더 이상 개그가 아니라 폭력을 의미했다. /149쪽
같은 대상이 매번 다른 의미를 야기했지만 그 의미는 이전의 다른 모든 의미와 공명을 일으켰다. (마치 하나의 메아리, 꼬리를 무는 메아리들처럼) 새로운 체험은 보다 풍부한 화음으로 공명을 일으켰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151쪽
여자로 사는 것, 이것은 사비나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이다. 선택의 결과가 아닌 것은 장점이나 실패로 간주될 수 없다. 우리에게 강요된 상태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적합한 태도를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 사비나의 생각이다. /153쪽
배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156쪽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유럽의 아름다움에는 항상 의도성이 깃들었지. 항상 미학적 의도와 장기적 안목을 지닌 계획이 있었어." /171쪽
위령기도였다. 경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순례자처럼, 삶과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똑같은 단어가 반복되었다.
그녀가 이 교회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것은 신이 아니라 아름다움이었다. 미사는 마치 배반당한 세계처럼 느닷없이, 음성적으로 그녀에게 나타났기에 아름다웠다.
그날 이후 그녀는 아름다움이란 배반당한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그 아름다움이란 박해자들이 실수로 어딘가에서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만 만날 수 있다. /185쪽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는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203쪽
그날 그들 사이에 몰이해의 심연이 깊게 팼다. /207쪽
4부 영혼과 육체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 계속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워 버릴 수도 없는 선을 실수로 긋듯, /235쪽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미래로 도망친다. 그들은 시간의 축 위에 선이 하나 있고 그 너머에는 현재의 고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274쪽
5부 가벼움과 무거움
철회한다는 것이 뭔가? 현대에 와서 사상은 철회할 수 없고 그에 반박만 할 수 있지. 이 친구야, 사상을 철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그냥 말뿐, 형식에 불과한 마술 같은 건데 자네는 왜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지 나는 도대체 알 수 없군. 공포로 통치되는 사회에서는 어떤 선언이건 약속이 될 수 없어. 폭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쥐어짜 낸 선언일 테니까 제정신인 사람에게는 그런 걸 못 본 척, 못 들은 척할 의무가 있는 셈이지. /296쪽
어떤 사람들은 비굴함의 인플레이션이 그들 자신의 행동도 평범한 것으로 만들며 그 실추된 명예를 돌려주기 때문에 즐거워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결코 포기하려 들지 않았던 명예에 각별한 특권이 여전히 유지되는 것을 보는 데에 익숙했다. /301쪽
'자아'의 유일성으 ㄴ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327쪽
뇌 속에는 시적 기억이라 일컬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지대가 존재해서 우리를 매료하고, 감동시키고, 우리의 삶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 기록되는 모양이다.
"나는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 행복 없는 쾌락은 쾌락이 아니야."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사람이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343쪽
"사상 역시 생명을 구할 수 있어요.
아버지 기사에는 뭔가 대단한 것이 있었는데, 그건 타협 거부였어요. 지금 우리가 잃어 가는 능력, 선악을 명백히 구별하는 능력 같은 거죠. 사람들은 이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라요. '거기에는 어떤 해명도 없었다.'라고." /356쪽
7부 카레닌의 미소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에 걸린 달은 아침에 꺼지지 못해 하루 종일 켜진 채 영안실을 밝히는 백열등 같았다. /465쪽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5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