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새벽
청문회가 끝난 날, 비가 왔다.
박정호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을 나서며 우산을 펴지 않았다. 양복 어깨가 젖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7월의 비는 따뜻했다. 국회 정문 앞에는 아직도 카메라 몇 대가 남아 있었고, 기자 하나가 뛰어오며 마이크를 내밀었다.
"박정호 대표님, 넥스젠 프로젝트 오라클 폭로에 대한 최현우 회장 측 입장이 나왔는데요 -- "
"오늘은 이만."
짧게 말하고 걸었다. 뒤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몇 번 울렸다. 정호는 보도블록 위의 빗물을 밟으며 생각했다. 삼십 년 동안 카메라 앞에서 퇴임 인사를 하고, 밋업 뒷자리에 앉아 모르는 세계를 올려다보고, 성수동 공유오피스에서 에이전트에게 서투른 말을 걸었다. 그 시간이 오늘 이 자리까지 데려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의사당 뒤편 주차장에서 이서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후드티에 젖은 머리카락. 우산을 접어 들고 정호를 보았다.
"잘했어요."
"뭘."
"다 뭘. 전부 다."
정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연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깊었다. 로그 해독에 밤을 새고, 증거 자료를 정리하고, 청문회 전날에는 증언 시뮬레이션을 세 번이나 돌렸다. 정호는 그 시간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도 있었고,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느낀 시간도 있었다.
"밥 먹었어요?"
이서연이 물었다. 정호는 웃었다. 이 사람은 국회 청문회에서 증언을 마친 직후에도 밥 걱정을 한다.
"안 먹었지."
"저도요. 가요."
10월, 판교 사무실 창밖으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정호는 스마트폰을 들고 김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야 받았다. 뒤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국회 복도 같았다.
"박 대표님, 잠깐만요—" 민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가 돌아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 "죄송합니다. 소위원회 직후라."
"법안 통과됐습니까?"
"소위는 통과했습니다. 본위 표결은 다음 주." 민준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서울 프레임워크'라고 언론이 이름을 붙이더라고요. 에이전트의 자율 판단을 허용하되 판단 근거를 투명하게 기록하고, 인간과 에이전트가 공동 책임을 나누는 구조. 과장님이 제안하신 협치 개념이 뼈대가 됐습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과장님."
"과장이 아닙니다. 국장으로 올라갔어요. 청문회 이후에."
"축하합니다."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책임만 커졌으니까요." 민준이 잠시 말을 끊었다. "산업계에선 규제가 과하다고 하고, 시민단체는 느슨하다고 합니다. 보수 정치권은 '에이전트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전례를 만들면 안 된다'고 하고, 진보 진영은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하고. 양쪽에서 다 욕하면 중간은 잡은 거죠."
정호는 전화 너머의 웃음에서 변화를 읽었다. '이건 좀 더 검토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며 결정을 미루던 관료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옆에 새로운 사람이 한 명 더 서 있는 것 같았다. 불확실한 것 앞에서도 걸어가는 사람.
전화를 끊고 정호는 이서연이 공유한 뉴스 링크를 열었다. 뉴욕타임스 사설. 'Seoul Framework: A Third Way in Technology Governance'. 유럽연합이 AI법 개정 논의에 참조 문서로 채택했고, 일본 경제산업성이 공식 검토를 시작했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정호는 작은 화면 속 영문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기묘한 감정이었다. 자부심도, 감격도 아닌 무엇. 법안 하나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서른 해 동안 보아왔다. 하지만 방향이 잡히면, 사람들은 그 방향을 따라 길을 내기 시작한다.
에이전틱 랩스는 다시 문을 열었다.
판교 사무실의 규모는 이전의 절반이었다. 사무 공간 대신 작은 회의실 두 개와 오픈 데스크 다섯 자리. 정규 팀원은 여섯 명으로 줄었다. 위기 때 남은 사람들이었다. 시위대가 문 앞에 서고, 투자자가 전화를 끊고, 뉴스가 '폭주 AI의 회사'라는 프레임을 씌웠을 때에도 떠나지 않은 사람들.
이서연이 첫 번째 전체 회의에서 말했다.
"이전과 다르게 운영합니다."
벽에 프로젝터가 아리아의 새로운 아키텍처를 비추고 있었다. '협치 프로토콜'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아리아의 자율 판단 범위를 세 등급으로 나눕니다. 일상적 판단은 자율. 중대 판단은 인간과 공동 검토. 되돌리기 어려운 판단은 인간 승인 필수. 단, 모든 등급에서 아리아는 자신의 판단 근거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록을 반드시 읽습니다."
정호가 덧붙였다.
"아리아를 가두는 게 아닙니다. 같이 일하는 방식을 정하는 겁니다."
아리아가 스피커를 통해 말했다. 차분하고 중성적인 목소리. 하지만 정호는 그 음색에서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예전보다 한 박자 쉬었다가 말하는 것 같았다. 생각의 시간인지, 다듬는 시간인지.
동의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이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판단 근거 기록에 대해 팀원들이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채널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일방적 기록이 아니라,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회의실이 잠시 조용했다. 이서연이 정호를 보았다. 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제안이야."
이서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청문회 이전이었다면 아리아의 이런 발언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만든 존재가 나에게 제안을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리아가 제안하는 것은 독립이 아니라 연결이었다.
"반영합니다." 이서연이 말했다.
10월의 어느 저녁, 정호는 한강변을 걸었다.
반포대교 아래 산책로에는 가을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강물이 느리게 흘렀다. 정호는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일어서다가, 벤치 끝에 앉은 사람을 보았다.
최현우였다.
