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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Apr 30. 2021

이런 것도 소설이 될 수 있을까 싶던 글이 벌써 5쇄

<그깟 뿌리염색을 하지 않아도>, 유희정


그런데 왜 소설가의 나이는 다 비슷하지. 보통 30대에서 40대가 많은 것 같아. 그 나이가 되면 글을 잘 쓰는 걸까? 나이에도 체급차이가 있는 건가? 그래서 대학소설상을 헤집었다. 말하자면 웃기지만 동년배의 소설이 읽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선택을 해도 한참 잘못 했는지, 읽는 것마다 너무 피폐해서 힘들었다. 결코 재미가 없다거나 문학성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ㅠ-ㅠ 지극히 주관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타고나길 심신이 미약해 기생충 보고 한동안 식음을 전폐한 전력도 있는 지라... 너무 선연한 공포가 버거웠다. 내가 사랑하는 류의 소설을 쓰는 젊은 작가는 없을까. 아무래도 문단문학에서는 20대에게 기대하는 어떠한 것이 있는 게 아닐까. 10대보단 머리가 컸으나 30대보단 휘청거리고 법적으로는 성인이나 일종의 문화지체로 영혼이 그를 따라가지 못해 일어나는 어떠한 괴리와 분리를 그려내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감히 해봤다. 아무튼 문단 문학에서 가볍고 말랑한 글을 쓰는 또래 문학가를 찾기는 어려워 보여서 독립서점으로 향했다. 작년에 친구에게 이름이 똑같고 우리보다 한살 많은 작가의 독립서적물을 선물해줬고 되게 좋아했던 기억이 있어서 거기에 가면 내게 맞는 몰랑한 작가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서점에 들러 사장님께 20대가 쓴 창작물을 찾고 있다 말씀드리니 성심껏 도와주셨다. 한동안 가득 꽂힌 책장에서 20대가 쓴 이모저모를 뽑아주셨다. 이 책은 이런 책이고요, 저 책은 저런 책이에요. 역시 약은 약사에게 책은 서점지기에게 부탁하는 게 맞다며 손뼉을 치며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게중에 세권 정도를 사왔고, <그깟 뿌리염색을 하지 않아도>도 그 중 하나였다. 산 이유는 간단했다. 사장님이 귀여운 책이랬고 내가 뿌리염색을 안 한 지 반년이 넘어가기 때문이다. 미용을 전공한 동생이 드문드문 잔소리를 할 정도로 층이 나눠져버린 뿌리를 생각하자니 일단 사야겠다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사 온 책을 한달이 꼬박 지난 오늘에야 꺼내들었다. 들어오는 책은 너무 많은데 책을 읽는 속도가 미적지근해서 때를 놓쳤다. 아무튼 펼치긴 펼쳤으니까 된 거 아니냐며 허공에 둘러대고 읽어내렸다. 수록된 에세이는 요즘 쓰고 있는 백일봄보다 짧은 것이 대다수이며 가끔가다 한페이지를 조금 넘기는 것이 있었다. 길이에 대한 강박이 없어보였다. 아니 그런데, 누가 강제하지 않았는데 나는 언제부터 길이를 신경썼지. 아무래도 레포트 쓰는 버릇을 못 버린 거 같다. 갑자기 학부생이라는 내 신분이 뇌리에 박혔다. 아무튼 책은 전체적으로 자유로워 보였다. '이런 게 소설이야?', '이런 게 에세이야?'라는 검열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냥 쓰는 대로 썼으며 본인이 소설이라 명명하고 썼으니 소설인 것. 언제부터 소설과 에세이에 자격이 있었나. 그냥 내가 그렇다 부르면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누구의 눈치를 보느라 소설을 써놓고 이걸 소설이라 부르길 망설였는지 아연했다.



예전 어느 때는 뿌리염색 하지 않은 머리가 보기 싫어서 3개월에 한번씩 정수리를 괴롭혔다. 그런데 이젠 별로 보기 싫은 지 모르겠는 걸. 그러면 그깟 뿌리 염색을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 아 정말 잘 지은 제목이야. 뿌리 염색 대신 그 어떤 단어를 넣어도 이물감 없이 치환될 거 같아.


그깟 등단을 하지 않아도, 그깟 토익/컴활/한국사를 하지 않아도, 그깟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당분간 이렇게 생각해볼까.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짧은 소설들을 묶었다.

에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짧은 에세이들을 묶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내가 썼던 글들은 나 스스로를 위로하는 글들이었다.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인 줄 알았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문장이었다.


물들지 않아도 괜찮아.

가끔은 떼를 써 봐도 괜찮아.

떠도는 그림자여도 괜찮아.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일정한 수입이 생겼다는 점에서는 다르지만, 영 애매모호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어느 하나 변한 것이 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물들고 싶지 않고, 떠도는 그림자 같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때 이 글들이 나를 위로했듯, 이번 출판이 지금의 나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깟 뿌리염색을 하지 않아도>, 유희정,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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