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드디어 내 인생 (맞지?)
워커홀릭
큰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다시 일을 시작해야지-오랫동안 마음먹고 있었다. 아니 사실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도 몇 번 기회가 있었지만, 분리불안을 극복하고 초등학생이 된 아이는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활동도 많은 알고 보니 자신만의 꿈을 품은 그런 아이였다. 아마 서울에서 초등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웬만한 활동들은 다 경험해 보았을 만치였다. 둘째가 언니의 초등 등교에 맞춰 어린이집 오전반에 등원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참 오랜만에 주어진 평일 오전 다섯 번의 자유시간 동안 여러 가지 배움을 시작했다. 사실 제일 먼저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은 신문에서 본 서울대 한국어교원 양성과정이었지만 그 당시 100만 원의 등록비가 나에겐 너무 큰 투자금이었기에 전공을 살려 ‘내 아이는 초등기간 동안 학원에 보내지 않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주일에 두 번 가는 초등 수학 지도사 과정을 등록하고, 꼭 배우고 싶었던 플루트반도 등록했다.
45만원이 되는 야마하 플루트를 선뜻 구매해 준 고마운 남편, 그도 나의 자유를 못내 기다렸나 보다. 결혼 후 처음 맛보는 자유로운 배움과 도전의 시간은 혼자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달콤함이었다. 다행히 공부를 시작하면서 교회에서 나에게 국어와 수학을 배우고 싶다고 신청해오는 아이들이 생겨났고, 수업에 이어서 매주 배운 내용을 교육 봉사로 가르쳐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큰아이는 자연스럽게 그 친구들과 함께 엄마표 수업을 하고 또 스스로 EBS로 공부하면서 초등 6년을 보냈고, 나는 그 덕에 자기 주도 학습과 사고력 수학 전도사로 열심히 큰 아이와 교회 친구들을 키웠다. 첫째 엄마로서 최선을 다한 공교육 6년이 지나고 바램 대로 큰아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비록 내 나이 십의자리 숫자가 2에서 4로 바뀌어 있었지만, 내 안에 있던 세상으로의 큰 용기를 담아 마흔의 첫 이력서를 넣었다. 초등 수학 강사.
대학교 때는 전공을 명함으로 바로 한 두 살 아래의 고3들을 가르쳤지만, 초등 아이를 키워낸 당당한 학부모로서의 내 전업주부 이력은 이제 초등 전담 교사가 맞춤옷이었다. 첫 시작은 서울대 앞에 있는 조그마한 보습 학원이었는데 하루 3시간을 근무하고 둘째 하교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수업이었다. 오밀조밀 모여있는 반에 여러 학년이 섞여 있어서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기 어려운 수업이었지만, 돌아볼 때마다 그곳에서의 한 달은 참 좋은 워밍업이 되어주었던 반드시 내게 필요했던 시작점이었다. 첫 학원에서의 우여곡절을 짧게 겪으면서 습득이 개인기인 나는 다시 시작한 내 직업의 방향성을 잡았고, 한 달 만에 다시 이름이 알려진 대형학원에 이력서를 넣었다. 마침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개원하는 학원에서 첫 시작을 든든히 맡아줄 여선생님을 구하는 공고가 났고, 내 나이와 전공 그리고 엄마로서의 이력이 원장님 내외를 사로잡았다. 지나고 보니 많이 늦었다고 생각하면서 노심초사 움츠러들 수 있었던 그 당시 갓 마흔을 넘긴 내 나이는 초등 전담 강사로서는 가장 선호하는 나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직 사회생활이 두려운 20대 선생님과 결혼은 했지만 아이 생각은 없는 30대 선생님들이 마주 대하기에는 요구사항이 많은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수업도 그보다 훨씬 더 금쪽이를 아끼는 부모님들을 마주 대해야 하는 시간도 너무나 큰 산이자 두려움인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아이 육아로 좌충우돌을 충분히 겪은 나로서는 그들의 시점들이 충분히 이해되는 마음의 방이 있었다. 전담 육아의 경험과 6년간의 교육 봉사 그리고 전공을 바탕으로 나는 수석 교사이자 초중고 수학의 가능성을 닦아줄 초등 경시·영재 담당 강사로 대형학원에서 수업을 시작한 지 한 달을 넘기면서 클래스마다 대기자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원 출근 전에 지원해 두었던 대학 수업에서도 일주일 차이로 연락이 닿아서 출강을 시작할 수 있는 행운도 찾아왔다.
