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1.
한 달간 지내던 크로아티아 집을 나왔다. 출가인가 가출인가. 이동할 때는 역시 짐을 줄이기 위해 가장 두꺼운 맨투맨을 입기로 한다. 4월 말에 기모 맨투맨을 입어도 괜찮을 만큼 유럽의 아침은 쌀쌀하다.
한 달 내내 우리의 안부를 묻고 필요한 걸 채워주겠다던 호스트는, 우리의 마지막 부탁으로 우리를 터미널까지 실어주었다. 처음 우리에게 주었던 것처럼 직접 구운 전통 쿠키와 초콜릿을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그가 한 달간 우리를 보살핀 만큼, 에어비앤비에 아주 길고 정성스러운 리뷰를 남길 예정이다.
그녀의 크로아티아식 영어에 점점 적응하고 있었다. 우리가 구사하는 한국식 영어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아직도 목에 턱턱 걸려 있다. 영어는 언제쯤 익숙해질까. 타국어로 하는 감탄사나 추임새가 어색하기만 하다. 모국어로는 얼마나 요란법석하고 다채로운 감탄사들을 할 수 있는지. 어색해하는 내가 또 어색해서, 상상 속만 해 본다.
아침에 체크아웃을 했지만 야간버스를 탈 것이기 때문에, 스플리트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한다. 선량하고 건실해 보이는 청년에게 돈을 내고 짐을 맡겨두었다. 수하물을 보관하는 일은 언제나 조금씩 긴장된다. 정말 없어져서는 안 될 물건들만 골라 몸에 지니고 다닌다. 짐이 없어지는 상상을 종종 하는데, 그래도 큰 탈 없이 여행이 지속될 거라는 결론에 이른다. 필수는 아니지만 들고 다니는 것들이 꽤 많다는 소리다.
오늘은 날씨가 구리고 가방이 무겁기 때문에 스플리트 몰에 다시 가기로 했다. 어차피 셔틀버스도 무료이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무료한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기 딱 좋은 곳이다. 아주 미국적인 이 상업 시설에서 적지 않은 소비를 한다. 대체로 자잘한 선물들인데, 그런 걸 사둘 수록 남은 여행이 번거롭지만 풍요로워진다. 한국에 돌아가면 만날 수많은 얼굴들이 남은 여행에 함께하는 느낌이다.
쉬는 날을 쉬지 못하고 바쁘게 보내야 했던 남자친구와 이틀 만에 전화를 했다. 기가 막히게 내가 섬을 놀러 가는 날에 그가 집에서 쉬었고, 내가 집에 붙어있으니 그가 출근해야 했다. 그러나 불연속적인 전화가 분명 우리를 더 애틋하게 했다. 이틀 만에 전파가 닿은 그는 더 애교스럽고 안타까웠고 쉼이 필요해 보였다. 그저 그가 집에서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랐다.
익숙한 것들이 잠시 멀어지는 찰나에 우리는 진짜 마음을 간파당한다. 얼마나 소중한 무엇인지를 실감한다. 한 달이나 지낸다는 이유로 익숙해졌던 스플리트도, 매일 전화할 수 있었던 오빠와의 시간도, 거의 내 집 같았던 숙소도. 그런 것들은 꼭 마지막 순간에 환기되기 마련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조금씩 무뎌진다. 늘 낯선 감각을 유지한다는 건 있을 수도 없고 매우 피곤한 일이지만, 한 발 떨어져 보는 건 꼭 필요한 일 같다.
2.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도착했다. 짐을 맡기고 맥모닝을 먹는 주일 아침이다. 맥도날드에서 유튜브로 사랑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한인교회가 잘 없는 이 동유럽에서 온라인 설교는 참으로 편리하고 거룩한 기능이다. 어디든 예배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걸 일주일에 한 번씩 기억한다. 평소 좋아하던 목사님의 설교를 찾아 들어보기로 한다. 제목은 <사랑받고 싶다>. 가장 위에 있었고 끌렸다. 역시 사랑받고 싶은가.
그는 우리가 얼마나 사랑에 미숙한지에 대해 먼저 말했다. 어릴 적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얼마나 바보 같은 짓들을 했는지. 그건 사랑이 아닌 그저 무지였다고. 사랑받고 싶어서 저지르는 무수한 일들은 그저 열매일 뿐이라고. 그 뿌리는 하나로 귀결된다고 했다. 바로 인간이 유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중심을 간파하는 그가 거룩한 천재 같았다.
오늘의 말씀에 따르면… 사랑은 대상과 방법이 제대로 존재해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어긋나는 순간 그건 사랑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애정을 갈구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자주 결핍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유한한 데다가 죄를 짓고 살기 때문이다. 온전한 것을 찾기보다는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고 자극적인 가짜를 찾는다. 청국장 정식을 앞에 두고 삼각김밥을 찾듯… 평범해 보이는 진짜 앞에서 등을 돌린다.
엔학고래,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삼손이라는 인간이 목마르다고 부르짖을 때 땅을 갈라 물을 솟아내셨다.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그 물은 마신 삼손은 깨달았어야 한다. 앞으로도 나의 목마름을 채워주실 분은 하나님일 것이라고. 공허한 영혼을 채우시는 분은 유일하다는 사실을. 그러나 삼손은 물을 마시고 바로 여자를 만나러 갔다. 연약한 영혼에 걸맞은 자극적인 결말이었다.
우리는 자기 PR 시대를 산다. 끊임없이 명분을 찾아내고 자기를 드러내고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자본주의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시 반대로 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랑하니까 힘을 빼라고, 숭고한 사랑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라고 하신다. 사랑은 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딱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사랑하시기 위해, 그리고 사랑받으시기 위해 낮은 곳으로 오셨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모든 힘을 빼고 죽음으로 완전히 우리에게 져주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그것은 승리였다. 우리가 아닌 세상에 대한 승리. 그가 태양이 아닌 촛불이 되신 것이라고,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가끔 이런 말씀 하나에 나의 작은 세계가 완전히 흔들린다. 이전과 같이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다들 자기의 빈틈을 숨기려고,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산다. 자기가 얼마나 온전한 지를 견주는 세상에 산다. 자기애와 이기심이 혼동되는 세계를 산다. 그게 얼마나 악순환적인지, 얼마나 왜곡된 방식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본다. 욕망의 대상을 향해 어떤 표정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죄를 향해 얼마나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고 있는가.
끝없는 왜곡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싶다. 나를 목마르게 하지 않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을 향해 사랑을 갈구하는 게 맞으니까. 그 사랑을 받으면 다시는 사랑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사랑이라는 답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사랑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무해한 것인지, 미련하지 않은지 알게 될 것이다.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삶, 그래서 넉넉히 살아내는 삶. 그에게 나의 무수한 빈틈을 잔뜩 열어두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오늘 또 하나의 비전을 주신다.
라이트하우스 서울숲, 임형규 목사님 설교(https://youtu.be/Ejox_asSvl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