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 가며 얻은 것들

아시시

by 최열음

86일 치 여행의 짐은 너무나 방대하다. 게다가 첫 유럽의 짐은 턱없이 과도하다. 나는 온갖 종류의 쓸모 있는 생필품, 쓸모없는 생필품들을 조합해서 캐리어에 쑤셔 넣어왔다. 더는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며 가져온 것들이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약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이탈리아로 가기 위해서는 저가 항공을 거쳐야만 했다. 저렴한 대신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비행이었다. 최초의 비행 때 23kg로 맞춰온 짐을 20kg로 줄여서 가야 했다. 숙소에서 열심히 짐을 빼고 노력해 봤지만, 수하물을 부쳐보니 21kg였다. 결국 공항 한복판에서 캐리어를 펼쳤다.


그렇게 버린 것들이 스타벅스 다이어리, 레깅스, 벌레 퇴치제, 패드용 키보드, 오래된 치마 등등… 그 자리에서 버린 것만 그 정도니까 더 자잘한 것들은 이미 포기하고 온 것이었다. 계속 마음에 남는 녀석들은 레깅스, 다이어리, 키보드이다.

레깅스는 크로아티아에서 한달살이를 할 때 입고 싶었던 것이다. 내겐 두 타입의 레깅스가 있다. 하나는 딱 붙는 보통의 레깅스, 하나는 부츠컷 레깅스. 나는 전자를 가져왔고 이제 한국에는 후자만 남아있다. 애초에 크로아티아에서 달릴 의지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레깅스는 일말의 희망이었다. 없어도 될 희망이긴 하지만.


스타벅스 다이어리는 공짜로 받은 것이었다. 스타벅스에서 7개월 간 일을 하고 무료로 받은 것들. 파우치, 앞치마, 데스크용 키트, 다이어리… 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받아도 크게 기쁘지는 않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다이어리는 그린과 레드 중에 레드를 선택한 게 마음에 들었는데. 다이어리를 받아가는 사람 중 대다수가 그린을 선택했기 때문인지, 오히려 레드가 예뻐 보였다. 괜한 반항심이나 홍대병일지도.


키보드 역시 크로아티아에서 쓰려던 것이다. 키보드를 꺼내는 건 너무 본격적이라서, 아직은 핸드폰으로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지만 크로아티아에서 살게 된다면 거실이나 방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쓰려던 것이었다. 두 개를 챙겨 온 줄 알고 하나만 가져가려고 한 건데, 가방을 보니까 아예 없다. 어차피 오래돼서 온점이 찍히지 않는 키보드였다. 그냥 열심히 폰으로 쓰거나 클래식하게 손으로 쓰겠다고 생각한다. 크로아티아에서 뭔들.

그렇게 과감하게 버려가며 얻게 될 것들이 많을 것이다. 없어도 잘 살 것들, 또는 없으면 못 살 것들을 품에 꼭 쥐고 다녔다. 하루를 구성하는 물건이 왜 이렇게 많은지. 괄사에 손톱깎이까지 들고 온 나로서는 여행에서도 한국과 같은 일상을 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행자로 매일 알차게 놀다가 밤을 맞는 것과, 공부하고 일하다 밤을 맞는 건 완전히 다르다. 일상인 척을 한다고 그게 일상이 되는 건 아니다.


밤이 되면 나와 친구는 각종 sns나 영상 같은 익숙한 것들을 보며 지낸다. 나는 주로 반복해서 보는 먹방이나 일상 브이로그를, 친구는 주로 새로운 예능이나 드라마를 본다. 가끔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도 하는데, 아직은 4권 중에 한 권밖에 못 펼쳤다. 가장 마음 편하고 손이 많이 가는 책만 연달아 보는 중이다.

낮에는 하체만 한 캐리어를 들고 다니느라 멍도 많이 들고 관절이 뻐근하다. 그래서 밤에는 넉넉히 쉬어간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숙소를 옮기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다. 여행하지 않는 모든 삶도 비슷하겠다. 낮의 고생으로 밤에는 휴식이 주어지고, 그래서 더 달콤하고 짧고.


이탈리아의 마지막 소도시, 아시시에서 이 글을 쓴다. 아시시는 가톨릭의 성지라서 모든 관광지가 성당과 교회이다. 성직자들이 살기 좋은 도시 같다고 생각한다. 작고 성스러운 이 도시에는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 많은데, 그래서 오히려 자유롭다고 느낀다. 성당에는 짧은 옷 금지, 사진 금지 등등. 우리는 머리를 못 감아서 모자를 쓰고 갔는데 괜히 눈치가 보였다. 교회인들이라 성당의 룰에는 좀 무지하다.


약 2주가 넘는 여행 동안 일몰을 제대로 못 봤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꼭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강풍주의보가 떴지만 우리는 이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배기로 올라가기로 한다. 어느 곳을 가든 야경이나 전경을 보는 건 필수 코스니까. 그렇게 바람과 싸우며 올라간 로카 마조레는 가장 사람이 없고 황량하고 넓게 트인 언덕이었다.

약 20분 정도 바람에 밀려가며 기다린 결과, 구름 속에 파묻힌 해의 꽁다리를 볼 수 있었다. 2주 동안 본 유일한 일몰이었다. 제대로 일몰은 못 봤어도 시뻘건 해는 항상 지고 있었고, 우리도 거기에 있었으니까. 어쩌면 내가 살면서 보는 게 꽁다리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고작 저만큼을 보고 세상과 사람을 안다고 하는 건 너무 무례한 일 같았다.


뇨끼를 먹고 싶어서 해의 꽁다리를 남겨두고 내려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뇨끼를 가득 씹어먹고 싶어졌다. 아시시는 당일치기로 많이들 오는 도시라서 저녁 시간이 되면 광장에 사람이 아주 없다. 강풍주의보라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내가 찜해둔 식당 안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거기서 뇨끼와 피글렛 어쩌고 메뉴를 먹으면서 좀 전의 추위와 마지막 이탈리안 음식을 해결했다. 꽤 괜찮은 식사였다.

마끼아또를 달라고 했는데 냅다 라떼를 가져다주던 이탈리아, 음식을 시키고 결제도 하려면 서버를 계속 쳐다봐야 하던 이탈리아, 시키지도 않은 메뉴를 계산서에 냅다 찍어주던 이탈리아, 계산을 안 하고 나가도 쨔오 하고 처음처럼 반갑게 인사하던 이탈리아. 모두 이제 안녕이다. 스페인을 떠날 때보다 더 아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제 여행자의 삶이 조금 더 안락하게 느껴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