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그녀들은 무대에 서는 것이 행복해서, 불러주면 어디든 달려갔다. 교통비와 경비를 제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공연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019년 지방공연 당시 / 출처 : 브레이브걸스 인스타그램
복무 중인 청춘들이 있었다.
심장은 펄펄 끓는데 군대로 징집되어 외롭고 고된 나날들이었다. 늠름한 군인이어야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늘 이성의 따스한 눈길이 그리웠다. 늘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너무 멀어져 버려서일까. 찾아주는 이들은 줄어만 갔다.
어느날, 무명의 그녀들과 심장만은 펄펄 끓던 군인들이 위문공연에서 만났다.
어리고 핫한 소녀들이 아니었고, 먼지 날리는 조악한 무대였지만, 군인들은 그 멀고 험한 길을 달려와준 그녀들에 열광했고, 그녀들은 그 환호에 감사하며 진심을 다해 춤추고 노래했다.
외롭고 고단한 젊음들이 만난 접점에서는 그 모든 설움을 날려버릴 스파크가 일었다.
브레이브걸스 노래를 열광적으로 따라부르는 군 장병들 / 출처 : 유튜브 비디터VIDITOR 채널 <브레이브걸스 롤린 댓글모음>
군부대 공연을 마다 않는 걸그룹은 드물었고, 그녀들은 그렇게 군인들에게는 최고 인기가수가 되어갔지만, 사회로 돌아오면 철저히 무명이었다.
데뷔 6년차. 신곡을 내고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혼신을 다해 춤추고 노래했지만, 관심 가져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잘 하고 왔냐고 묻는 소속사 임원에게 우리는 뭘 해도 안 된다고 하소연 할만큼 대중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걸그룹으로 출발했지만, 다들 서른이 넘어가고 있었고, 그녀들은 이제 꿈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지난달 하순. 마침내 숙소에서 짐을 뺀 막내 유나는 친구처럼 지내온 몇 몇 팬들에게 유튜브에서 군통령인 그녀들이 대단한 화제를 모으고 있음을 듣는다. 군대에서 그녀들의 노래와 공연을 돌려보며 위안을 받았던 예비역들과 제한적으로 폰사용이 가능해진 현역을 중심으로 팬덤이 형성되는 듯 했다. 영상 속에서 챔스 결승골급 반응을 이끌어내는 '롤린'이라는 곡은 실제로 각종 음원사이트에 차트인 하며 역주행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의 관심은 그전에도 여러 번 있었기에 이번에도 금방 사그라지리라 여기며 쿨한 척 의미를 두려하지 않았다. 기대했다가 상처받기를 이미 여러 번. 이제는 정말 두려웠던 것이다.
먼지 풀풀 날리는 무대에도 행복하게 춤추고 노래하는 무명의 걸그룹과 그녀들의 춤과 노래를 열광적으로 따라하는 국군 장병들. 실상은 고단하고 막막할 청춘들이 만난 접점에서는 엄청난 스파크가 일었고, 그 영상을 접하는 수백만에게 묘한 희열과 감동을 주었다. 걸그룹에 관심가지는 일을 남사스러워하던 수많은 '아재'들마저 영상 속 군인들처럼 어느새 그녀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무명의 걸그룹은 청춘에서는 전역했지만 여전한 결핍과 갈망 그리고 공평한 세상에 대한 열망을 숨기며 하루하루를 버텨온 우리 시대 아재들까지 먼지 날리는 과거의 공연장으로 소환해버렸다.
어떻게 스트리밍을 해야 우리 가수에게 도움이 되는지, 인기투표는 어디 가서 해야 하는지, 먹거리를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차라리 별풍선처럼 어디 계좌로 돈을 쏴 줄 수는 없는 건지. 평생 덕질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아재들이 태반이었다. 차라리 대신 그 모든 일을 처리해 줄 '일 빠른 젊은 놈'을 돈 주고 구하자는 둥, 그 나이에 시작한 덕질이 너무 어렵고 골치 아픈 아재들의 좌충우돌이 인터넷에서는 또 다른 흥밋거리로 중계되고 있었다.
무대에 서면 행복게이지가 100이 되는 유정은 마침내 그녀들의 노래 롤린이 각종 음원사이트에서 1위를 하고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가 울음을 터트린 건 그동안 내색 없이 참아왔던 어머니가 비로소 만감이 교차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풍처럼 커지는 관심을 등에 업은 그녀들은4년 전 200위 안에 간신히 턱걸이했던 곡으로 지난 3월 12일, 역주행 단 17일 만에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아이차트 퍼펙트 올킬'의 기적을 썼다.
