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다이어리

40' 드디어 내 인생 두번째 이야기

by 코스모스처럼

급정거 (어쩐지 잘나가더라)


큰딸이 중학교 3년 사춘기를 지내는 동안 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몇 번이나 탔는지 모른다. 다정하게 “영양제 머거어”라고 건네는 말에도 “아 왜 짜증 나게 말해”라는 답변이 돌아오는 억울함을 참아내는 게 사춘기 엄마의 몫. 사춘기의 정점을 찍을 무렵 인기 있었던 드라마 <펜트하우스>를 보면서 “엄마는 심수련 엄마처럼 예쁘게 좀 말하면 안 돼?”라고 화를 내고 방문을 쿵 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내게 들리는 소리는 “엄마는 - 안 돼”라는 딱 두 마디 줄임이었다.

‘그래 엄마는 안 되겠어. 아니 엄마도 더이상 못 해 먹겠다. 니 마음 대로 살아라.’

그 뒤로부터 그 아이에게 다가가기보다는 그냥 바라보는 육아를 택했다. 아이의 마음을 살피기에 앞서 내 마음이 먼저 편안하고 큰 그릇이 되어야 했기에, 서로 같은 말로 상처를 입는 남편과 위로를 건네면서 평일 퇴근 후에는 맛집에서 야식을 즐기고 토요일 수업이 마치면 교외로 나가 잦은 1박을 함께 했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는 저녁을 먹고 숙제나 놀이로 두 아이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면서 남편과 산책과 데이트를 자주 했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일찍 결혼해서 아이들 키우고 남들보다 빨리 독립시켜서 참 조오타. 그치?” 하면서 그 시간을 즐겨왔다. ‘그래, 사춘기 덕분에 자유다.’ 큰아이의 첫 사춘기 3년간 그렇게 함께 한 우리의 자유는 남들보다 빠르게 맞은 중년 부부의 시간이었고 그 시간을 돌이켜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련할 만큼 좋았다. 아마 그도 같은 마음으로 순간순간 나와의 데이트를 즐겼을 것이다. 비록 우리의 대화가 절반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 이야기, 절반은 힘들게 느껴지는 육아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함께 걸으며 젊은이들처럼 맞잡는 손, 아이들이 비집고 들어오지 않아서 바짝 붙어 앉은 벤치에서의 시간 그리고 와인 한잔을 곁들여 로맨틱하게 보내던 여행들이 신혼에도 누리지 못한 시간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그날은 무슨 일로 싸웠던 걸까. 좀처럼 다툼없이 지내다가도 한번 다툴 일이 생기면 예전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큰딸이 돌이 되던 때부터 시작된 우리의 각방살이가 15년째 이어지고 있었고 더욱이 방이 네 개나 되는 아파트에 이사 오고부터 우리 네 식구의 밤은 항상 각자의 방에서 보내는 혼족 생활이었다. 남편에게 “이제 우리 같은 방 써도 되잖아요?”하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그는 뜨끈한 바닥에 푹신한 매트를 깔고 읽고 싶은 책·보고 싶은 동영상을 마음껏 보다가 자는 게 좋다며 한사코 독립을 원했다. 저녁까지 이어지는 수업을 하고 와인 한 잔을 곁들인 데이트까지 마치면 나도 혼자 자는 게 썩 나쁘지 않은 평일이었다. 오케이.

