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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Jul 13. 2023

보미야 그러지 말고 검은 옷을 사.

남들 다 사는 거 샀다고 유난 떠는 글

작가님 저는 정말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고요, 옷을 안 사기로 마음 먹었어요. 회사 다니면서 너무 쓸데 없이 많이 샀더라고요. 그래서 올해 옷에는 딱 30만원만 쓰겠다 다짐했어요. 그런데 봄에 벌써 15만원을 썼지 뭐예요. 아무래도 그른 거 같죠?

-보미야 그러지말고 검은 옷을 사. 나는 15년 째 검은 옷만 입는단다. 세탁도 언제든 할 수 있고, 얼마나 편한지 몰라. 이건 비밀인데, 같은 옷을 연거푸 입어도 아무도 아는 이 없어. 심지어는, 내가 검은 옷만 입는다는 것도 잘 모를 걸. 나는 늘 색채가 강한 사람이잖니.


(그렇지만 제 퍼스널컬러는 봄브라이트인걸요!)
(검은 옷이 너무 안 받는데 어떡하죠?)
(저도 색채가 강한 사람인 거 같은데 검정 옷을 이겨낼까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저는 작가님이 좋고, 따라하고 싶고, 따라가고 싶으니까) 우와! 정말 좋은 생각이예요! 저도 검은 옷을 입어야겠어요!


그렇게, 이제부터 모두 검정만 사겠다고 다짐했다. 괄호 속의 무수한 속마음은 작가님을 향한 동경 앞에서 그저 흩어졌다.


그러고 검은 바지를 샀다. 영화관에 가면 어쩐지 아무데나 주저앉을 거 같단 예감이 들어서 편하고 세탁에 용이한 검은 바지를 하나 샀다. 또 검은 팀복을 만들었다. 하얀색에도 예쁠 거 같은 도안이었으나 같이 만들던 친구가 일복은 무조건 검은색이어야 한댔고 나도 적극 동의하여 검정이 되었다. 얼마 뒤 검은 팀복이 도착하고, 공식 스태프티로 또 검정 옷이 두개가 더 생겼다. 그 검정의 옷들을 영화제 7일 간 고쳐 입었다.

예감대로 나는 영화관에서 아무데나 풀썩 주저앉기 일쑤였고 음식을 자꾸 급하게 먹어 흘리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그런 태도에도 검은 옷은 끄떡없었다. 겨우 옷 색이 바뀌었을 뿐인데 나는 아무데나 앉아도 좋았고, 아무렇게나 먹어도 좋았다. 신경 쓸 게 오만 가지인 상황에서 두 가지나 신경을 덜 수 있었다. 작가님이 말씀 주신 편함이 이런 건가요, 영화제 중반 검정 옷 더미를 세탁기에 주저 없이 우겨 넣을 때는 그런 깨달음도 있었다. 과연 작가님 손민수는 실패할 리 만무했다.


오늘은 타투하는 날 입을 옷을 샀다. 짧은 티셔츠였는데 흰 옷을 관성처럼 집어들었다가 신념으로 내려놓았다. 그 대신 어떤 빨강 양념과 까망 먼지와 어두운 커피와 노란 파데도 끄떡없을 완전한 검정을 집었다. 그걸 샀다. 내 인생 최초의 검정 상의 구매 경험이었다. 음식점에 가서 앞치마를 사양할 수 있는 준비물을 드디어 얻었다. 이런건 실로 해방의 경험이다. 경계의 허뭄이다. 아니 이걸 왜 아무도 나한테 안 알려줬지, 거대한 외부세력이 나를 뭐 묻을까 종일 신경쓰게 해 신경쇠약에 걸리게 하려고 밝은 옷 안에 가둬둔 거 아니야, 라는 헛소리를 떠올릴만큼 신이 났다. 더이상 칠칠 맞게 흘리면서 세탁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덤으로 자존감도 올라갔다. 나는 분명 작가님이 먼저 말씀하기 전까지 작가님이 검은 옷만 입는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그런 사례를 고려하여 스스로를 고찰하였을 때 내 색채가 겨우 옷감의 색따위에 죽을 거 같진 않다. 운좋게도 최근에 사랑하는 친구와 사람마다 떠오르는 색깔이 있다며 온갖 색과 사람을 이어붙였는데, 나는 늘 연두 연노랑 연하늘을 벗어나질 않았다. 청량음료에 들어갈 색소 색깔이 어울린다는데, 그런 추상적인 사람에 대한 느낌을 퍼스널컬러라고 내 마음대로 정의해버리면 내가 무슨 색의 옷을 입든 내 퍼컬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 하는거 아닌가. 내가 발하는 아우라의 색감은 웬만해선 색채감을 잃기 쉽지 않을 걸, 뭐 이딴 생각을 하며 검정 잠옷을 입었다.


검은 옷 입겠다는 얘기를 이렇게도 한다.
아 그리고 내일은 파란 타투 하러간다. 어쩔어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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