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 1
우리는 아침 7시에 숙소에서 출발하는 슈퍼 코리안이 되었다. 오늘은 이사를 가는 날이기 때문. 바르셀로나에서 그라나다로 옮기는 날이다. 서울에서 부산 가는 느낌이지만 기차로 6시간이라는 점. 그러나 꼭 오늘만이 아니라, 아침부터 뚱땅거리고 움직이는 사람은 숙소에 우리밖에 없었다. 다들 아침잠을 즐기는 사람들인가.
둘 다 28인치 캐리어와 뚱뚱한 백팩을 이고 오는 탓에 아침부터 아주 험난했으나, 기차는 아주 쾌적하고 편안했다. 캐리어 두 개를 자전거 자물쇠로 엮어서 기둥에 묶어놓을 만큼 위험천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자물쇠를 단단히 걸고 있는 우리는 역시 슈퍼 코리안이다.
조용했던 기차가 한순간 하이틴 수학여행 기차가 되면서 침묵이 깨져버린다. 영국 학생들이 단체로 들어왔기 때문. 우리 바로 뒤에서 아이들은 모였다 흩어졌다 웃었다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유 룩 소 어글리…라는 말도 들린다. 그렇게 같이 깔깔거리고 웃던 친구에게 어글리라고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예전에 내가 우는 모습이 정말 못생겼으니 울지 말라고 하던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이제 곁에 없다. (죽었다는 건 아니고…)
아이들을 통해 나의 수학여행을 떠올려보면, 즐겁다가도 멀미를 하고 애를 쓰고도 미묘하게 긴장됐던 것 같다. 이 발랄한 애들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복잡한 생각 대신 창밖을 보기로 한다. 나무를 재배하는 농가들이 무지 많다. 나무가 아니라 나무의 열매를 원하는 건지 몰라도.
생각보다 6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타자마자 맥모닝을 먹고, 얇은 책을 한 권 보다가 창밖도 좀 보고, 영화나 유튜브를 보기로 한다. 집에서 자주 보던 영화를 보니까 향수병에 걸릴 것 같아서, 좋아하던 유튜버를 본다. 그는 실재하는 일상 브이로거이기 때문에 나의 의식도 다시 현재로 가져오게 만든다. 여행 내내 그의 영상을 애용할 것 같다.
그렇게 도착한 그라나다. 오는 길에 웬 스페인 번호로 전화가 와 있던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캐리어를 열심히 끌고 밀고 들어 올려서 숙소 앞에 당도했으나, 호스트가 없다. 부킹닷컴으로는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도 없고. 전화만 하염없이 걸면서 기다리다가 우선 바로 옆에서 밥이라도 먹기로 한다. 마파두부와 소고기 버섯볶음이 우리의 심신을 살려냈다.
알고 보니 호스트가 몇 시간 전 메일로 체크인 시간을 물어보았고, 내가 답장이 없자 전화까지 한 것이다. 학교도 졸업한 마당에 메일을 확인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그에게 사과하며 셀프 체크인을 시작한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3층까지 캐리어를 들고 왔다. 그런데 키가 말을 안 들어서 10분 정도는 씨름을 했다. 이런 날이면 숙소 안에도 아무도 없기 마련이다. 마치 ‘개밥 줘 소밥 줘‘ 랩처럼, 호스트 없어 엘리베이터 없어 열쇠 안 열려… 남자친구랑 전화하다가 결국 눈물을 찔끔 흘린다.
이 숙소는 전 숙소와 달리 너무 향긋하고 깨끗하고 널찍하다. 화장실이 세 개나 있는데 물이 너무 개운하고 좋아서 석회수가 아닌 줄 알았다. 들어오자마자 씻고 나니 마음과 문제들이 싹 풀리고 만다. 결국 이럴 거면서. 친구는 이런 상황에 크게 요동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발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각자의 방법대로 하기로 한다.
그라나다는 성당과 알함브라 궁전이 공존하는 곳이다. 아랍 사람들이 아주 많은 곳이기도 하다. 성당 앞에는 노숙자와 구걸하는 자들이 많다. 목을 긁으면서 무서운 소리를 내면 도망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구슬프게 기타를 치던 동양인도 있었다. 어쩌다 그가 그라나다의 한 길바닥에서 쟁반을 두고 기타를 치게 됐는지 그 세월이 무척 궁금했다.
여행은 사람을 자주 벅차게 한다. 춥고 배고프고 무겁고 힘들어도, 순간의 기쁨이 그것들을 덮는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거리와 사람들의 일상이 풍요 그 자체다. 그래서 그냥 도시를 걷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여행자라는 제3의 입장에서 이곳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기쁘다. 내게는 모두 새로운 곳이라서. 전혀 익숙하지도 권태롭지도 않게 느껴져서.
그리고 투어를 온 한국인들을 자주 본다. 부부 동반인지 일렬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지난다. 그들 중에 우리 아빠도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던 것 같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그지만 이 거리만큼은 걸어봤으면 좋겠다고. 그 줄의 시작점에 있던 아저씨가 방가방가, 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우리는 뒤따라오는 한국인들과 안녕하세요, 세례를 주고받는다. 그렇게 그라나다의 한 거리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의 안녕을 묻는 사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