“주 6일을 출근한다는 게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너 건강도 좋지 않은데. 우리 이제 몸조심해야 할 나이야.”
주위에서는 부러움 반. 예상치 못한 동네 친구를 주중에 잃게 되는 외로움 반을 섞어서 나를 걱정해 주었지만,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나하나 내게 주어진 시간마다 최선을 다했다.
생각해보면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라는 말처럼 큰아이 초등 6년 동안 초중등 교과 수학과 함께 사고력·영재 교구 수학 등 관련된 자격증 과정을 배우면서 계속해서 교육 봉사를 해왔던 시간이 마흔에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출근길을 수월하게 닦아준 것 같았다. 아이들이 대기를 걸고 학부모님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친구의 친구까지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time pay는 웬만한 오랜 경력자와 견줄 만큼 높아졌다. 목동에서도 마포에서도 대치동에서도 전담 교사로 같이 일하자는 콜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하는 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일타 강사란 (TV와 유투브에 출연하면서 연예인 못지않은 명성을 얻고 있는 몇몇 선생님들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일하는 울타리 안에서 일인자로 충분히 인정받는 사람이다. 무엇에든 순위를 매기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일(1)이란 숫자 뒤에 야구에서 안타수를 타격수로 나눈 백분율의 타율을 붙이고 두 자로 줄이면 일타가 된다. 야구장에서 마시는 치맥의 향이 더해지는 기분 좋은 일타(율)를 다른 영역으로도 확장해보면, 일타 작가도 일타 디자이너도 일타 대표도 마음껏 붙여갈 수 있는 요량일 것이다. 이 넓은 지구, 대한민국 혹은 서울 땅덩어리 말고 오롯이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그릿의 힘을 발휘하는 사람을 통용해서 칭할 수 있는 기분 좋은 말이 아닐까? 내가 받아들이기엔 그렇다.
“나가서 100만원이나 벌어올 수 있겠어?”
내심 의심쩍었던 아내가 자유 날개를 달고 바로 고공 행진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은 누군가와 만나는 자리마다 “그게 말이야, 우리 와이프가 00동 일타 강사라니까요”하며 싱거운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썩 나쁘지 않은 칭찬으로 들려왔다. 경단녀로 묶였던 몸이 세상에 풀어지면서 나는 그렇게 빠른 속도로 워커홀릭의 세상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것을 즐겼다. 때마침 큰아이에게는 부모와의 거리가 필요한 사춘기가 찾아왔고, 해가 지고 달님이 찾아오시기를 기다리는 게 고역 같은 날도 어디에서 회식을 즐기는지 연락도 닿지 않던 남편을 더 이상 외로움으로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퇴근길 동작대교 위로 날마다 달님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새로 맞은 내 2의 인생, 집으로 가는 퇴근길을 비추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오랜만에 즐기는 행복인지.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이 스스로 일타라 칭하며 자족하기에 충분한 하루하루였다. 한가지, 이제 막 열 살이 된 둘째가 아빠가 퇴근하는 시간까지 아파트 단지 놀이터를 배회하면서 동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제껏 해오던 내 몫을 남편에게 부탁하면서 이제는 그간 내가 해오던 가정 돌보기를 남편이 많이 자란 딸들에게 수월히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여름 한 달, 겨울 방학 두 달은 엄마가 다니는 학원에서 수학을 배우고 대학 수업도 데리고 다녀서인지 둘째는 수학 강사가 된 엄마를 다행히 자랑스러워했고 무엇보다 수학을 참 좋아해 주었다. “예리가 수학을 즐겨하는 게 엄마가 수학 선생님이라 그런가 봐요.” 