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1
마치 밀항을 하는 사람들처럼 배에 대충 누워서 12시간을 보내고 나오는 길이다. 사람이 많지 않아 낑겨있지는 않았다. 타이타닉 호같은 큰 배를 처음 타봐서 몰랐는데, 뱃속은 아주 춥다. 우리는 식당가에 대충 누워서 잤기 때문에 더 추웠는지도 모른다. 4월의 크로아티아, 배에서 내리자마자 무지막지한 칼바람이 분다. 한달치 숙소를 예약해둔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데리러 나왔다고 했는데, 배에서 내려 그에게 가기까지 약 5분의 시간 동안 이번 여행 최고의 추위를 맛봤다. 바람이 캐리어를 밀어주었으므로.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보통 자기 사진을 프로필로 설정해두는데, 주홍빛 단발머리의 선글라스를 낀 그녀의 프로필만 보다가 실제 모습을 보니 완전 푸근한 언니 같았다.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사는 동년배 언니일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근처에서 일하는 마케팅 부서의 헤드라고 한다.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였다. 애기 엄마들이 주는 포근함을 너무 좋아한다. 누군가를 품에 자주 안아 그런지 나도 한번 안겨봐도 될 것 같은 느낌.
그는 크로아티아의 전통 디저트까지 구워서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한 6개월 전부터 예약해둔 숙소였고, 하도 사진을 많이 들여다봐서 지금도 상상 속에 들어와있는 것 같다. 사진처럼 아늑한 3층짜리 복층집이다. 처음 들어오자마자 운동화를 신고 이곳을 활보했기 때문에 우리의 패턴을 찾기 위해서는 청소를 한번 해야했다. 함께 살기로 한 현아가 3층에서부터 청소기를 돌리며 내려왔고, 나는 잠자코 있다가 1층 거실을 청소했다. 이제부터 슬리퍼 생활을 시작해볼까.
이미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2주 정도 여행하고 왔기 때문에 이곳에 한달 정착하는 게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항상 일정을 채워놓고 만 보를 넘게 걸어다녔는데, 이제 여행 일정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싼 돈과 시간을 주고 아주 먼 곳에 휴양하러 온 셈이다. 인생의 큰 변화를 앞둔 두 사람이, 우리 것이 아닌 세계를 한번 돌아보는 여행이다. 나는 자취도 처음이고 동거도 처음이라 모든 것이 생경하다. 그러나 현아는 이미 자취를 수년간 해보았기 때문에 꽤나 익숙해보인다.
1층은 거실과 부엌, 2층은 메인 화장실과 방, 3층은 간이 화장실과 방이 있다. 우리는 4주 정도 사는 동안 2주씩 번갈아 지내보기로 했다. 중간에 방을 한번 바꾸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다. 본가에서는 동생이랑 방을 바꿔보고 싶었는데 대이동을 해야하기 때문에 한번도 시도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것들이 허용될 예정이다. 크로아티아 첫날은 정말 무용하게 보냈다. 12시간 동안 배를 타고 와서 그런지 다른 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먹기는 해야 하니까 마트는 가보기로 한다.
마트를 가기 위해 집밖으로 나가자, 열 발자국만에 바다가 보인다. 오션뷰 숙소는 아니지만 걸어서 1분이면 바다에 닿는다는 건, 내륙걸로서 아주 신명나는 일이다. 이래서 크로아티아를 한달 짜리 숙소로 고른 것도 있다. 바다와 아주 가까운 곳에 살아보고 싶어서, 모아나처럼. 대차게 히피펌도 하고 왔다. 시내는 아니지만 크고 작은 마트들이 꽤 많은 곳이다. 가장 큰 마트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생활 양식들을 주섬주섬 모아왔다. 무지하게 큰 대파도 보고, 먹어본 적 없는 잼과 버터, 아주 저렴한 고기도 양껏 골라왔다.
앞으로는 삼시세끼를 거의 차려먹을 텐데, 누군가와 삼시세끼를 다 공유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설레기도 한다. 앞으로 우리만의 루틴을 만들어갈 테니까. 보통 나는 차려주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서로 차림 받는 사람이 됐다. 아무리 봐도 음식을 공유한다는 건 정말 다정한 일이다. 서로의 식성과 취향과 패턴을 자주 알아보게 될 것 같다.
파스타와 피자, 샌드위치와 빵을 돌려가며 먹던 우리는 처음으로 쌀을 지어 밥을 해본다. 냄비밥은 처음인데, 현아가 아주 기깔나게 완성을 해버렸다. 많은 걸 쉽게 해내는 녀석이다. 나는 그가 손질해둔 야채를 고기와 함께 볶기만 하면 된다. 인덕션 같이 생긴 하이라이트라서 팬을 달구는 데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에 있던 가스불의 화력이 조금 그리워졌다. 이곳에서는 아주 천천히 무언가를 무르익게 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 같다.
이번주는 아주 추울 예정이라고 한다. 이번주 주일이 이스터 데이라서 그렇다고 들었다. 부활절을 앞둔 일주일을 고난 주간이라고 부르는데, 그래서인지 날씨도 아주 칼바람이 분다. 바닷가라서 더 심한 바람을 맞는다. 날씨도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인가. 이번주는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날선 바람이 부는 동안 나 역시 예수님을 자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일도 하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법. 이 집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달리 하고 싶은 건 없다.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는 첫날이다. 제대로 휴식에 돌입하고 나니 조금은 멍해지는 기분이다. 생각을 쉬고 싶은데 너무 놔버리고 싶지는 않아서, 일단 첫날은 흘려보내기로 한다. 자주 보던 유튜브와 드라마를 보면서 첫날을 보낸다. 분명 한국에 돌아가면 이 시간이 무참히도 그리워질 것이다.
그 예정된 그리움을 무색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오랜만에 개운한 샤워를 하고, 맛있는 빵과 요거트와 커피를 먹고, 고요의 즐거움 속에서 글을 쓰는 지금. 그냥 이런 순간들이 자주 반복되기만 하면 좋겠다. 혼자여도 충분한 날, 둘이라서 더 좋은 날, 그래서 글을 쓰고 싶은 날. 전파가 잘 안 터지는 바람에 브런치를 편하게 올릴 수는 없지만, 그래서 새로운 카페를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뜻밖의 즐거움들이 가득한 한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의 예정된 그리움을 자주 기억하면서.
2023.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