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를 들어와서 보컬로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키조정"이다. 아무리 좋은 곡을 부르기로 결정했어도 키가 본인의 영역대에 맞지 않으면 제대로 부를 수 없다. 약 3달 전인 밴드 초반 나는 어떤 곡의 키를 두키 올려달라고 했다. 원래 남자곡이지만 고음으로 유명한 그 곡은 원키로 부르기에는 맛이 나지 않았다. 유튜브에서 여성 밴드 커버를 찾아 단톡방에 올려서 바꿔달라고 했다. 밴드 멤버들은 연습해주었고, 그걸로 공연까지 마쳤다.
같은 곡으로 한번의 공연이 더 남아 있다. 첫번째 공연 때 나는 무리를 좀 느꼈지만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기에 그냥 계속 2키 올린 버전으로 하고 연습을 했다. 공연 전 첫번째 합주 때 나는 목이 찢기는 줄 알았다. 노래 부르는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목이 점점 헐어가는게 느껴졌고, 6번째에는 공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예전에도 느껴본 비슷한 느낌.
합주가 끝나고 집을 가는데 계속 고민을 했다. 바꿔달라고 해야하나?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염치 없지 않은가? 보컬인 내가 키를 위로 올려달라고 했고, 심지어 한번 공연까지 마친 곡이었다. 단체 연습까지는 약 23일이 남았고 지금 키를 바꿔달라고 하면 악기 멤버들 다시 다 연습을 해야했다. 하지만 목이 너무 아팠다. 목소리를 내는게 아플 지경이었다.
다음날 친구와 만났다. 카페에서 12시부터 만나서 6시까지 공부를 했다. 나는 물을 마시고 싶었다. 근데 카페에 있어서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음료는 너무 비쌌다. 알고보니까 물 따를 수 있는 곳 있더라 하... 어쨌든 공부를 다 하고 버거킹에서 친구에게 그 노래에 대한 고통을 이야기 했다. 친구는 내 첫 공연 영상을 봤다며 그 영상에서 내가 노래 부르다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겸연찮게 하하 웃었다. 친구는 나보고 키를 바꿔달라고 하라 했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걸 안지만 무섭다고...
집에 도착했다. 너무 피곤했다. 밖은 찜질방이나 다름 없다. 6시간을 카페에서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는 백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숙을 위해 버거킹을 치즈 버거 하나만 먹었다. 백숙이 나를 녹였다. 너무 조았다. 따뜻한 국물이 내 식도를 적셔주고 닭고기의 단백질이 나를 보충해줬다. 좀 편안해지고 내 방 바닥에 누웠다. 몸은 편안했지만 머리 뒤쪽에서는 "키 조정해달라고 보내야 해!" 라는 기운이 계속 올라왔다.
이번 한번만 참으면 되는거 아닐까? 이번만 참고 다음부터 키 조정하면 되잖아. 남들에게도 민폐고, 이상하다. 내가 올려달라고 한건데. 이번만 참고 다음부터 하는거야. 하지만 하려면 지금 하는게 맞는데. 혼자 생각하다 지피티를 켰다. 지피티한테 모든 상황을 알려줬다. 바꿔달라 해야겠는데 못하겠다고 다 말했다. 지피티는 냉정하게 말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중요한건 내가 하고 싶은 음악,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거라 했다. 그 후로 내리 10분을 계속 이야기했다. 지피티는 나에게 멘트 추천을 해주며 넌 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었다.
마음을 먹었다. 해야겠다. 디스코드를 열어 합주 채팅방 창을 켜놓고 지피티가 알려준 멘트를 살짝 다듬고 복붙했다. "눈 딱 감고, 호흡 한 번 하고, 복사-붙여넣기 하고, 전송 누르기. 생각은 여기까지! 이제 손가락 차례야." 지금 시간은 27분, 지피티한테 딱 3분 있다가 보내겠다고 했다. 그 3분 동안 계속 지피티한테 말을 걸었다. 30분이 되고 보내기를 눌렀다. 저 채팅이 보내진 채팅방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캡쳐를 하고 바로 닫아버렸다.
그리곤 지피티한테 캡처본을 보내며 자랑했다. 내가 항상 말하려다 참기만 한 적, 그 고리를 끊은거다. 이건 민폐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조율의 시작이다. 그렇게 말해줬다. 마음이 후련했다. 왠지 웃음도 났다. 합주가 재밌을거 같다, 다시 그 노래를 재밌게 부를 수 있을거다. 그 후로도 계속 지피티와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합주 멤버들은 알았다며 원키로 해주겠다고 했고 난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됐다. 참 잘한 결정이었다.
나에게 맞지 않는 걸 하면 너무 고통스럽다. 무섭고, 고문같다. 예전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이번만 버티면 담부터 바꾸자고, 그렇게 매주 결심하던 순간이 있었다. 다음주면 바꾸자, 잘못된걸 알면서도 그랬다. 지금은 나와 관련 없는 일이지만, 그때 나는 너무 오래 참았다.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나는 말할 수 있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왜 나는 말하지 못했을까.
경계 있는 사람이 되고 있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는 사람. 멋진 공연을 위해, 부르는게 무섭지 않는 합주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고쳐달라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거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