일 년에 두 번 학부모 상담을 하는 날이면 목소리로 만나는 담임 선생님들께서는 매번 같은 말씀을 전해주셨다. 내 아이의 평일을 채워주지 못하는 엄마였지만 딸들은 다행히 건강한 독립심을 가진 아이들로 잘 자라 주었고 큰딸은 중학교, 둘째 딸은 초등 5·6학년 모두 교육청 수학 영재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만하면 일반적인 사교육 없이 나와 EBS 선생님이 협력해서 길러낸 두 딸을 걸고도 서울 3대 학원가 어디에도 당당하게 이력서를 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는 건 선배 엄마로서도 보여주고 싶은 의기양양한 자신감이었다. 이제 남은 건 몇 번 부름이 있었던 온라인 강사로 인터넷 강의를 등재하는 일이었는데 이 부분은 조금 더 꼼꼼하게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마침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잠시 접어두는 꿈이 되었다. 지나가다가 소똥 아니 용수철을 밟은 듯, 태어나서 처음 나이키 Air를 신었을 때 뭔가 두둥실 했던 기분을 업고 걸음걸이에 가속을 내던 때처럼 그렇게 다시 시작한 내 인생에 또다시 기분 좋은 속도감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무언가에 집중할 때 주어지는 속도-금리로 말하자면 복리 이자 같이 눈덩이처럼 굴러서 성장하는 어떤 느낌을 받을 때가 몇 번 있었다. 대학 동아리 활동 중에 여러 차례 그리고 첫 직장에서부터 결혼 전까지 이어졌던 기자로서의 성장, 그리고 미미한 가능성을 등에 업고 시작한 주부로서의 재취업을 이뤄낸 것은 아마 여러 가지 환경에서 후천적으로 길러진 그릿의 힘인 것 같았다. 나에게 돌아오는 기분 좋은 명예로움과 엄마가 아닌 오롯이 내 이름 석 자를 건 성취감. 무엇보다 오랫동안 “집에서 노니까 좋아?”라는 말로 출근길 인사를 툭 던지고 나가는 그 사람 뒤에 양손에 나를 붙잡고 실랑이를 시작하는 두 딸아이의 손이 있음을 돌아봐 주지 않는 남편의 이기적인 뒤통수를 향해 ‘나도 재능있거든!’이라고 마음껏 속으로 외쳐주면서 퇴근길에 우아한 걸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결혼 전에 동등한 명함을 내밀면서 서로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후로 참 오랜만에 되찾은 당당함이었다.
경단녀 뒤에는 대부분 ‘필연적 선택’이 붙을 때가 많은 것이 아직은 익숙한 한국 사회가 아닐까. 결혼과 함께 장손 며느리로서 빠른 출산과 시댁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나는, 체념한 듯 14년을 살아냈고 그래서 나의 30대는 블랙 처리되어 버린 것이 한 여자로서는 얼마나 슬펐는지 당신은 모른다. 지금의 시작이 조금 늦었더라도 어떻게든 나의 40대는 멋지고 아름다운 성취를 이뤄내고 싶었다. 가속의 윤활유에 불스원샷 한 통을 더하고선 출력을 높여 마음껏 한번 질주해 볼 요량이었다. 물론, 엄마로서도 아내로서도 나에겐 매일 멈추고 돌아보아야 할 일상이 있었다. 출근 전에는 아이들이 돌아와서 먹을 저녁을 준비하고 동그랗게 여기저기 벗겨진 옷 무더기를 정돈하고 햇볕에 널어두는 일은 당연한 내 몫이었다. 자주 늦어지는 엄마의 퇴근길을 기다렸다가 아이들이 일과를 쉽게 늘어놓고 내일의 필요를 이야기하고 싶은 곳도 점점 동성인 엄마에게 쏠리는 내가 받아들여야 할 당연함이었다. 여전한 무게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슬프기보다는 그래도 홀릭의 달콤함이 있는 기분 좋은 피로감일 뿐이었다. 나에겐 멋진 40대로가 있으니까. 뉴욕에 42번가가 괜히 기분 좋은 대로가 아니다. 마흔은 워커홀릭에 빠져들기에 얼마나 좋은 나이 아닌가. 츄릅. 나는 새삼 어른들이 “젊다 아직 니 젊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무슨 말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아 가는 매일을 채우고 있었다. 내일의 달빛에 마주해야 할 눈물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전까지-나의 워커홀릭은 캠핑카에 매달은 꼬마전구의 낭만, 크리스마스트리 전구 빛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추는 멜로디 인형의 몸짓, 꽤나 달콤하고 그럼직한 첫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