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상반기 <롤린>과 <운전만 해>로 역주행 신드롬을 일으키며 각종 트로피와 광고를 싹쓸이했던 걸그룹 브레이브걸스. 그녀들은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보상 받는다는 서사의 주인공으로 전국민적 응원을 받았다.
세계 최고의 걸그룹으로 평가되곤 하는 블랙핑크를 제외하면 작년 브레이브걸스는 국내 걸그룹 중 둘째가라면 서러울 화제와 관심을 몰고 다녔다.
심지어 걸그룹 최초로 3달 연속 멜론 월간차트 1위를 달성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롤린> 역주행에 이어 작년 6월 <치맛바람>이 수록된 미니 5집을 발표한 브레이브걸스는 음반 판매에서 호조를 보이며 뮤비가 유튜브 조회수 3천 만뷰를 넘어서고, 음악방송에서도 세 차례나 1위를 차지하는 등 대세 걸그룹으로 정주행하는 듯 했다.
하지만 폭발적인 역주행의 근원지가 군부대 공연 영상이었고, 팬덤이 위문공연을 경험한 남성 위주로 형성되다 보니 10대와 20대,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주도하는 현재의 K-팝 생태계에서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아이돌 판을 오래 경험한 매니아들 중에서는 고연령층이 상당수 포함된 남성 팬덤 위주의 브레이브걸스가 계속 상위권 걸그룹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 낙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실제로 브레이브걸스 팬카페에서도 국내 팬 유입이 정체 되자 소속사가 해외팬 유치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작년 8월 발표한 <술버릇>은 뮤비가 단기간에 3천만 뷰를 기록했지만, 앨범의 초동(첫 일주일) 판매량은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음원도 첫 진입이 벅스에서만 3위이고 나머지 차트에서는 20위에도 들지 못하는 등 정상을 밟지 못했다.
브레이브걸스 <THANK YOU> 앨범 포스터
리패키지 앨범만 발매하고 활동은 하지 않은 <술버릇> 때와는 다르게 올해 3월 발매한 미니 6집 <THANK YOU> 앨범은 코로나로 한주 이상 연기되기는 했지만, 음악방송 출연 등 공식적으로 컴백 활동을 했음에도 하향세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뮤비가 13일만에 4천만 뷰를 돌파했고 음원도 벅스에서는 2위까지 올랐지만, 나머지 차트에서는 TOP10에 들지 못했다. 음악방송에서도 단 한 차례도 1위를 하지 못했다.
작년 음방 10관왕을 했던 그룹이라는 것이 무색한 성적이었다.
국민적 응원이 식어가고, 소속사의 일 처리에 대한 실망으로 1위 경쟁을 하는 다른 아이돌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던 팬덤이 더욱 약화되면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팬미팅 연기 공지에 티켓을 산 해외 팬들을 위한 번역은 준비되지 않는 등 소속사의 태도에 대한 불만이 들끓었다. 발표하는 곡마다 완성도는 좋으나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맞느냐는 지적도 지속적으로 나왔다.
대중적 관심이 사그라들자 원래의 중소 기획사 소속의 평범한 걸그룹으로 돌아가 버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런 와중에 음악방송 1위 걸그룹들이 모여 치열하게 경연을 펼치는 프로그램 '퀸덤2' 출연 소식이 전해졌다. 경연하는 여섯 팀의 라인업에 브레이브걸스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퀸덤2는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K-팝 팬들도 참여하여 퀸이 누구인지 가리는 국내 걸그룹들의 글로벌 대전이었다.
퀸덤2 단체포스터/엠넷
이미 글로벌 팬덤을 안정적으로 구축한 다른 걸그룹들과는 다르게 브레이브걸스는 이제 겨우 글로벌 팬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정도였다.
소속사는 글로벌 팬들에게 브레이브걸스를 알리기위해 참가를 결정했겠지만, 글로벌 팬덤이 미미하다는 점이 되려 경연에서 발목을 잡아 원치 않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논란은 퀸덤2 오프닝 무대부터 터졌다.
세련된 무대와 퍼포먼스로 환호 받은 다른 경쟁 걸그룹들과는 달리 마이클잭슨을 모티브로 한 의상과 춤을 보여줬던 브레이브걸스는 시청자들로부터 촌스럽고 올드하다는 혹평세례를 받았다.
비슷한 혹평은 1차 경연에서도 이어졌는데, 의상이 올드하고 이상하다는 지적들이 많았다.
