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보드게임 카페에서 종일권을 끊고 놀았다. 보드게임도 오랜만이었지만 무언가에 종일권씩이나 내고 놀아본 것도 오랜만인 느낌이었다. 카페에 가더라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거나, 커피를 포장해오기 위함이었으므로. 본격적으로 놀고자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개운했다.
저항없이 그냥 웃긴 동기들을 만나 아주 꼬숩고 맛있는 라떼를 한잔 먹고, 뜨끈한 칼국수까지 먹었다. 모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라 이미 많은 게 채워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짜가 남아있었다. 이번에 모이면 꼭 보드게임을 하리라고 결의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 가기 전에 얘네와 폭풍 같은 게임을 했던 게 마지막 기억이다.
게임 속에서 우리는 세계를 돌고, 마음을 합했으며, 빠르게 쌓아올리는 연습을 했다. 글로 적고 보니 너무 메타포 같지만, 그저 부루마불(세계 일주)과 더 마인드(단체전 카드게임), 할리갈리(컵 버전)를 했을 뿐이다. 그걸 하는 내내 우리는 열광하고 분노하다가 안타까워하고, 또 얄미워했다. 아주 많은 감정과 시선이 빠른 호흡으로 이어지는 시간이었다.
간간이 쉬어가는 중에는 더 많은 수다를 떨었다. 가만히 앉아 입만 놀리는 데도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흐를 수 있나. 아마 게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썼을 거였다. 그래서 좋았다. 말을 하면서 비워지기도 하지만, 채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공과 사를 오가는 대화 속에서 나는 꽤 편안했던 것 같다. 애들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하기도 했고.
항상 넉넉한 이야기보따리를 준비해오는 서로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나 가끔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왔다는 자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구를 만나느냐와 상관 없이, 그냥 아주 쏟아내고 왔다는 생각이 들 때 말이다. 그럴 때면 오늘에 대해 쓸 글이 없어진다. 말로 이미 다 해버렸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길게 보면 아주 다른 속성을 지녔지만 짧게 보면 이야기라는 본질은 같으므로… 어째서인지 글을 많이 쓰고 나면 채워지는 느낌인데, 말을 많이 하고 나면 깎이는 것도 같다. 더는 하고 싶은 말이 없어지고 나면 꽤나 허탈한 기분이 든다. 쓸 말을 남겨두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이런 근시안적인 인간…
그래도 동기들과의 시간은 여전히 특별하다. 오가는 이야기가 모두 서로의 상태와 마음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보드게임 방마다 천장이 연결되어있어서 아마 옆방 사람들도 모두 들었을 것이다. 실명은 최대한 가리려고 노력했는데, 효과가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오늘의 글에는 무슨 사진을 첨부할지 확실히 안다. 이런 날이 많지는 않다. 보통은 글을 다 쓰고 올리기 직전에 앨범에서 괜찮은 시각 자료를 물색한다. 글과 하나로 이어지는 느낌의 사진을 찾는다.
이 글과 어울리는 건, 애들을 만나자마자 먹은 라떼 사진이다. 비가 오는 아침(혹은 점심)이었고, 커피가 아주 맛있는 집이었다. 날이 선선해지기 시작한 참이라 따뜻한 커피를 먹을 수 있게 됐다. 딱 원하던 정도의 라떼였다. 적당히 진하고 부드럽고 고운 녀석… 유럽에서 마셨던 플랫화이트와 아주 흡사한 맛이었다. 이 애들을 만나면 딱 이런 사진의 마음을 갖게 된다. 차분하고 단단하면서, 꽉 찬 느낌.
오늘로 일주일 간의 ‘특별’ 새벽기도를 마쳤다. 함께 참석했던 사람들과 함께 맥모닝을 먹고 온 참이다. 새벽 댓바람부터 청년 열명이 함께 모여 맥모닝을 먹을 수 있는 일이라니. 먹는 순간에는 그냥 졸린 마음이었지만 생각할수록 기쁘다. 모두가 비슷한 마음으로 일찍 잠들고(혹은 그냥 적게 자기로 했거나),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렸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6일을 내리 오며가며 마주치거나, 뒤통수라도 지켜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사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는 건 굉장히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초저녁부터 그냥 졸렸고, 이후로는 아침엔 괜찮다가 오후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일정이 많은 날이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만큼 몽롱했다. 엊그제 파주를 다녀오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루에 쓸 수 있는 힘의 총량을 넘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다음날 새벽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함께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토요일 아침에도 늦잠을 포기하고 교회에 나오기를 선택한 사람들, 당장의 안식보다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는 사람들, 비워내고 또 채워내기를 반복하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게 무척 기쁘다.
그래서인지 이번주는 몹시 피곤했으나 동시에 아주 평안했다. 크고 작은 불안들이 많이 소멸된 느낌이었다. 성전에서의 성취 덕분인 것 같다. 이번주는 약속도 많고 일도 많아서 쏟아낸 말도 꽤 많았는데,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나를 근시안적인 인간으로 만들었을지 몰라도, 새벽만큼은 그렇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자주 짧았다 길어졌다 하면서 현재에 눈이 맞춰졌는지도 모른다. 나를 진짜 평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