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2, 예상보다는 조금 빨리.
한결 무거워진 배 때문에 자다가도 뒤척이는 게 다반사였던 그 무렵, 그날도 어김없이 잠결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몸을 돌아 뉘었다. 그런데 유난히 아랫도리가 놀랄 정도로 축축했다. 임신을 하면서 부쩍 땀이 많아졌던 터라 식은땀이라도 났나 싶어 비몽사몽으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축축이 젖어버린 잠옷 바지와 속옷, 그리고 이상한 냄새. 굳이 따지자면 락스와 비슷한 향이었다.
양수가 터진 것이었다.
첫 임신, 그리고 예정일보다 22일이나 이른 날이었기에 나는 양수가 어떤 냄새와 색깔인 지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아직 준비도 다 못했는데 나 오늘 애 낳겠구나.
성급히 깊은 잠에 빠진 남편을 불렀다. 무슨 일이냐며 잠결에 대답하던 남편은 양수가 터진 것 같다는 말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재빨리 온콜인 미드와이프에게 전화한 후 남편과 서둘러 출산 가방을 쌌다. 신의 계시라도 있었던 듯 전날 밤 작성해 놓은 출산 가방 리스트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젖은 옷과 침구를 임시방편으로 처리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그 흔한 생리대도 없어 수건을 팬티 사이에 대고 병원으로 향하며 우리는 용케 정신줄을 붙잡고 있었다.
두어 번 헤맨 끝에 도착한 병원. 새벽 1시의 병원은 고요했고 출산 병동의 대기실에는 진통을 겪는 듯한 산모 두어 명이 있었다. 접수 후 대기하면서 다음 날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양수가 터진 사실을 메시지로 보내 놓고 회사 매니저에게도 예정보다 휴직을 빨리 써야 할 것 같다며 현재 상황을 알렸다. 가족들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으나 확인을 하지 않아 한국의 친정집에 전화를 했다. 엄마는 다음 주 캐나다로 오기 위해 비행기를 예매해 놓았으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황당 반, 속상 반이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향한 곳은 대기실. 분만을 기다리는 산모들이 침대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미드와이프는 양수가 터진 것을 검사하고 확인해줬다. 양수는 이미 많이 흘러나와 배가 많이 줄어들었으나 진통도 없고 아기와 나의 상태도 양호했다. 심지어 아기 태동이 활발해 간호사들이 아기가 아주 건강하다며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양수가 적어져 태동이 더 세게 느껴지는 것은 덤으로 신기한 경험이었고.
아기는 내내 역아였고 마지막까지도 역아여서 제왕절개 수술이 불가피했다.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 그런데 수술에 참여할 의료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내 수술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대기실은 모두 진통을 겪는 산모들로 가득했다. 각자의 모국어로 뱉어내는 고통의 크기는 감히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떤 이는 모르핀을 맞았는데도 힘겨워했다. 사람의 소리라기보다는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그 소리는 차라리 진통 없이 제왕절개를 받게 된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결국 나는 8시간을 기다리다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예닐곱의 자연분만 산모가 대기실을 거쳐갔으며 1번의 의료진과 미드와이프의 shift가 있었다.
수술이 결정되고 나는 직접 걸어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 준비가 진행 중인 수술실은 너무도 낯설었다. 간호사는 나를 수술대로 안내하고 하반신 마취에 대해 설명해줬다. 척추에 맞는 마취주사는 아프다는 사람도 많았는데 나는 거의 아프지 않았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마취약이 들어오자마자 오른쪽 다리가 찌릿 거렸다.
수술대에 눕자 온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받아 본 수술이라고는 다래끼 수술이 다였는데, 나는 사실 다른 것보다 마취가 잘 안 될까 봐 너무도 겁이 났다. 제왕절개 수술이 생각보다 큰 수술이라는 것과 회복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 유착이 있을 수 있다는 것들은 나중에 수술이 끝나고 알았다. 다행히 수술 준비가 끝나자 남편과 미드와이프가 수술실에 들어왔고 남편 얼굴을 보자 긴장이 좀 풀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나를 위해 편안한 명상음악을 틀어줬고 간호사들이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 와 연결해 줬다.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걱정과는 달리 마취는 완벽했다. 비키니 라인에 절개를 하고 상복부에 있는 아기 머리를 밀어 아이를 꺼냈다. 아기가 나오는 그 순간은 정말 커다란 것이 쑥 나오는 느낌이라 시원하고 후련한 느낌이었다. 36주 6일, 하루 차이로 조산 판정을 받게 된 나와 아기. 걱정과 달리 우리 딸은 무척이나 우렁차게 울었다. 몸무게도 2.9kg. 생각보다 많이 컸었구나 너.
나는 그렇게 캐나다, 낯선 땅에서 아기를 출산하고 공식적으로 엄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