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직의 스물 다섯
- 올해는 어떤 해였던 것 같은지, 한 마디로.
저를 가득 담은 해?
- 가득 담았다는 게 스스로를 찾아간다는 뜻인가요?
찾아간다기에는 이미 알고 있어서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한 해를 비운 거였고, 그래서 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 채웠다는 뜻이에요. 순수하게 저만의 결정으로 이뤄가는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내년 여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하루에 12시간씩 공부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대로 흘러간다면 임용을 하게 될 테니까요. 그 정도 공부량이 돼야 하거든요.
- 그런 미래를 생각하면 어떤가요.
아득한데… 그마저도 즐기면서 할 수 있기를 바라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 안 될 것 같거든요. 제발… 즐길 수 있기를. 그래야 효율이 최대로 날 거거든요. 억지로는 정말 못할 것 같아요. 어떻게든 즐길 계획입니다. 재수 때도 그랬고…
- 어떻게 즐길 수 있을까요? 절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써야 하잖아요.
아무래도 공부하는 과목들이 재밌어야 할 것 같아요. 수학은 평소에도 좋아하는 편이고…
- 어떤 과목이 있나요?
일반 교육학 9과목, 전공 12과목 정도... 정말 방대해요.
- 12시간 할 수밖에 없겠네요… 요즘의 기쁨과 슬픔은 무엇이 있나요.
제가 제일 어려워하는 부분이네요… 기쁨과 슬픔이라면, 딱히 느끼지 않는 것 같아요. 지금 삶이 즐거워서 특별한 기쁨도 없는 것 같고, 슬픔도 그렇네요. 과거를 돌아볼 때 가끔 슬퍼지긴 하는데, 그것도 크지 않고요. 특히 즐거울 때가 있다면 온전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과 있을 때? 낯을 가리지 않고 온전한 저로 존재할 수 있는 때요.
- 오늘 집에 가서는 무엇을 하실지.
저녁 먹고 주짓수를 갈 텐데요. 곧 주짓수에서 승급 심사가 있거든요. 그래서 두 타임을 뛰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집 들어오면 열 시 반?… 그러고 나면 대외활동 작업을 좀 할 것 같아요. 밤 시간을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아마 장소는 침대 위 앉은뱅이책상?
- 책상이 따로 없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따로 사실 계획은 없나요?
없는 것 같아요. 자리야 만들 수 있지만 오히려 도서관이나 카페를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작업하는 곳과 쉬는 곳이 분리되는 게 좋은 것 같아서요. 집에서 못할 걸 너무 잘 알거든요. 그리고 집에 책상을 둘 경우, 높은 확률로 엄마의 방해를 받을 텐데요. 저희 엄마는 수능 전날에도 같이 티비를 보자고 하시는 분이거든요. (웃음) 그래서 엄마를 분리할 필요도 있고요.
- (웃음) 아~
지진으로 저희 수능이 연기된 해에도, 제가 가장 먼저 뉴스를 보고 친구들에게 전달해 줬거든요.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특보로 ’수능 연기‘라고 뜬 걸 봤어요. 집은 여러모로 (공부하기) 위험한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 본인의 속도는 시속 몇 km인 것 같나요? 요즘 운전 시작하셨잖아요. (부러움)
아~ 이거 초반에 인터뷰한 분들 보니까 다들 천천히 가는 걸로 하셨던데요.
- 맞아요. 근데 최근에 90km도 한 명 나왔어요. (웃음)
저는 한 70km?…
- 평균 속도네요.
대학생 때도 그랬고, 현재도 나름 바쁜 삶을 살고 있는데요. 그런 삶을 추구하거든요. 그런데도 100km 정도가 아닌 이유는… 남들에게 증명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아서 백수라고 해버리니까요.
- 그러다 보면 되게 납작해지잖아요.
백수니까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냥 사람들한테도 놀고 있다고 해버려요.
- 그건 너무 말 안 해주는 거 아니에요? (웃음)
근데 실제로 놀고 있는 것도 맞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으니까요. 0km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사실은 아주 많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100km라고 치면, 이제 그 사이 70km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만약 설명하기 쉬운 일이었다면 100km라고 했을 텐데, 제가 느끼기에도 바쁘지만 즐겁게 하는 일 같아요.
- 현재 상황을 수영에 비유하자면.
수영… 제가 유일하게 안 좋아하는 운동인데요.
- 안 그래도 저도 최근에 물 공포증 생긴 것 같아요.
혹시 제가 일깨워준 건가요?
- 여름에 교회에서 계곡 갔을 때 느꼈어요… 물에서 숨이 안 쉬어지는 게 무섭더라구요.
워터파크 정도는 재밌고 좋은데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물에 들어가는 게 공포스러운 것 같아요. 아무튼 수영에 비유하자면… 잠영?
- (놀람) 물에 뛰어들자마자 하는 것 말씀이시죠.
맞아요. 잠영을 하는 게 유리하거든요. 적은 힘을 들이고 앞으로 많이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서요. 저도 남들이 보기에는 백수지만 물속에서는 즐겁게 움직이고 있잖아요. 임용과 관련한 일은 아니지만요…
- 그래도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 중인 건 맞죠.
그런 느낌? 물속에 있을 때는 누구도 보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물속에서는 제가 충분히 움직이고 있는 거죠.
- 되게 미꾸라지 같네요.
그렇게 받은 힘을 가지고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죠. 추진력을 얻은 상태니까요. 얻은 에너지를 표출해야죠. 그게 자유형이든, 접영이든.
- 좋다. 잠영은 제가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에요. 저는 개헤엄 같은 거 생각했는데.
전공자. (ㅎㅎ)
- 여러모로 감사해요, 아지님.
여러모로. 아지와 대화를 하면서 ‘여러모로’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여러모로 쉬는 중이며, 동시에 여러모로 바쁘고, 여러모로 즐겁다고 말했다. 어쩌면 ‘두루두루’와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다. 그가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는 동안 나는 그가 지나온 길을 생각해 본다. 침대 위에 앉은뱅이책상을 펼쳐놓고 앉는 아지를, 마라탕을 좋아하는 아지를, 수영을 제외한 모든 운동을 사랑하는 아지를.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주 새로운 생각을 전한다. 내가 보지 못한 측면에서, 보지 못한 사람을, 느끼지 못한 마음을 들고 나를 찾는다. 그럴 때면 나는 뻣뻣하게 고마워한다. 새로움이라는 감각 앞에 얼마나 무방비 상태인지를 자주 느낀다. 그런 아지의 눈을 빌려 바라보는 세상은 꽤 즐겁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즐겁게 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말해버리는 아지니까. 내가 털어내지 못하는 것들을 가볍게 털어내는 그의 손을 본다. 그의 손은 몹시 작지만 야무지다.
야무진 사람 곁에서는 조금씩 풀어지게 된다. 내가 엄살을 부리는 동안, 그는 나의 것들을 정리하며 지나간다. 열리지 않는 뚜껑을 척척 열어주거나, 고장 난 기구 같은 걸 슥슥 고쳐낸다. 잠영 중인 아지가 물 밖으로 나와 자유형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나는 조금 알 것 같고 많이 모르겠다. 그래서 기쁘다. 당장 1월 2일부터 그가 어떤 준비에 돌입하든, 아지를 가득 담은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여전히 책상은 없지만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그의 미래를, 오랫동안 지켜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