한 팀이 코로나 때문에 1차 경연에 불참하며 최하위는 면했지만 5위로 사실상 꼴찌를 하고 말았다.
그래도 열심히 준비한 무대들이었는데 연속으로 혹평을 받고 결과까지 최하위자 브레이브걸스는 창피하고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절치부심한 브레이브걸스는 함께 경연하는 다른 팀의 곡을 부르는 2차 경연에서 케플러의 <MVSK(마스크)>라는 곡을 리메이크하여 선보였는데, 오프닝과 1차 때와는 다르게 호평이 쏟아졌다.
코디가 크게 좋아졌고, 전반적으로 브레이브걸스 특유의 긍정적 자신감을 되찾은 멋진 무대였다. 적어도 중위권이고 2위 이상도 노려볼 수 있는 무대라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브레이브걸스는 투표 결과 다시 꼴찌 성적인 6위를 받아들었다.
퀸덤2는 팬들이 경연마다 2표를 행사할 수 있었는데, 한 표는 자기가 원래 응원하던 팀에게 하게 되고, 다른 한 표는 가장 잘한 다른 팀에게 던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혼자 출전한, 레전드 걸그룹 씨스타 출신의 효린이 경연마다 워낙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가창력을 보여주고 있어서 다른 한 표를 효린이 다 가져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걸그룹들은 물론 효린까지 압도해버리는 엄청난 무대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비교적 팬덤이 적은 브레이브걸스는 꼴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도가 되어 있었다.
효린, VIVIZ, 브레이브걸스, 우주소녀, 이달의 소녀, 케플러.
사실 퀸덤2에서 경연하는 걸그룹들은 어느 팀이 우승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다들 독보적인 실력과 매력을 갖추고 있다.
브레이브걸스 역시 멤버 개개인의 실력과 매력이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이는 3차 1라운드 경연에서 증명되었는데, 다른 팀의 유닛들과 한 팀을 이뤄 다른 유닛 팀들과 겨루는 방식이었다.
보컬 경연에서 효린과 '33'이라는 팀을 이뤄 볼빨간 사춘기의 <나의 사춘기에게>를 부른 민영은 감동적이라는 극찬과 함께 2위를 했고, 댄스 경연에서 이달의 소녀의 올리비아 혜, 이브, 희진, 최리와 함께 '퀸이나'라는 팀을 이뤘던 은지는 역대급 무대였다는 찬사와 함께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브레이브걸스 은지 인스타그램
특히 은지는 3년전 퀸덤1에서 2NE1 박봄의 분신으로 댄스 유닛 경연에 참여했다가 6위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무명의 설움을 톡톡히 겪은 경험이 있어 더욱 감격이 컸을 것이다.
사실 브레이브걸스 멤버들은 모두가 걸그룹 개인 브랜드 평판 TOP10에 들었던 기록이 있을 정도로 국민적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유닛 경연에는 참여하지 않은 유정과 유나도 나란히 걸그룹 개인 브랜드 평판 1, 2위를 차지한 적이 있을 정도로 독보적 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3차 경연 1라운드 유닛 대결에서 공동 1위에 오른 브레이브걸스는 그러나 3차 경연 2라운드를 앞두고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2연속 꼴찌를 하면 경연에서 탈락하는 룰이었는데, 브레이브걸스는 이미 2차 경연에서 꼴찌를 했기 때문에 3차 경연 2라운드에서 또 꼴찌를 하게 되면 자동 탈락하게 되어있는 것이었다.
퀸덤2의 관심사가 3차 경연 2라운드에서 브레이브걸스가 탈락하느냐 마느냐로 쏠리고 있었다.
사실 브레이브걸스는 트랜디한 기획에 압도적 퍼포먼스로 승부하는 팀이 아니었다.
레트로를 기반으로 사이다같이 청량하고 때론 트로피칼처럼 칼칼한 보컬, 거기에 밝고 건강하고 너무 솔직해 때론 엉뚱해보이기까지하는 매력으로 어필해 온 팀이었다.
어쩌면 딱딱 떨어지는 칼군무와 압도적인 무대로 좌중을 휘어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경연과는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퀸덤2 다음화 예고편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들은 브레이브걸스의 탈락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었다.
브레이브걸스는 독배를 마신 것일까.
3년 전, '퀸덤1'에도 여섯 팀이 경연했고, 퀸덤 출연이 분명 독이 된 팀들도 존재했다. 생명체처럼 걸그룹 역시 명멸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니까.
3차 경연 2라운드를 준비하면서 브레이브걸스는 도리어 차분해졌다.
