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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Sep 23. 2018

커플 아니면 반사회적 인격자 ?

명절에 감상하는 고약한 영화

파티에 초대받지 못하는 자    

20년 전에 <섹스 앤 더 시티’>는 TV 드라마 시리즈가 있었다. 30-40대 뉴욕 여성들의 도회적 /중산층 삶을 그린 것이었다. 자유로운 연애, 섹슈얼리티 등과 관련된 스토리라인으로 한국의 시청자에게는 대단히 이색적이고 도발적이었다. 이 드라마의 거침없는 소재는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페미니스트 진영 내에서는 이 드라마와 페미니즘과의 관계성에 대한 찬반 논란이 격렬했었다.  


나는 인상적인 몇 개의 에피소드 때문에 <섹스 앤 더 시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덜한 편이다.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커플파티에 관한 것이다. 주인공 중 한 명인 미란다는 변호사이다. 그녀는 사랑보다는 자신의 일과 직업적 성취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자와의 데이트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그녀는 직장에서 레즈비언으로 오해를 받는다. 어느 날, 미란다는 자신의 직장 상사가 주최하는 커플파티의 초대장을 받는다. 이 파티에는 이성애든 동성애든 커플이면 환영하나, 싱글은 참가 자격이 없다. 그 파티는 미란다에게 성공을 위한 사교장, 직장 동료들과의 소속감을 갖기 위해서 중요했다. 그런데 그녀는 데려갈 남성 파트너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파티에 여성과 함께 하여 레즈비언임을 가장한다.     


이 에피소드는 사회가 싱글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씁쓸하게 보여준다. 성인이 되면 당연히 커플이 되어야 한다. 특히 중산층 이상의 안정된 사회에서는, 싱글은 정상가족의 안전한 관계를 해칠 가능성이 높은 위험인물로 취급된다. 싱글 상태는 커플관계의 중간지대, 커플을 만들기 위한 전적으로 준비기간, 과도기일 뿐이다. 이 기간 동안 싱글들은 커플을 만들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해야 한다. <섹스 앤 더 시티>가 바로 그런 드라마이다. 여성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연애, 사랑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 전장에서도 종종 싱글이 갖는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에피소드이다.     


법적으로 싱글이 금지된 것은 아니나, 싱글은 법적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차별과 배제의 삶을 산다. 어쩌면 싱글을 불법화하는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사회는 싱글을 심리적· 물리적으로 배제와 처벌을 충분히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예가 싱글은 사회의 어느 모임에 가든지 고착화된 질문에 직면한다. 왜 싱글인지 이유를 묻는 질문이다. 커플은 커플인 이유를 답할 의무가 없지만 싱글은 다르다. 싱글은 커플을 성립하지 못한 질문에 당연히 답해야 한다. 무책임, 태만함, 비도덕성, 이기심, 반사회성으로 규정하려는 시선에 설명해야 한다.     


싱글 또는 동물     

싱글을 반사회적인 주체라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사회적 시스템으로 만들면 어떤 모습이 될까? 시민의 조건은 커플이고, 주민등록증 대신에 커플증이 필요하다면 말이다. 바로 그런 영화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이다. 커플 중심의 획일적 사회인 현재 사회를 더욱 확고하게 체제화한 디스토피아를 끔찍하게 묘사하고 있다.  


더 랍스터에는 세 개의 세상이 있다. 우선, ‘시티’라는 안정된 공간이 있다. 시티에는 커플이 산다. 커플증이 없으면 구속된다. 커플에서 싱글로 추락하면, 시티 외곽에 있는 호텔로 강제 로 이주된다. 그 호텔은 싱글들이 일정 기간 동안 커플이 이루어지도록 교육훈련한다. 끊임없이 커플의 장점이 교육되고, 모든 사람을 커플화하는 것이 지상목표이다. 정해진 기간 내에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동물은 선택할 수 있다. 주인공은 랍스터가 되겠다고 계약서에 서명하고 호텔에 입주한다. 동물이 되지 않으려면 호텔에서 숲으로 도망쳐야 한다. 숲에는 도망쳐온 사람들과 동물들이 모여 산다. 이들은 호텔 사람들의 사냥감이 된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기계인간처럼 무표정하다. 커플도 싱글도 로봇과 같이 감정의 희로애락이 보이지 않는다. 폐쇄국가의 시민들과 같다. 그런데 누가 이런 체제를 만들었는지 또한 이러한 제도가 누굴 위해 복무하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시티라는 사회는 우리의 오래된 의식이 쌓아올린 철옹성,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신념이 만든 것이라고 감독은 말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은 또 다른 시사점을 던져준다. 숲으로 도망 온 주인공은 숲에서 사랑을 찾았다. 그런데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징표가 필요하다. ‘시티’의 규칙에 의하면 징표는 당사자의 마음이 아니라 두 사람의 외형적 공통성이다. 외형적 공통성이 없으면 둘은 시티에 진입하지 못한다. 두 사람은 커플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못한다. 결국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이다.      


고약한 영화로 스트레스를 응시하자    

이제 영화를 만든 현실로 돌아와 보자. ‘섹스 앤 더 시티’ 속 싱글 여성들은 외형적으로 독립적이고 개방적으로 보이지만, 연애, 결혼과 출산 압박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럼에도 ‘섹스 앤 더 시티’의 커플파티를 보면서 우리 사회보다 나은 몇 가지 점이 있었다. 동성애적 관계가 법적으로는 모르겠으나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 그리고 커플이면 되는 것이지 결혼 여부를 묻지 않는 분위기 때문이다.   

   

한국은 어떤가? 싱글이면 싱글이라고, 결혼하지 않은 커플상태이면 합법적 커플이 되지 않아서, 아이가 없는 결혼커플은 아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가 한명이면 한명이라서 주변에서 걱정이 쏟아진다. 걱정이 아니라 사회적 폭력이다. 특히 명절에는 이런 포화가 집중된다. 이래서 명절을 피하려 하는 인구가 늘고 있다. 그런데 명절만 피하면 되는가. 명절에는 일상적 의식과 관습이 시공간적으로 집중화되어 나타날 뿐이다.     


우리 삶의 존재방식을 커플과 싱글로 이분화할 수 없다. 커플과 싱글은 다양한 삶의 지향, 태도를 가진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의 삶의 태도일 것이다. 홀로인 나와 인생, 세상을 연결하여 사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쩌면 사랑은 커플이 사회적 시민증으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벗어날 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굴레를 벗어나는 출발로, 우리의 스트레스를 전면으로 응시해보자. 훈훈한 명절을 만들기에는 적합지 않은 고약한 영화이지만, <더 랍스터>와 <섹스 앤 더 시티>를 볼 것을 독자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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