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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그랜빌 아일랜드

밴쿠버 두 번째 이야기

by summer


밴쿠버 이튿날


두 시간에 한 번씩 잠에서 깼다.

호스텔은 24시간 개방된 휴게실이 있어 새벽 5시쯤 책 한 권을 들고나갔다. 다행히 새벽에 잠이 오지 않는 이가 나 혼자는 아닌 것 같았다. 북적이진 않지만 종종 다녀가는 사람들을 보며 외로움을 달랬다.


이번 여행을 함께 한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조식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완독을 목표로 가져간 책인데 이번이 네 번째 도전이었다.

책을 읽다 보니 아래층에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조식 시간이 조금 일찍 시작된 것 같았다. 내가 머문 호스텔 '세임선밴쿠버'는 조식이 잘 나오기로 유명했는데 메뉴엔 빵과 잼만 가득했다. 빵은 5-6가지가 있었고, 잼은 딸기잼과 크림치즈 두 가지였다. 빵은 이렇게 많으면서 그 흔한 달걀 한 알도 없다는 게 충격이었다. 야채도 오이가 전부라 '이게 식사가 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로마에 왔으니 로마 법을 따라야지. 나는 커피 한잔 그리고 베이글과 크림치즈를 가져왔다. 탄수화물과 당, 카페인으로 이루어진 아침이었다. 오이와 몇 안 되는 과일을 가져왔는데 살기 위해 먹는 기분이었다.

이 날따라 조식 먹는 사람이 많아 홀이 북적였다. 아직 긴장이 덜 풀렸던 나는 누가 말이라도 걸까 가시를 세우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충 말하면 됐을 텐데 그땐 서툴다는 것이 참 부끄러웠다.

서둘러 조식을 먹고 방으로 올라와 다시 잠잘 채비를 했다. 조금 충전한 뒤 점심쯤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렇게 꿀 같은 아침잠을 자고 눈을 뜨니 점심이었다. 그날 체크인한 룸메이트가 한국인 언니였는데 어쩌다 보니 말을 트게 되어 같이 나가기로 했다. 외국에서 한국인 만나면 반갑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밴쿠버 오기 전부터 친구가 추천해준 장소가 있었다. 그랜빌 아일랜드라는 곳인데, 그곳엔 넓은 마켓이 있다.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연말을 준비하는 마켓을 볼 수 있었다.

언니와 버스를 타고 달리다 그랜빌 아일랜드에 내렸다.

이날의 밴쿠버 역시 비가 왔다. 전날과는 다르게 조금 굵은 빗방울들이 수없이 떨어졌다.
다행히 마켓은 실내였고 신발을 덜 적실 수 있었다.

마켓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크리스마스 감성의 진저맨 쿠키, 트리 쿠키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캔디, 과일, 소소한 먹거리들도 내 눈길을 빼앗았다. 꼭 크리스마스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빈티지한 가게들이었다. 귀여운 쿠키 하나쯤 사보고 싶었는데 한 조각에 4000원인걸 보고 고민하다 결국 사지 못했다.

그랜빌아일랜드 마켓


애석하게도 쿠키는 사지 못했지만 점심은 사 먹을 수 있었다. 마켓 안에 푸드코트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커다란 피자 한 조각을 사서 테이블에 앉았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이렇게 놀러 나왔다는 것이 퍽 신기했다. 혼자 여행의 묘미가 이런 걸까?

피자는 꼭 코스트코 피자 같았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맛의 음식을 먹으니 반가운 듯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해산물 튀김이나 클램 차우더 등 다양하게 먹고 있었지만 나는 입맛이 없어 피자 한 조각만으로 충분했다.

점심으로 먹은 피자


언니와 나는 각자의 이야기, 한국에서는 어땠는지, 요즘은 뭘 하는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잠깐 인스타그램 이야기를 하면서 sns 친구를 맺었다. 인스타그램이 새로운 사람과의 대화에서 괜찮은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도 언니의 근황을 인스타그램으로 확인하고 있다)


​피자 한 조각을 먹고 후식으로 봐 둔 가게에서 젤라토를 사 먹기로 했다. 언니는 솔티캐러멜과 체리맛 젤라토 두 스쿱을 먹었고, 나는 스트로베리 한스쿱을 먹었다. 항상 새로운 걸 도전하고 싶지만 익숙한 걸 찾게 된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시장을 조금 더 돌아다녔다. 마켓 곳곳은 이미 크리스마스였는데 연말 분위기를 어디서든 낼 수 있는 외국 사람들이 부러웠다.

마켓 근처까지 구경하다 빈티지풍 엽서를 판매하는 가게를 찾았다. 밴쿠버 기념엽서만 사려다가 얼떨결에 크리스마스 엽서를 4장이나 구입했다. 외국 느낌 가득한 예쁜 엽서라 아까워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엽서들


짧은 구경이 끝나고 언니는 다른 곳을 구경할 예정이라고 했다. 따라가고 싶었지만 비가 오고 기운이 빠져 나는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르게 귀가하는 기분은 정말 좋았다....

난 숙소에 오자마자 또 한 번 잠이 들었고, 눈떠보니 밤 아홉 시였지만 저녁을 먹기 위해 외출을 강행했다. 바로 앞에 맥도널드가 있어 맥너겟 세트를 시키고 창밖을 보며 너겟을 씹었다. H는 너겟만 보면 내가 생각난다고 했다. 스페인에서 뭐만 하면 너겟 사달라고 징징거렸기 때문이다. H는 내가 보낸 너겟 사진을 받고선 '벌써 네가 너겟 사달라고 할 모습이 보인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보니 H가 더 보고 싶었다.

맥도널드엔 자리가 없어 스탠딩 테이블에 서서 먹었는데 그건 또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었다. 뭐랄까.. 지나가다 잠깐 들러서 야식 먹는 행인 1 같은 분위기^^..

이상하게 캐나다에선 식욕이 돌지 않아서 남은 감자튀김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새벽에 깨면 휴게실에서 먹을 생각이었다.

물론 어김없이 새벽에 깨어났고 책과 감자튀김을 든 채 유유히 휴게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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