음원차트 올킬을 이어가고 있는 브레이브걸스 롤린 / 출처 : 아이차트
그녀들은 언제부턴가 각자의 별명에 그 분야 최고들에게 붙여주는 호칭인 '좌'가 붙어 각각 메보(메인보컬)좌, 꼬북좌, 단발좌, 왕눈좌로 불리고 있었다.
숙소에서 짐을 뺐던 꼬북좌 유정과 단발좌 유나는 잠 잘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밀려드는 스케줄 때문에 숙소로 다시 강제 소환됐다.
지금 그녀들의 인기는 범국민적인 것으로 국민여동생이나 글로벌스타와의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여서 앞으로도 도망치듯 짐을 뺄 일은 없어보인다.
3월 14일. 역주행 19일째, 4년 전 묻혔던 노래로 다시 음악방송 무대에 서게 된 걸그룹은 마침내 거대 팬덤을 가진 아이돌들과 음악방송 1위를 다투게 되었다.
그녀들의 팬덤은 사전투표, 현장투표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 헤매는 아재들이 주축이었다.
멤버들은 또 어떤가.
왕눈좌로 불리는 은지는 도도한 미모를 뽐낼 것 같은 외양과는 달리 예능이나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다가오면 바짝 긴장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사람들의 아주 작은 관심에도 흥분해왔을만큼 역주행 전까지 제대로 된 관심을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시아를 평정하고 글로벌로 뻗어나간 요즘 K-POP 아이돌들은 팬덤 역시 그 규모가 거대하다.
역시나 브레이브걸스는 SNS와 사전투표에서 글로벌 팬덤을 가진 아이돌들에 큰 열세를 보였다.
하지만, 음원차트를 퍼펙트 올킬한 그룹답게 음원 점수에서 더블 스코어의 우위를 보여 음악방송에서도 기어이 1위를 차지했다.
역주행 19일 만에 음원차트 올킬에 음악방송 1위까지. 전무후무할 신화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음악방송 1위 순간 / 출처 : SBS인기가요
칼칼한 목소리로 압도적인 보컬 실력을 보여주고 있고, 실질적인 리더역할도 하고 있는 맏언니 메보좌 민영. 그녀는 팬덤 때문에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던 음악방송에서까지 1위로 호명되자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감격했다.
"저희가 사실은 해체위기에 놓였어서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할 줄 알았었는데 ...."
브레이브걸스 역주행 기사에 붙곤 하는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욕먹는다"는 댓글들처럼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지난 19일간 벌어졌다.
그런데, 이 같은 브레이브걸스 역주행 서사에서 재미있는 점은 그녀들의 '떡상'을 오히려 팬들이 더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왠지 그들의 심리가 짐작이 간다.
나름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주류가 되지 못하다 결국 밀려나고 잊혀져 온 우리 시대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누가 알아주건 말건 묵묵히 진심을 다한 댓가를 마침내 누리기 시작한 그녀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먼지 날리는 공연장, 궂은 날 들어가면 하룻밤을 자고 나와야 하는 섬마을 무대도 마다않고 진심을 다했던 그녀들의 성공을 보며 정직하게 땀 흘린 사람들이 마침내 보상받는 모습에 희열을 만끽하는 건 아닐까.
지금도 많은 반칙과 비리가 횡행하고 상당수는 그에 편승하고 싶어하지만, 그래도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정직하게 노력해온 사람들이 결국엔 보상받는 공평한 세상을 원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이 전무후무할 역주행 신화. 그 신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어쩌면 이 현상을 만들어낸 국민들일지도 모르겠다.
세계 최고 걸그룹의 멤버가 막 솔로로 데뷔했고, 1위를 놓친 다른 거대 아이돌들의 팬덤도 전열을 가다듬고 도전해 올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터인 우리나라 음악시장에서 이제야 사전투표, 현장투표 하는 법을 배우는 아재들이 팬덤의 주축인 브레이브걸스가 앞으로도 무난하게 역주행 신화를 이어갈 수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전처음 해보는 음악방송 투표에 헤매며 조바심 내던 아재들도 그들이 응원하는 그녀들이 음악방송 1위까지 거머쥔 오늘만은 편안하게 잠을 청할 것 같다.
누군가의 댓글처럼 "아직 세상은 살 만 하다" 여기며.
PS. 그 후 브레이브걸스는 최근 발매된 음원만 집계하는 음악방송 한 곳을 제외한 모든 음악방송에서 1위를차지했고, 음방 6관왕을 달성하며 3월 24일 2주간의 음방 활동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