작년, 일생의 꿈이었던 걸그룹을 내려놓아야만 했던 순간들도 견뎌냈는데, 지금의 힘듦은 그 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며 서로를 다독였다.
서로 의지하며 6년간의 긴 무명시절을 견딘 터라 친자매나 다름없어진 그녀들이었다.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시도하기보다는 한 번도 선 보인 적 없던 <RED SUN(레드썬)> 무대를 팬들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팬타스틱. 팬들을 위한 무대라는 2라운드 컨셉과도 딱 맞는 곡이었다.
마지막 무대가 될지 모르니 팬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던 얘기를 하고 떠나자라는 마음이었다.
브레이브걸스는 역주행 전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무대를 시작했다.
아무도 몰라주던 시절, 조금이라도 눈에 띄고 싶어 의자 위에 올라가 춤을 췄는데 그러다 종종 의자에서 떨어지곤 했었다. 떨어져서 아픈 것보다 더는 무대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르는 현실이 더 아팠을 것이다. 이번만은 잘 돼야 된다고 간절함을 드러냈지만 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레드썬은 현실은 힘들고 지치지만, 기운을 내 '이루어져라' 주문을 걸다보면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올거라 위로하는 힐링 송이었다.
의상은 화사하고 분위기는 신나는데 이 무대를 대기실에서 보던 다른 경쟁 걸그룹들은 하나둘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브레이브걸스는 예쁜 꽃으로 장식된 의상을 입고 특유의 밝음으로 춤추고 노래했지만, 걸그룹으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때론 뒤쳐져 상처 받던 경험을 갖고 있던 다른 그룹의 멤버들에게도 화려한 무대 이면의 슬픔과 그러면서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이 절절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무대가 끝나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겨우 참고 있는 브레이브걸스 유정의 모습이 화면에 잡히자 동변상련으로 지켜보던 다른 그룹의 멤버들은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대기실은 갑자기 눈물바다가 되어갔다.
무대 중간에는 이루어져라 주문을 외며 힘든 시절을 이겨내던 브레이브걸스가 마침내 작년 연말 시상식장에서 트로피를 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삽입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레드썬 무대를 보며 감동 받은 건 경쟁 걸그룹 멤버들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80개국의 해외 팬들이 참가한 글로벌 투표에서 드러났다.
퀸덤2/엠넷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브레이브걸스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브레이브걸스는 앞서 경쟁 걸그룹들끼리 서로를 심사하는 투표에서도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고, 현장 투표에서도 1위를 했다.
결국 브레이브걸스는 최하위권이던 지금까지의 성적을 뒤집고 3차 경연 최종 순위에서는 단독 1위로 올라섰다.
경연 초반부터 올드하다는 혹평세례를 받으며 탈락위기까지 내몰렸던 브레이브걸스. 꿈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역주행이 찾아왔듯이 미련을 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며 희망을 노래한 순간 기적처럼 또 다시 역주행해버린 것이다.
한국이 아시아 음악 시장을 제패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고, 아시아 국가들은 한국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자신들 국가의 소년, 소녀들을 자랑스러워 한다. 한국 아이돌 그룹들이 글로벌 팬덤을 구축하고 세계에 문화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이브걸스 역시 오는 7월 미국 9개 도시에서 공연하는 투어 일정을 앞두고 있다.
물론 브레이브걸스가 참여하고 있는 퀸덤2는 다음주 생방송 파이널 경연을 남겨두고 있다.
가장 많은 점수가 걸린 파이널 경연에서 브레이브걸스가 1위를 지켜내며 기어이 우승까지 차지할지 아니면 다시 하위권으로 떨어질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해외 투어 역시 많은 좌절과 시련을 겪게 될 수도 있다.
브레이브걸스 은지 공식 인스타그램
하지만 브레이브걸스가 끝까지 그들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면 무대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지 말아요, 우리. 저희에게 왔듯 여러분들께도 오고 있을 그 모든 것들을.'
브레이브걸스는 이미 절망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야마는 희망의 아이콘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녀들과 코로나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의 재도약을 응원하고 싶다.
PS. 일주일 뒤, 생방송 파이널 경연에서 브레이브걸스는 썸머퀸다운 무대를 보여줬지만, 참가국 수가 대폭 늘어난 글로벌투표 등에서 다시 다른 팀들에 밀려 최하위로 경연을 마쳤다.
하지만 브레이브걸스의 팬덤인 피어레스는 처음부터 순위는 아무 상관없었다며 무사히 경연을 마친 그녀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