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이혼>을 보며
이혼을 둘러싼 진실 공방
내가 최근에 즐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신성한, 이혼>이다. 이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며 시청중이다. 이 드라마의 장점은 이혼 당사자들을 전적으로 가해자, 피해자로만 나누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성한, 이혼>의 드라마 전개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각 소송마다 반전이 숨어있다. 첫 번째 케이스는 성관계 동영상 사건으로 화제가 된 여성의 양육권 청구소송이다. 동영상만으로 양육권을 청구하는 여성에게 결함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하는 중에 남편의 가해 행위, 의처증과 폭력성이 드러난다. 결국 의뢰인의 결함과 사건의 진실은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두 번째 소송건도 마찬가지다. 시어머니를 폭행한 며느리의 이혼소송이다. 존속폭행이라는 점에서 며느리는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그 배경을 보면서 의뢰인을 이해하게 된다. 세 번째는 불륜 남녀의 이혼 소송건이다. 이들이 윤리적 비난을 피할 수 없겠으나, 법률적 혼인상태가 가질 수 있는 폭력성을 묻는다. 이렇게 매 사건은 소송 의뢰인이 사회적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위치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다가 당사자들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소송 의뢰인에 대한 동감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런 점에서 상식을 깨뜨리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 방영된 7, 8회편은 불편했다. 7,8회에는 이혼을 요구하는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이 나온다. 농촌의 다문화가족의 전형적인 모습, 나이 많은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성이 보인다. 이 여성은 남편의 폭력을 이유로 이혼과 양육권 청구한다. 남편은 억울하다며 변호사, 신성한에게 변론을 부탁한다. 드라마에서 농촌의 결혼이주여성과 남편을 보자마자 난 불안해졌다. 이 드라마의 스토리라인 전개의 특성상 의뢰인의 억울함을 증명하는 식으로 소송은 끝날 것이다. 즉 결혼이주여성의 결함을 드러내면서, 남편의 억울함에 힘이 실릴 것이란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 부부가 사는 농촌의 평범한 지역민이 전해주는 말들. “남편 마춘석은 베트남에 있는 아내의 가족까지 먹여 살리기 위해 배로 열심히 노력했다,” “베트남 부인은 매일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 밖으로 나간다. 학원을 성실히 다녀도 당최 말이 늘지 않는다.” 결국 이 드라마 속에 밝혀진 이야기는 이주여성은 남편이 고생함에도 남편 일도 돕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베트남 남자를 만났고 그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혼과 양육권을 갖기 위해서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이 주장한 남편의 폭력도 허위였다.
우리 사회에는 결혼이주 여성에 대한 강한 편견이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결혼 이주여성은 돈 때문에 결혼했고, 도망을 갈 것이라는 편견이다. 이런 편견을 고정시키는 드라마가 아니길 바랐으나, 이 케이스도 앞선 소송들의 전개와 마찬가지로 남성의 억울함은 풀리고, 명예는 회복된다. 베트남 여성은 반대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으로 소송은 마무리되었다.
소수자를 다루는 드라마, 왜 불편한가
<신성한, 이혼>에서 다룬 소송 건을 보면 모두 상식적, 보편적이지 않다. 오히려 상식이라는 허울을 벗겨준다. 각각 케이스마다 보여지는 진실과 실제의 진실은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즉 사람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보편성이란 기준으로 사람을 인식하는 것의 위험을 지적한다. 단순화시키지 말고, 각 개인을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것이 <신성한, 이혼> 드라마의 장점이다. 그런데 이런 장점이 소수자를 다루는 드라마에서도 발휘할 수 있을까? 대중 드라마에서 다수자 집단과 같은 기준으로 소수자의 사례를 소수자 집단과 무관한 개별 사건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다수자와 소수자에 대한 우리 의식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자는 단순히 수적 차이를 드러내는 정의가 아니다. 소수자는 다수자에 대한 사회적 약자를 가리킨다. 또한 이들은 단순화, 정형화되어지기 쉬운 그룹이다. 다수자에 속하는 개인의 행동은 개인적, 개별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소수자 각 개인의 행동은 소수자 대표로 바라보는 사회에 살고 있다. 즉 소수 인종, 민족에 속한 개별의 언사, 행위를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인종적 대표성을 부여한다. 즉 중국연변 출신이니까, 무슬림이니까 등으로. 성소수자인 행동은 개인의 특징이 아닌 성소수자 전체의 특징으로 정형화한다. 그런 점에서 이런 사고와 관습은 폭력이며, 명백한 차별, 혐오이다, 우리는 소수자들에게 과대한 대표성보다는 각각 개인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 찬성한다.
그럼에도 소수자에 대한 편견, 어떤 이의 행위를 그가 속한 소수자 그룹에서 발생된 극히 본래적, 자연적 의미를 갖는다는 의식이 강한 사회에 살고 있다. 따라서 다수자와 같은 접근 방법을 취하는 것은 우리의 편견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걱정된다. 드라마 속 ‘틴 티화’는 아주 개별적인 인간으로 이해되어질까? 틴 티화는 아마도 국제결혼한 여성들을 대표하게 될 수 있다. “거봐, 국제결혼하면 조심해야 돼. 그들의 결혼은 가짜야. 그들은 언제든지 도망가려 기회를 노릴거야.” 나는 이런 시청자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신성한, 이혼>의 다문화가족의 이혼이 한국 사회의 국제결혼한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만약 이 드라마를 결혼이주여성이 봤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들은 자신과 무관한 각각의 개인사, 개인적 성질로 보았을까. 이번 이야기가 자신들에게 향하는 의심스런, 따가운 시선을 더 상기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 사회는 이미 국제인권기구에서도 우려를 자아낼 만큼 인종적 차별이 심각하다. 한국의 인종주의은 단일민족주의라는 신화와 명예 백인이 되기 위한 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백인을 모범화하는 태도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자에 대한 차별을 낳는다. 그런데 이런 의식은 피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국민의 정체성인 단일언어, 문화를 지켜야 하고, 이를 훼손하는 타자와 외부에 대하여 경계심을 드러낸다. 이방인을 우리로 받아들이는 데 극히 인색하다. 그러면서 이방인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 결과 이주자가 한국어, 한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에 쉽게 배제시키려 한다. 드라마에서도 “한국어를 오래 배웠는데 하지 못 한다”며 이상하다고 의심한다.
소수자, 사회적 약자를 다수자를 접근하는 관점으로 접근하려는 것은 위험하다. 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중적 잣대를 사용하는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맥락과 관련한 고민 없이 다룰 때, 순한 영향력을 기대하기 힘들다. <범죄도시> <청년경찰>에서와 같이 재중동포를 다루는 방식은 그 자체가 얼마나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가와 무관하게 재중동포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드라마가 극히 도덕교과서적인 이야기만 해야 하는가하는 반문이 들 수도 있다. 나는 틴 티화의 케이스가 개별 인간의 결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열망한다. 그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도, 드라마 제작을 할 때 소수자 당사자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보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