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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Aug 06. 2018

종교 뒤에 숨은 정치가 문제

워마드 사태를 보며

임신중지 금지는 기독교만의 교리인가?     

온라인 커뮤니티 ‘워마드’에, 워마드 회원이 '성체 불태우는 거 인증한다'는 제목으로 사진 한 장을 게시했다. 사진에는 성체로 추정되는 물체에 불붙은 모습이 담겼다. 특히 글쓴이는 "한국이 가톨릭 국가도 아닌데 왜 낙태를 금지하냐. 당장 철회하라"라며 낙태법 폐지를 주장했다.     


이를 두고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이러한 행동의 옳고 그름을 떠나 행동의 원인에 더 관심을 쏟아달라고 하는 호소가 있었다. 세대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이해를 촉구하는 태도, 우려 섞인 신중론을 펴는 입장 등이 있었다.    

 

워마드의 성체훼손을 보면서 혐오의 부정적 전파성을 확인했다. 동시에 그의 주장이 현실을 정확히 보지 못한다는 점에 안타까웠다. 한국이 임신중지 합법화가 종교적 힘 때문에 어려운 것인가? 주장대로 임신중지 금지는 기독교만의 교리인가?  

   

가부장제는 여성 몸에 대한 통제를 근간으로 한다. 여성 몸에 대한 억압 중 대표적인 것이 성폭력과 출산이다. 이 억압은 사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도 합법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구정책이다. 출산장려뿐만 아니라 출산억제도 가부장제 사회의 주요한 공적 경로에 포함된다. 90년대만 해도 한국 인구정책의 주류는 출산억제였다.      


그런데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자궁에 대한 통제는 종교적 가치와 일치하는 면이 있다. 낙태 금지나 제한을 위한 원리인 생명권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초인간적 영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에서는 여성의 몸을 개체로가 아니라, 우주적 질서와 연관시켜 보는 것이 기본이다. 이러한 개념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그 외의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교도 낙태는 악업 중에서도 생명을 해친 무거운 악업으로서 지옥의 고통을 받는 무지막지하게 큰 악업으로 보고 있다. 불교가 강력한 문화적 힘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서도 임신중지는 금지된다.     


낙태금지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종교라는 틀의 교집합이 만들어낸 것이다. 가부장제가 곧 종교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낙태금지가 종교만의 영향으로 볼 수 없다. 임신중지는 종교 여부와 관계없이 국가 정책으로 결정된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임신중지가 전면적으로 허용된 국가이다. 중국과 다른 동력으로 임신중지가 허용된 국가들도 있다. 여성인권 운동이 확산됨에 따라서 임신중지 허용국가가 늘어나고 있다.     


종교적 가치가 임신중지 허용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곳이 스페인,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이 강한 이들 국가에서는 임신 12-14주 내에 임신중지 수술이 허용된다. 그렇다면 종교는 이를 수긍하는가? 낙태죄가 폐지된 스페인, 이탈리아에서는 아직도 종교적 믿음으로 임신중지 수술을 거부하는 의사가 있으며, 종교의 원칙적 입장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성서는 해석의 경합이 벌어지는 장이다.       

종교의 경전을 해석하는 것은 신화를 해석하는 것과 같다. 신화처럼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이다. 신화와 마찬가지로 성서도 그 텍스트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텍스트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특히나 구약성서가 고대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하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와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기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시편 127:3), “(악인은)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시편 58:8) 시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여호와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임신은 하느님의 축복이었다. 또한 시편은 하느님은 자애로운 분일 뿐 아니라 무서운 벌을 내리는 분으로 표현된다. 적의 씨앗을 말리는 하느님의 힘은 이스라엘 민족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밀쳐서 낙태시켰을 경우, 다른 사고만 없으면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배상액을 재판관의 조정하에 지불해야 한다.”(출애굽기 21:22) 이 구절도 여성의 몸, 태아가 남편에게 재산이었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종교가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기원을 신에게서 찾는 종교의 기본원리 때문이다. 이런 원칙에서 출발한 종교계의 세상에 대한 가치, 관점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수성의 기준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발전과 인권의식 확산으로 보수성도 변화하고, 성서의 해석도 다양하게 옮겨가고 있다. 예수 시대에도 형식주의, 율법주의, 극단적인 분리주의,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특권 의식에 빠져 있던 성직자, 학자들이 있었다. 예수는 그들과 율법을 가지고 논쟁을 했었다. 성서 그 자체를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진정한 종교인의 태도라 할 수 없다. 다만 성서가 객관적 과학성을 보증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성서의 권위는 해석하는 힘에서 온다.     


더 유념해야 하는 것은 종교는 성직자의 것도 아니고, 현재는 신자가 성직자의 해석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아니다. 성직자의 강론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신앙인들이 늘고 있다. 대다수 신앙인들이 무지몽매하지 않다. 신앙인이 되는 이유는 다양하며, 대다수는 사회에서 얻을 수 없는 위안을 교회와 절에서 찾는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계의 낙태금지나 그 금지를 금지시키려는 성체훼손은 종교를 과대해석하거나 그 타격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저출산’라는 위기의식과 낙태금지가 함께 작동하고 있다. 젊은 여성에게 국가의 존립을 책임지라고 국가는 외치고 있다. 출산, 육아를 위한 조건을 최대한 허용할 터이니 출산하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임신중지 주장은 시대적 위기의식을 모르는 이기적인 소리가 되어버린다. 진정으로 임신중지를 가로막고 있는 세력은 보수적 교회와 성직자들의 목소리에 숨어있다.     

   

우리의 주장은 정당한 평가를 받을 권리가 있다.     

나는 토론을 통한 소통, 평화적 시위만이 우리의 주장을 전파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토론장에 나설 수 없는, 기회가 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평화적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자극적 방법의 선택이 꼭 부정적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고, 평화적이고 대중적 방법이 곧 바로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는 그 시대의 조건과 함께 고민을 해봐야 한다.     

분명한 것은 증오와 혐오의 폭을 넓히는 방향에서는 우리의 주장이 왜곡될 수 있다. 또한 정확하지 않은 타격대상으로 인해 우리 주장이 그릇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우리 주장의 정당함만큼 합당한 평가와 결과를 얻을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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