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베니아

류블랴나 2

by 최열음

류블랴나에 있는 동안은 계속 비가 왔다. 우산을 꺼낼지 말지 고민하게 하는 부슬비였다. 그래도 비 오는 류블랴나는 생각보다 더 아름다웠다. 구경할 곳이 많지 않아서인지 부담이 적은 도시였다. 도착한 첫날에 분주히 돌아다녔기 때문에 남은 날들은 비교적 여유롭게 다녔다.

류블랴나에서 1시간 거리에 블레드라는 곳이 있다. 호수가 유명한 곳인데 거기서는 알프스의 자락이 보인다고 했다. 내가 살면서 알프스를 볼 일이 있다니. 머지않아 스위스의 알프스를 오를 예정이지만, 슬로베니아에서 알프스를 훔쳐보는 게 더 감격스럽게 느껴졌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왠지 진귀한 경험을 하는 것 같았다.


블레드로 가는 동안 한국에 있는 누군가를 오해할 뻔했다. 아직 얼굴도 본 적 없는 누군가에 대한 말을 전해 듣고 잠깐 상심할 뻔했기 때문이다. 여러 입에 걸쳐 전해지는 말들은 덜 고상해지고 덜 조심스러워진다. 꼭 필요한 수식어들이 떨어져 나가서 앙상한 날 것만 남는다. 섣불리 오해하지 않기 위해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사용했다. 오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데, 오해하는 것보다 더 많은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내게는 성급한 판단과 섣부른 오해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 있으니 괜찮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국의 여돌 노래 모음을 들었다. 유튜브로 저장해 둔 플레이리스트가 참 유용하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8년 전쯤 열풍이었던 노래를 들으면서 잠시 시간을 옮겨갔다. 이 노래를 들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곤 했다. 좋은 기억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삶이 윤택해지는 게 신기할 뿐이다.

내가 저장해 둔 것들은 대체로 현실을 낙관하고 긍정하는 밑도 끝도 없는 노래들이다. Don’t you worry about a thing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걱정을 줄여보고 용기를 받고 흥을 깨운다. 그러고 나면 조금은 못할 게 없어지는 느낌이다. 혼자 노래를 듣는 동안 조용히 회복되는 것들이 있다. 노래가 조용하지 않아서 마음이 조용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류블랴나에 온 뒤로 매일 커피를 사 먹었다. 테이크아웃을 해서라도 먹었다. 왠지 이곳에는 커피 트럭도 있고 스페셜티 커피를 많이 파는 게 정성스럽게 느껴졌다. 도시 전체가 커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것 같았달까. 유럽에서 먹는 보드라운 라떼들이 내게도 소중해졌다. 뜨신 커피의 맛을 알아가는 중이다. 이곳 바리스타들은 다 라떼아트를 할 줄 아는 게 신기했다. 나는 카페 알바를 그렇게 해도 라떼아트는 제대로 배워볼 생각도 없었는데. 이들처럼 제대로 된 카푸치노를 만들고 싶어졌다.

바리스타 언니가 실패했다고 미안하다는 라떼아트

블레드를 가는 동안 알프스의 꼭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살짝 뒤덮인 모습이 보였다. 열심히 사진과 영상을 찍는 나를 보았는지, 뒷자리 아저씨가 갑자기 자기 사진을 찍어달라며 핸드폰을 건넸다. 알프스와 같이 찍은 것도 아니고 그냥 버스 안에 있는 모습을 찍어드리면서 이게 맞나 싶었다. 그치만 버스에서 내릴 때 너무나 흡족한 얼굴로 고마워하시기에 만족했다. 내 어깨와 손을 살짝 잡으셨는데 아무래도 실수는 아닌 것 같았다. 만지지는 않고 그냥 웃기만 했으면 더 좋았을 거였다.


블레드는 조금 춥고 많이 흐렸다. 보트를 타고 어떤 성당에 들어갔다가 우산을 쓰고 나왔다. 알쏭달쏭한 날씨였지만 현아가 챙겨 온 우산 덕분에 조금도 젖지 않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크림으로 된 케이크도 먹었다. 빵은 없고 크림만 있는 케이크라 신박했고 느끼했다.


원래는 블레드에서 저녁을 사 먹고 올 계획이었으나 아무래도 그 돈이면 한식을 사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크로아티아에는 한식집이 한 개도 없었다. 그런데 슬로베니아는 아시아 음식 천지였다. 아주 신이 나지만 모두 사 먹을 수는 없으니까 소중하게 끼니를 분배했다. 오늘은 얌얌이라는 귀여운 한식집에서 제육볶음과 비빔밥을 포장하기로 했다. 사람이 많아서 4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한국인 커플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아주 좁은 간이식당에서 딱 세 개의 화구로 여러 음식들을 만들어내고 계셨다. 우리를 보면서 코리안인지 영어로 물어보셨다. 한국어로 맞다고 하자 적당히 반가워하셨지만 너무 바쁜 관계로 바로 요리에 몰입하셨다. 한국인보다 외국인 손님이 더 많은 가게였다. 애국심이 차올랐다. 꽤 추운 밤이었지만 열심히 기다렸다.


주인분께 구글 리뷰가 아주 좋다고, 많은 이들의 추천이 있었다고 말씀드리자 부끄럽게 웃으셨다. 우리가 거의 마지막 손님 같았는데 아무래도 진이 빠지신 것 같았다. 그분들은 퇴근 후에 무엇을 드실지 궁금했다. 아마도 우리가 먹은 한식은 아닐 것 같았다. 불맛 나는 제육볶음과 각종 나물이 무쳐진 비빔밥을 먹는 동안 잠시 류블랴나에서 분리되었다. 그것이 음식과 음악의 힘이었다.


류블랴나에서는 딱 적당히만 설렜다. 지나치게 설렜다가 실망하지도 않았고, 전혀 안 설레지도 않았다. 그냥 여러모로 적당한 여행지였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크로아티아에서의 한 달을 보내고 처음으로 떠나온 여행이었다. 나의 속도와 체력에 걸맞은 도시를 만난 것 같아서 역시 적당히 좋았다. 관광객이 많은데도 조용하고 느리고 평화롭게 흘러가는 도시였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서 양껏 게을러질 수 있었다.

내일이면 짐을 빼고 야간버스로 부다페스트에 갈 예정이다. 여행을 자주 시작하기 만큼 자주 끝내기도 한다. 짧은 여행이라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도 든다. 언젠가 내가 돌아갈 도시가 정해져 있기 때문일까. 만약 그 사람들을 다 데리고 새로운 도시에 산다면 그곳이 나의 집이 될 수 있을까. 공간이 집인지 사람이 집인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사는 내내 둘 다 필요한 것 같다. 가끔은 집이라는 공간이 더 필요하고, 가끔은 사람 하나만 있으면 괜찮을 것도 같다. 어느 쪽이든 쉴 곳이 되어준다는 게 참 감사하다. 이제 가장 나의 집에 가까운 사람과 통화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