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첫 번째 이야기
2019년 12월 11일,
런던 이후 또다시 찾아온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14일에 H와 시애틀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3일 정도 내리 혼자 있게 된 셈이었다.
사촌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인천공항행 리무진에 올라탔다. 약 두 달간 못 볼 생각을 하니 괜스레 눈물이 도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언니를 통해 전해받은 이모의 용돈과 샌드위치를 보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꽤 분주했다.
유심 수령, 환전, 체크인, 이런저런 정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이륙시간이 다가왔다. 시간이 지연되는 바람에 여유가 생겼지만 폰 배터리는 여유롭지 못해 마음이 조급했다.
원체 여행은 좋아해도 비행은 좋아하지 않는 터라 장시간 비행에 걱정이 앞섰다.
얼마나 불편하고 피곤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혼자 타는 비행기는 오랜만이었다.
이건 그 나름대로의 묘미가 있는데 내가 꼭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다이어리 하나 꺼내어 글을 쓰고 있노라면 마치 사연이 있어 한국을 떠나는 방랑객이 된 기분이다.
그렇게 견딘 9시간.
처음 밟은 캐나다 땅은 왠지 모르게 무서웠다. 항상 유럽만 다닌 데다 이번엔 친구도 없어 입국심사에서 안 받아주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아디다스 운동복을 입은 동양인 소녀는 그들에게 위험인물이 아니었는지 간단한 질문 몇 가지(어디 사는지, 밴쿠버엔 며칠 머무는지, 왜 왔는지) 물어보고는 통과시켜주었다.
밴쿠버의 하늘은 칙칙했다.
레인 쿠버라는 별칭이 붙을 만한 음산한 하늘이었다. 날씨운이 있는 편은 아니라 비만 오지 말아라 했는데 결국 여행 내내 비를 달고 다녔다.
나는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예약한 숙소까지 가기로 했다.
트레인은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에서 탈 수 있었다.
(개찰구 앞에선 밴쿠버의 교통카드인 컴패스 카드 구입이 가능했는데 보증금+충전 가격까지 26 CAD 지불했다.)
숙소는 '세임선밴쿠버'라는 센트럴 역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 호스텔이었다. 위치가 좋다는 게 최대 장점이었다. 센트럴 역에서 나오자마자 연말 분위기를 풍기는 길거리가 펼쳐졌다.
목도리를 두른 외국인들이 바삐 걸어 다니고, 꽃을 파는 트럭 그리고 커다란 트리와 전구 장식들이 즐비한 그런 거리.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는지 14kg짜리 캐리어도 가뿐했다.
서둘러 호스텔에 도착했는데 영어라는 장벽이 남아있었다. 캐나다 사람은 말이 정말 빨랐다. 어설픈 영어로 설명해주던 유럽인들이 그리울 정도였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체크인은 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당장 나가고 싶었지만 비행의 여독이 안 풀린 탓인지 아니면 침대가 너무 포근했기 때문인지 입고 온 그대로 잠에 들었다.
나무 벙커 속 하얀 이불은 아주 푹신했다.
한 네 시간 잤나? 눈을 뜨니 바깥은 이미 밤이 되어있었다. 바깥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우산과 지갑만 챙기고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7시가 늦은 저녁은 아닌데도 길거리는 한밤중 같았다. 조금 무서웠지만 여기가 밴쿠버라고 생각하기 심장이 뛰었다.
혼자 하는 여행의 친구는 음악이라고, 백예린의 신곡은 비 오는 밴쿠버 밤거리와 잘 어울렸다.
밴쿠버 증기시계는 친구 H의 말대로 대단할 건 없었다. 그래도 발전한 도시 한복판에 오래된 증기시계가 있다는 게 상징적이긴 했다. 시계는 어둑한 다운타운 거리에서 정각마다 소리를 내며 하얀 증기를 내뿜었다. 꼭 검은 배경 속 오래된 흑백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시계 하나가 거리의 가치를 바꿔놓은 셈이다.
저녁으로 먹은 초밥은 맛이 없었다.
혼자였기 때문일까?
조금 급한 듯이 접시를 비우고 배만 채운 채 일어났다.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서 물한병과 초콜릿 과자 한 봉지를 샀다.
아직은 혼자 하는 여행이 익숙하지 않아서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무서웠지만 그만큼 혼자라 오는 설렘이 컸다.
커피 한잔이 고픈 밤이었다. 가까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다들 곧 닫을 것처럼 마감 준비를 하고 있어 조용히 숙소로 돌아갔다.
그날 밤은 새벽 내내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도 그저 좋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