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나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전날 쓰다 만 글을 완성한다.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붙잡아야 하므로. 조금씩 모아둔 글감을 가지고 하루치의 글을 완성한다. 보통은 밤이나 버스나 기차에서 이루어지는 일인데, 여행 중에는 아침에도 종종 가능한 일이 되었다.
하루 또는 이틀 치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기분 좋게 소진되어 있다. 여행하고 난 뒤의 피곤함과는 아주 다른 결이다. 무수하게 떠다니는 나의 생각 중 그럴듯한 것들만 붙잡아서 글을 쓴다. 그런 글을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날들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브런치를 하나 올리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전파가 잘 터지지 않는 디지털 사각지대이기 때문이다. 내 글에는 여행 사진이, 특히 내 사진이 많이 들어가야 하는데 사진을 올리려면 그만큼의 전파와 데이터가 필요하다. 하루가 갈수록 한국에서 그런 것들이 너무 쉽고 당연했다는 걸 감각하고 있다.
친구들과 카톡을 하다가도 터널을 지나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단절되고, 남자친구와 페이스톡을 하다가 아무도 모르게 툭 끊어져버리고, 전화를 하려면 카페에서 나와 도로 한가운데서 전파가 터지는 곳을 찾아다니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곳에서 적지 않은 불편과 살아가지만 그래서 더 간절해지기도 한다. 간편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절감하는 중이다.
완전히 돌아오기 위해서는 떠나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분리되고 싶었던 집과 가족으로 완전히 돌아가기 위해 떠나왔는지도 모른다.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가족으로부터, 집으로부터, 나의 동네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곳에 나를 던져 넣는 모험만이, 나를 완전히 집으로 돌아가게 할 것 같다.
아시시에서는 더없이 즐거운 아침을 경험했다. 밍기적대다가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짐을 싸고, 이탈리아어만 할 줄 아는 집주인 할머니에게 파파고를 보여주면서 짐을 잠시 맡겨두고, 어제 들렀던 좋은 카페에 다시 가서 빵과 커피를 잔뜩 먹고 온 아침. 혹은 점심. 그 카페에는 아주 스윗한 바리스타가 있었는데, 우리를 다시 만나자 에브리띵이 굳이냐고 물었다.
그곳에서 파는 크루아상은 결이 살아있었다. 구글맵에도 뜨지 않는 카페였으나 숙소와 가깝고 아시시가 너무 작아서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그 바리스타는 오늘 우리에게 떠나냐고 물었다. 우리는 크로아티아로 간다며, 이것이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빵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도 가봤다면서, 야간 페리를 탔었다고 한다. 헙, 우리도 그거 타는데.
무사히 페리를 타서 무사히 밤을 보내는 게 오늘의 계획이었다. 같은 일을 이미 경험해 본 누군가가 주변에 있었다. 그에게 페리 체크인하는 방법을 묻고 열심히 빵과 커피를 먹었다. 언제 다시 먹게 될지 모를 이탈리아의 빵이었다. 그가 알려준 정보도 스윗하고 고마웠지만 무엇보다도 이 빵이 너무 고마웠다. 맛있게 배를 채우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풍요로운 일인지 모른다.
우리는 오늘 대장정을 떠난다. 아시시에서 앙코나 항구로 가기 위해 기차를 한번 환승해야 하고, 그곳에서 페리를 타고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는 계획이다. 무시무시해 보였으나 막상 닥치고 보면 하나씩 해낼 수 있을 일이었다. 정보가 많이 없는 모험이라 조금 막막해졌지만, 나의 친구는 이런 일에 쉽게 겁을 먹지 않는 편이었다. 쫄보인 나와 다르다는 게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생활 습관도, 보는 영화나 드라마도, 생각하는 방식도 모두 다르지만 이 3개월짜리 여행에 돈과 시간과 삶을 던졌다는 점은 같다. 이런 모험에 기꺼이 투자할 수 있다는 공통점.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3개월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될지 모를 나의 인생 중 3개월은 아주 작은 부분. 무거운 일도 가볍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앙코나 한복판에서 페리 선착장을 찾아가기까지, 두려움 없이 서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내가 이런 여행과 모험을 이어갈 수 있는 건 수많은 이들의 도움이 겹겹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의 과감한 응원과 지지, 아빠의 걱정, 동생의 무관심, 할머니의 노파심, 친구들의 사랑까지도. 모든 게 나를 이곳에 제대로 살아있게 한다. 그것들이 있다면 나는 어디서든 숨을 붙이고 살아있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누군가에 대한 사랑력이 에너지가 돼서 나를 자주 붙잡아주었다. 단순히 사랑받고 있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될 때가 많았다.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고, 나의 안전을 염려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모험을 하면서도 나 역시 한국에 있는 누군가가 안전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것.
