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는건 어려워
나는 어려서부터 게임을 즐겼다.
메이플스토리, 거상, 디아블로, 롤.
이름은 다르지만 나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언제나 만렙까지는 재미있었다는 것.
레벨업은 1에서 100까지 빠르다.
하지만 만렙 이후의 성장은 다르다.
0.01씩 오르는 수치, 체감되지 않는 변화.
그 지점부터 흥미가 사라졌다.
성장이 멈춘 순간, 나는 게임을 접었다.
새로운 직업을 키워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지 못했다.
이미 해본 것을 처음부터 반복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큰 에너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거 다 해봤던 건데, 왜 또 해야 하지?”
이 감정이
설마 일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2019년, 로스터리 카페를 시작했다.
합병이 있었고, 다시 분리되었고
지금은 또 다른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
그 사이 나는 조금씩 닳아 있었다.
일하는 시간보다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었고,
이것 조금, 저것 조금 손대다 보니
하루는 지나갔지만 완성된 것은 없었다.
마치 병렬 처리 같았다.
겉보기엔 동시에 많은 일을 하는데
과정 속에서 성과는 잘 보이지 않는 상태.
그래서 지금이 힘들다.
그러다 우연히 흑백요리사2를 보게 됐다.
모두가 욕하던 요리 괴물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 부러움을 느꼈다.
“할 일을 줘야 해.”
“30분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정해놓고 그냥 해야 돼.”
그 말들이 계속 남았다.
나는 지금
내가 얼마나 시간을 쓰고 있는지,
이 일이 얼마나 걸리는지,
완성되면 어떤 모습이 될지
아무것도 선명하지 않다.
모든 게 흐리다.
손종원 셰프가 타임 스케줄을 짜는 장면을 보며
확신이 들었다.
아, 이거다.
나는 지금
열심히 일해야 할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만들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여행 계획은 유난히 꼼꼼하게 세운다.
인생보다 더 진지하게.
그래서 지금의 나에게는
여행계획을 준비해줄 J가 필요하다.
타인의 J가 아니라
내가 J인 척이라도 해야 한다.
연기라도 하면서 따라가야
일이 앞으로 나간다.
그동안 나는
완성된 그림만 떠올렸다.
디자인, 패키지, 홍보 같은 외형적인 것들.
하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닌 것 같다.
지금 필요한 건
아주 내부적인 정리다.
원가표.
일일 생산일지.
월간 정산표.
화려하지 않지만
다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구간,
이 구간을 다시 한 번, 제대로 통과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