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제주도에서 가장 허름한 외관을 지닌 듯한 숙소에 도착했다. 게스트하우스의 독채를 저렴하게 쓸 수 있다고 해서 빌린 곳이었다. 제주도에 도착하고도 반신반의하면서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쁠 거라고 생각했다. 진짜 좋은지 아닌지는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봐야 확인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이 말은 현실이 되었다.
어느 한쪽만으로 설명하기는 애매한 숙소이다. 처음에는 체크인하는 방법도 모르겠고, 수건도 없는 데다가 화장실도 딱히 깨끗해보이지 않아서 아주 나쁜 줄만 알았다. 실제로 나쁜 구석은 많았다. 에어컨은 방에만 있고 침대는 용수철이 모두 느껴지며, 베란다 문은 열리지 않고 선풍기는 강약 조절이 되지 않는다. 많은 품이 드는 숙소이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정이 가는 건 사실이다.
외관은 낡았고 내부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가. 이틀을 지내고 보니, 집을 위한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럽의 평균 위생과 맞먹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슷한 곳은 포르투. 모기가 들어와서 창문은 열 수 없었지만 삐그덕거리는 문이나 사람 사는 냄새, 허술한 호스트도 비슷하다.
사실 오빠와 나는 처음부터 넓고 허름한 이 숙소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여긴 손님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다.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게 아니라 함께 이 집을 꾸려가는 역할... 별로 억울하지는 않다. 늦게 예약하기도 했고, 그만큼 저렴하기도 했으니까. 비록 이 집에서 씻고 싶지는 않지만 바다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싶기는 하다. 그거면 된 것도 같다. 최고의 찬사일지도 모른다.
제주도에 와서 꼭 하려고 한 것은 예약한 서핑, 개쩌는 맛집, 괜찮은 카페 정도다. 오늘은 우선 서핑을 마쳤다. 오전 11시에 약 10명 정도가 모여 온몸에 알이 배길 만큼 파도를 타며 놀았다. 적지 않은 돈을 주고 고생한 느낌도 있었다. 아무래도 서핑을 하는 순간보다 모래로 뒤덮인 것들을 처리하는 일이나, 무거운 보드를 끌고 가는 것들이 수고로웠다. 물에 떠있는 때만큼은 그런 것들이 모두 씻겨내려갔다.
서핑을 하며 가장 중요한 건 중심을 잡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요즘 집에서 요가를 조금 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모든 자세들이 서핑에 필요한 몸짓들이었다. 보드 위에서 업독으로 일어나 오른발을 잽싸게 당기고, 일어나서 워리어 자세를 하면 됐다. 오빠랑 스노우보드를 탈 때 꽤나 고생한 기억이 있어서 걱정했는데, 내가 오빠보다 먼저 중심을 잡았다.
사실 먼저보다 중요한 건 지속하는 것이다. 나는 강사님이 보드를 밀어줄 때만큼은 기가 막히게 일어나서 중심을 잡았으나, 자유 시간에는 물을 밀고 나가는 것부터 막혔다. 괜찮은 파도란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강사님이 밀어주면서 일어나라고 할 때 일어나면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좋은 파도를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빠는 스노우 보드를 독학할 때도 그랬듯 기세로 일어났다. 역시 모든 일은 기세였던 것이다. 그가 파도에 정정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동안 나는 그저 기다렸다.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보드에 올라탔다가 앞으로 밀려나가기라도 하면, 다시 돌아오는 게 아주 귀찮기 때문이다. 어설픈 자유 시간을 얻은 초짜들이 고전하는 동안, 우리 주변엔 진짜 자유를 누리는 서퍼 한 분이 계셨다.
그는 파란 보드를 가지고 아주 빠르게 패들링을 했다. 정말이지 물에 섞이는 폼이 기가 막혔다. 좋은 파도가 어떤 놈인지를 아는 자의 기세였다. 우리는 몇번이고 그의 탄탄한 실력에 환호하다가 말을 걸기에 이르렀다. 그가 해준 명언엔 서핑은 기다림이다, 골이 깊은 파도를 타야 한다, 자신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잘 타게 된 사람일 뿐이다, 등등이 있다. 그 세월이란 게 얼마나 오래일지 몰라도 고작 1일차인 나에게 아주 먼 미래의 일이란 건 분명했다.
파도 앞에서 망설이는 내게 그는 말했다. 우선 타봐야 알지, 부딪혀봐야지. 기다린다고 해서 완전한 파도를 만날 리도, 그리고 그 파도를 내가 끝장나게 탈 가능성도 적었다. 그럼에도 나는 더 좋은 것을 기다린다는 마음으로 쉬고 있었던 것이다. 쓰는 마음도 그랬다. 작법서를 더 읽어보고, 좋은 영감이 오면, 내가 더 깊은 사람이 되면 소설을 쓸 수 있겠지. 우선 소설을 쓰는 사람이 돼야 좋은 것도 나온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였다.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꽤 행동파인 내가, 글을 쓰는 데는 유난히 자주 망설이는 것 같다. 정말 잘하고 싶기 때문일까. 요상한 완벽주의가 쓰는 데만 특화되어 있는 걸까. 제주도에서 에세이를 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 탄탄하고 연륜 있는 서퍼 덕분일지도 모른다. 나도 딱 그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많이 써야겠지, 제주도에서도 쓰고 비행기에서도 쓰고 파주에서도 쓰는 마음으로 청주에서도 쓰는 것이다.
타자를 치는데 한번도 아픈 적 없던 팔이 뻐근하다. 아마 내일이면 팔을 들기도 어려워질 것 같다. 보드에 올라타려고 퍽퍽 들어올리던 오른쪽 엉덩이와 허벅지도 비슷할 거라는 확신이 든다. 아주 많은 근육을 물에 떠 있기 위해 썼다. 괜찮은 파도에도, 미적지근한 파도에도 같은 근육을 여러번 써야 했다. 어떤 게 괜찮은 놈일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게 될 것이다. 그 때까지는 그저 같은 근육을 몇 번이고 쓰는 방법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