그렇게 보내던 우리의 중년 일과 중 훅 싸움이 시작됐던 날, 나는 오랜만에 그의 핸드폰을 들고 “이 안에 도대체 뭐가 있길래 그렇게 혼자 놀이가 좋은지 한번 보자”라며 그의 전유물인 그것을 가져와 씩씩대고 있었다. 싸움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그때 그렇게 우연히 맞닥뜨린 상황은 우리 부부가 ‘계속, 함께 걸어가야 한다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이의 스톱워치 같은 순간. 그 순간이 내 40’ 성장 곡선의 중턱 즈음,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꽤 높은 봉우리 전망대를 만날 희망이 보이던 그 고개 즈음에서 딱 맞닥뜨려져 버렸다. 다시 시작된 아니 결혼 후에는 처음 가져보았던 개인적인 목표와 성장 앞에 멈춰버린 스톱워치. 그것은 그의 외도와 불륜. 미처 예상치 못했지만 늘 불안 속에 외면하고 있었던 흐릿한 망상 같은 현실. 그에게는 오래된 포르노 중독이 있었는데 신혼의 새벽부터 보아온 그의 뒷모습은 두 아이 임신과 산후조리 기간까지 이어졌고, 그가 간절히 원했던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외도는 여러 번 다양한 모습으로 조금씩 내게 보여져 왔다. 하지만 그를 의심하면서 그의 핸드폰 메시지에 촌각을 세우는 것이 내 마음을 더 병들게 하는 것만 같아서 신경끄기의 기술을 발휘한 지 오래였다. 어차피 불어올 바람이라면 낮과 밤이 무슨 의미겠는가. 나는 다시 찾은 나의 일이 좋았고 많이 큰 두 아이가 대견했으며 무엇보다, 오래도록 묶여 온 시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일상이 너무나 큰 평온이라 생각했다. 결혼 후 17년 만에 다시 찾은 신혼 같은 데이트와 여행들. 까맣게 내려앉은 어둠에 노란 조명 하나를 바라보며 마주 앉으면 언제나 그는 나를 향해 달콤한 눈빛과 미소를 보여주던 나날이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듯한 핸드폰 속 사진과 만남의 장소로 달려가고 있는 그의 통화 음성 기록들 그리고 데이트를 약속하는 그들의 메시지들 앞에 우리의 달콤한 데이트 장면이 겹쳐지지만 않았더라면, 차라리 당신과 내가 적을 이루고 냉기가 도는 시간 때문에 도망치듯 만났던 여인들이었다면, 이해하기가 더 쉬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열려버린 판도라의 상자가 내 인생과 두 아이의 인생마저 흔들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배신과 거짓 그리고 딸바보가 아닌 여자 바보로 살아온 그의 모습이 담긴 증거들이 우리를 흔드는 밤이었다. 입버릇처럼 이혼을 꿈꿀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 인생의 당혹스럽던 파도는 제법 잔잔해졌고 무엇보다 너무나 예쁘게 자란 두 아이가 늘 엄마가 심어준 판타지로 아빠를 다정스럽게 바라보고 안기는 소녀가 되어있었다. 내 인생은 나의 선택을 탓할 수 있었지만 두 딸은 선택으로 만난 부모도 환경도 아니지 않은가. 왜 하필 그 아이들에게. 이제는 자신의 꿈을 마주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큰딸과 한없이 착하고 해맑게 자라 주고 있는 둘째 딸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오랫동안 즐겼던 시간을 소리소문없이 청산해주었더라면 얼마나 고마웠을까.

철없는 엄마는 사고를 저질렀다. 결혼 17년을 이어오면서 내가 가장 그에게서 견디기 힘들었던 건 안과 밖이 다른 그의 미소였다. 착한 사람이지만 착하지 않은 날도 그는 늘 삼자와의 만남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정했고 그런 그의 포장 끈을 애써 풀지 않는 것이 내조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지나오는 것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고지식한 내가 견뎌내기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거짓과 위선’이었다. 때로는 하얀 거짓말이 필요하다지만 더이상은 싫었다. 그래서 부모의 아픔을 두 딸과 공유해버린 것이다. “너희에게는 선택권이 있어. 누구 따라갈래? 선택해.” 얼마나 차디찬 말이었던가. 얼음 칼에 베이듯 상처를 내고 나보다 더 큰 아픔과 쓰라림을 느끼게 했던 무지하고 이기적인 엄마였다. 큰딸은 자신의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며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고, 착한 둘째 딸은 방에서 혼자 눈물과 소리를 무수히 삼켰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안부를 묻고 엄마 옆에 있어 주었던 (아직은 사춘기가 오지 않은) 둘째였다. 그 아이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순간들이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 맘에 들어와 박힌 것으로 충분했던 아픔을 날 토닥이던 네가 가져간 건 아닌지. 순간순간 두렵고 죄스러운 마음만큼 미안하다.


이혼 서류는 꾸렸지만 제출하지 못했다. 양재동 서울가정법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내 도장을 만들어오겠다며 십여분 뒤에 나타난 그는, 도장을 찍고 완성한 봉투를 보여주면서 내리자고 말했다. 마침 그날은 금요일 그리고 5시. 불현듯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 이 시간 남이섬에 있었을 것이다. 사춘기 자녀를 바라보며 자주 출렁거리던 내 눈물과 마음을 강가에 투영해 보내며 자주 찾던 우리의 아지트에서 1박을 하기로 예약된 날이었다. 가고 싶었던 강가 통나무집. 어쩌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 것이며 나는 지금 멈출 수 있는 것일까. 속으로 삼키는 눈물을 밖으로 뱉어내는 순간 멈추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예상해 온 거짓과 배신. 오랫동안 삼켜온 양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한 눈물이었다.