이 앙코나가 고향인 사람은 어떨까. 항구도시다운 황량함과 선선함이 가득한 이곳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한다면. 또는 떠나온 누군가를 보게 된다면. 기차가 바다의 바로 옆을 지나는 이곳엔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도, 떠나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이곳을 여행지로 잡지 않고 지나가기만 하는데.
페리 안에서 먹을 저녁으로 케밥을 사기로 했다. 어딜 가든 케밥이 있으면 저렴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케밥 털보인 줄 알았던 케밥 털코라는 이름의 가게를 찾았다.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있어서인지 조금 친밀감이 든다. 똥머리를 하고 두꺼운 안경을 쓴 아시아인 여자애가 이것저것 사가는 걸 보며 저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터키가 우리와 형제의 나라라는 걸 쟤들은 알까.
크로아티아에서는 한 달을 통으로 쉬어갈 예정이다. 배를 타고 가기로 한 건 모험 중에서도 꽤나 모험이었는데, 정보가 많이 없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앙코나에서 크로아티아 스플리트로 가는 사람들도 많이 없을뿐더러, 페리를 타는 사람은 더 없다. 그렇지만 야간 배를 타보고 싶다는 이유, 더 넓고 쾌적하고 새로운 경험이라는 이유로 이 방법을 선택했다. 배가 조금씩 흔들리긴 하지만 다리를 쭉 펴거나 소파에 누워서 갈 수 있다. 그리고 뷰가 끝내준다.
한 숙소가 끝날 때마다 후기를 남기라는 연락이 온다. 주로 에어비앤비나 부킹닷컴에서 예약했기 때문에 해당 플랫폼에 후기를 정성껏 남긴다. 먼 길을 떠나올 수많은 여행자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세상에는 수많은 글들이 있지만 후기만큼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글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누군가의 소비에 한 손을 보태는 마음으로 디테일을 더해서 쓴다.
챙겨 온 멀미약 중 하나를 원샷했다. 4시간 간격으로 먹는 게 좋다고 쓰여있는데, 과연 4시간 뒤에 내 속이 어떨지 모르겠어서 조금 두려워진다. 제발 아무 요동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혹시 모르니 글은 미리 써두기로 한다. 멀미라는 건 선을 넘어서는 순간 잘 가라앉지 않는 법이니까. 내일 아침, 이 페리에서 내리는 순간을 상상한다. 너무 많이 상상하면 당장 내리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살짝만 하기로 한다.
마르코 폴로라는 이름의 배를 탔다. 미드 모던패밀리에서 마르코 폴로라는 게임을 하던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조금 장난스럽고 귀여운 이름인 것 같다. 드라마와 영화, 브이로그와 먹방을 다운 받아 왔다. 배에서 혹시나 와이파이가 터질까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망망대해에서 공유기만 가지고 있다고 와이파이가 터질 리 없지 않나. 가끔은 내 한계가 너무 명확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이 글을 마무리한 뒤에 드라마를 보기 시작할 것 같다. 총 16부작이니까 12시간 여정의 상당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한 달을 주기로 얼굴이 바뀐다는 컨셉의 드라마를 보면서 잠시 생각을 멈춰야겠다. 남의 이야기로 채우는 대신, 내 것은 한켠에 쌓아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방금 마신 카푸치노의 힘을 받을 시간이다.
2023.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