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렌토
한국에서 자주 읽던 책을 읽으니까 심신이 좀 안정된다. 내가 아무도 모르고 나를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똑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잠시 잊게 된다. 생각이 깊은 누군가의 글들을 보면서, 알량한 생각만 가득했던 나의 첫 여행을 돌아보는 중이다.
한 도시에서의 마지막 날, 체크아웃 전에 혼자 나와서 빵과 커피를 사가는 걸 루틴으로 만들고 싶다. 빵과 커피에 있어서만은 돈을 아끼고 싶지 않다는 게 나의 작은 신조다. 작고 빠른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인가보다. 그래서 급하게 행복해졌다가 다시 급하게 가라앉는 사람인 것도 같다. 한국에서도 거의 매일 커피를 먹고,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과제를 했었는데, 당장은 커피보다 맛있다는 빵집을 섭렵하고 싶다는 오기가 생긴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유럽, 그리고 로마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숙소를 잡게 된다면 꼭 테르미니 뒤쪽이 아닌 옆쪽이나 앞쪽으로 잡아보겠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한량이 많다. 할 일이 없어서 시비를 걸 것 같아 위축된다. 어깨와 종아리가 자주 뭉치고 단단해져서 풀어줘야 한다. 수많은 언어가 섞인 기차 안에서, 언젠가 꼭 스페인어를 배워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한다.
로마에서의 첫인상이 많이 구렸지만 마지막은 가장 아쉬웠던 것 같다. 로마라는 이름이 주는 에너지와 풍요를 잔뜩 느끼고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예 유럽에 산다면 어느 나라든 가볍게 기차로 여행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왕복 백만 원이나 쓰고 비행기를 타고 오지 않아도 될 텐데. 그래도 3-4일마다 무거운 짐을 싸고 끌고 지고 다니는 게 아주 벅차지는 않다. 그저 짐을 옮기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어려운 일이 없어진다.
한국이 자주 그립고 한식은 더 자주 그리운 것 같다. 그래서 로마에서의 마지막 저녁은 김치찌개가 됐다. 리뷰가 좋은 한식당이었는데 어떤 아저씨들이 단체로 회식을 하고 있어서 집 앞 닭볶음탕 집에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서버가 한국분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웬만한 한국말을 할 수 있었고, 감자조림과 콩나물무침을 더 가져다달라는 말에 친절히 가져다주었다. 유럽에서는 무언가를 더 가져다달라고 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로마의 한식당에서만큼은 리필이 가능해진다. 물도 사 먹는 나라에서 메인 반찬을 더 가져다주는 일은 얼토당토않은데 한국이 그렇지, 그 넉넉함이 그립다.
짧고 긴 글들을 쓰기 위해 기억을 응축해놓고 싶은데 생각보다 기억이 금방 휘발된다. 희미해지는 것들을 붙잡고 싶어서 메모장을 자꾸 켜게 된다.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국가를 넘어갈 때마다 기억들을 흩뿌리고 감정만 남겨 간다. 모든 곳이 좋기만 할 수는 없는 거야. 그렇다고 모든 곳이 나쁘기만 할 수도 없는 거지. 어떤 기억과 감정을 가져가느냐는 내가 선택할 일이다. 자주 우울하지 않기 위해 좋은 것들을 주로 골라서 모아둔다. 내가 글을 자주 쓰는 사람이라는 게 여행에 있어서는 더 기쁜 일이다. 생각을 고르고 엄선하는 일도 점점 빨라진다. 그러나 급하게 하면 체하기 마련이니까 신중해지는 연습도 필요한 것 같다.
그럼에도 아직은 멀었다고 느낀다. 이를 너무 꽉 깨물고 있음을 자주 느낀다. 특히 혼자 있을 때, 시간이 없을 때,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마음이 초조해지는 순간마다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집이자 삶이고 일상인 거라고 생각하면 견딜 만해진다. 남의 집에 그렇게 오래 머물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나의 진짜 집은 먼 곳에, 먼 사람들에게 있으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정말 다행인 일이다. 언제든 기댈 품이 있다는 게, 투정할 존재가 있다는 게, 무엇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게 나를 가볍게 한다. 하나님은 국경을 넘는 데 시간과 돈이 필요하지 않으시니까.
스페인도 이탈리아도 가톨릭 문화가 주류였는데 아마 그게 나의 적응에 도움이 됐는지도 모른다. 내 삶에 마리아는 없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무한한 사랑이 본보기가 되는 것 같다. 너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해? 우리처럼 삶을 다할 수 있어? 우리 성전도 진짜 많아, 하고 말하는 것 같기도. 이를 앙 다물지 않게 조금 더 힘을 풀어버려야 한다.
바르셀로나에서 남부로 이동할 때보다 로마에서 남부로 이동하는 게 더 가벼운 마음이다. 이제 잦은 이사에도 덜 흔들리는 마음을 갖게 됐는지 모른다. 적응과 타협이 빨라질지도 모른다. 내게 꼭 필요한 일이다. 불안정한 상황과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연습도 필요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아주 많은 것들을 연습하고 가게 될 것만 같다.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고 있다.
도시를 이동하면서 아주 무겁고 쓸데없는 짐들을 빨리 버리고 있다. 처음엔 아무것도 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빼다 보니까 더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아진다. 채우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쉬워졌다. 이번 여행이라고 자주 말해야겠다. 그래야 다음도 있을 테니까. 그땐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오겠지, 좀 더 가벼운 캐리어를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