‘일단 멈추자. 그냥 멈추자’

그때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단순히 자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리되지 않는 복잡함이 나를 더 단순하게 만들었고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결정 앞에 좀 더 신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냥 남이섬 가자. 남이섬 가요. 막차 타러”

불쑥 내 입에서 나온 말이 그를 적잖이 당황시켰겠지만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를 첫 걸음이 무거웠는지 그길로 그는 차를 돌렸고 우리는 마지막 배를 타고 남이섬에 들어갔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괜찮아. 이까짓 거. 그냥 용서해.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힘을 내.’

마지막 입항 배를 타고 밤 9시가 넘어서 컵라면 2개와 주전부리 몇 가지를 검은 봉지에 들고선 10시간쯤 머무른 후 아침 일찍 다시 돌아온 여행이었다. 지나와 생각해보면 그날 나의 금쪽이들은 어떻게 그 외로운 밤을 각자의 방에서 보냈을까, 가슴이 변치 않는 무게로 메어온다. 그해 겨울 큰아이는 동굴처럼 숨은 자신의 방에서 혼자 보냈다. 때론 흐느꼈고 때론 증오로 가득했다. 그 지독한 말을 공개적으로 꺼내놓은 엄마가 너무나 싫었을테고 아빠에 대해서는 나만큼 분노로 가득했다. 둘째 딸은 겉으로는 평범하게 유지되어 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내주었다. 자주 웃고 자주 안아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숨을 쉬고 다시 힘을 내었다. 남이섬을 다녀온 다음 주부터 매일 점심시간마다 (출근 전 30분이라도) 시간을 내어 남편의 회사 앞으로 갔다. 매일 정성스럽게 준비해 간 도시락과 비타민 그리고 잦은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물론 그도 어떤 날은 꽃으로 또 많은 날을 편지로 내게 사과를 보내왔다. ‘그래 노력하면 되지. 너와 나 그동안 너무 서로에게 무관심했잖아. 다시 알아보자 서로를. 그럼 잘 되겠지. 잘 살 수 있을 거야.’

그 후로 10개월간 우리는 결혼 기간과 연애 기간을 합쳐서 처음으로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나는 일과 자녀보다 그의 다정한 여자 친구 역할을 1순위로 생각했고 우리의 여행은 더 아름다운 명소로 계속 이어졌다.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이해하기로 마음먹는 시간이었다. 이미 사춘기 자녀를 그렇게 품고 있었기에 남편 하나쯤 더 품을 수 있는, 그런 엄마가 되기로 마음먹는 시간이었다. 주 6일 출근을 화목토로 줄이다가 토요일 수업은 휴직을 내고 그나마 재미로라도 이어오던 화목 출근도 마무리하는 날이었다. 그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있길 원했고 나도 열심히 달리던 성장 곡선의 언덕 즈음에서 쉬어가도 괜찮은 마음이었다. 모든 것을 0으로 맞추고 그에게로 더 다가가기로 작정했던 8월 30일. 10개월 만에 나는 다시 그의 사진 한장을 마주했다. 그와 누군가가 나눈 메시지 캡처. 그 창이 마지막 퇴근을 앞둔 직전에 아무렇지 않게 열었던 사진 클라우드에서 발견된 시점. 까만 점처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고 문질러 보는 사진. “내일 시간있어? 그럼 모레 볼까?” 여전히 다정하고 한없이 갈급한 듯한 그의 메시지였다. 자신이 그렇게 아끼는 딸들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언니뻘의 그녀들과 어떻게 남녀로 즐길수 있단 말인가. 어느 날인가 보게 된 그의 가방 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오만원권이 몇 장씩 있었지만 그를 향한 나의 믿음을 흔들고 싶진 않았다. 조이는 아픔을 동여매고 다시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던 10개월을 보내고 회사의 만류에도 굳이 핑계를 만들어 퇴사를 결정한 날 저녁, 그 까만 점의 순간은 내가 결코 원하지 않았으며 예측하지도 못한 시점이었다. 역시 한 번의 벼락은 없다. 수증기가 모이면 비와 눈이 되고 벼락과 천둥을 마주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인생 아닌가. 그날도 다시 우리 사이에 벼락은 때려졌고 적어도 두 번째 맞은 벼락 앞에서는 조금 더 냉정하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언제부터 다시 속았고 다시 무지했던가. 적어도 이번에는 가봐야 했다. 양재동 가정 법원 2층 서류 접수까지. 그가 만들어 둔 도장과 서류를 들고. 마지막 이별 앞에 밤새 담담히 써 내려간 편지 한 통을 들고. 그렇게 나는 다시 그와 양재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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