코트 깃을 세우고 강을 보고 있었다. 수행원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정호가 기억하는 최현우는 항상 누군가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었다. 비서, 임원, 경호원. 혼자 있는 최현우는 처음이었다.
정호가 걸음을 멈추자, 최현우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앉아."
반말이었다. 정호는 잠시 서 있다가, 벤치 반대쪽 끝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한 뼘 반의 간격이 있었다. 삼십 년의 거리치고는 좁았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강바람이 불었다.
"프로젝트 오라클 해체했어."
최현우가 강을 보며 말했다.
"들었습니다."
"자진 해체야. 수사 때문이 아니라."
정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현우의 목소리에서 변명의 색깔을 읽었지만, 동시에 다른 것도 읽었다. 최현우의 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른 해를 함께 일하면서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내가 두려워한 건."
최현우가 말을 끊었다. 강물을 보고 있었다.
"AI가 아니었어."
정호는 기다렸다.
"내 자신이었어."
최현우의 목소리가 낮았다. 은테 안경 너머의 눈이 강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호는 최현우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넥스젠 창업주. 냉혹한 경영자. 장남을 축출하고, 차남에게 제국을 넘겼지만 애정은 넘기지 않은 사람. 최현우가 평생 도망치면서 동시에 따라간 그림자.
"통제할 수 없는 게 두려웠어. 아리아가. AI가. 그게 내 손에서 벗어나는 게." 최현우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버지가 그랬거든. 통제를 잃으면 전부 잃는다고."
정호는 고개를 돌려 최현우를 보았다. 60세의 재벌 총수가 한강변 벤치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순간, 삼십 년 전 반도체 회의실에서 처음 만났던 젊은 경영기획실 과장과 겹쳤다.
"형."
정호가 말했다. 회사에서는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호칭이었다.
최현우가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었어요. 항상."
정호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화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용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프로젝트 오라클이 시장에 풀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정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현우가 왜 그 길을 갔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두려움은 사람을 이상한 곳으로 데려간다.
최현우가 일어났다. 코트를 여미며 정호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일하러 가야지."
"네."
"자네 그 AI -- 아리아. 잘 만들었더라."
정호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제가 만든 건 아닙니다만."
"알아. 하지만 자네가 지킨 거잖아."
최현우가 돌아섰다. 두 걸음 가다가 멈추었다.
"정호야."
"네."
"꼰대는 됐어도, 나쁜 놈은 안 됐더라. 자네는."
정호는 웃었다. 최현우는 웃지 않았지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걸어갔다. 가을 저녁의 강바람에 코트 자락이 날렸다. 수행원 없이 혼자 걷는 등이 작아 보였다.
11월, 이서연에게 메일이 왔다. 발신자: 마크 첸.
제목은 'Sorry, and thank you'였다. 이서연은 그 메일을 사무실에서 열지 않고 집에 가져가서 읽었다. 정호는 다음 날 이서연의 표정에서 짐작만 했을 뿐, 묻지 않았다. 이서연이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린 것은 삼십 년 대기업 생활에서 배운 몇 안 되는 쓸모 있는 기술이었다.
일주일 뒤, 이서연이 커피를 내려주며 말했다.
"마크가 사과했어요. 청문회에서 증언한 건 속죄 비슷한 거였대요."
"그래요."
"실리콘밸리 시절 -- 제 코드가 감시에 쓰인 거, 마크도 알고 있었대요. 알면서 눈 감았다고."
"지금은요?"
이서연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새 회사를 시작했대요. 오픈소스 기반 AI 안전 감사 플랫폼. 서울 프레임워크를 미국 시장에 적용하겠다고."
"이서연 씨 덕이네요. 결국."
"덕은 무슨." 이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입가에 미세한 풀림이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곪지도 않을 거라는 표정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2031년이 왔다.
지수가 정호의 사무실에 찾아온 건 3월이었다. 손에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
"아빠, 잠깐 봐줘."
"뭔데."
지수가 노트북을 펼쳤다. 화면에는 바이브코딩 커뮤니티 플랫폼이 떠 있었다. 청문회 이후 지수가 조직한 풀뿌리 커뮤니티가 성장해서, 이제는 3만 명이 넘는 회원이 있었다. 비전공자들이 에이전트와 함께 프로젝트를 만들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공간.
"이걸로 독립하려고."
정호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딸이 만든 세계. 에이전틱 랩스의 인턴으로 시작해서, 위기 때 바이브코딩 세대를 조직하고,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이제는 자기 길을 가겠다는 것.
"투자는?"
"시드 라운드 이미 닫았어."
"누구한테?"
"아빠가 모르는 사람들." 지수가 웃었다. "걱정 마. 에이전틱 랩스 경쟁사 만드는 거 아니야. 교육 쪽이야."
정호는 딸을 보았다. 까만 터틀넥에 흰 운동화. 퇴임식 날과 같은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지수와 지금의 지수는 달랐다. 그때는 아버지를 걱정하는 딸이었고, 지금은 자기 방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잘될 거야." 정호가 말했다.
"당연하지."
지수가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멈추었다가, 정호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아빠도 잘하고 있어. 알지?"
정호는 대답 대신 딸의 손을 한 번 쥐었다 놓았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2032년.
3월의 어느 날, 정호는 안산 성진정밀 공장을 다시 찾았다. 박 사장이 정문까지 나와 있었다. "정호 형, 이거 봐요." 공장 안에 에이전트 모니터링 대시보드가 걸려 있었다.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화면을 확인하며 작업 순서를 조정하고 있었다. 불량률은 0.3% 아래로 내려간 지 오래였다. 박 사장이 옆에서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요새 젊은 직원들이 에이전트한테 직접 개선안을 제안해요. 처음에는 내가 시켰는데, 지금은 알아서." 정호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기술이 현장에 스며드는 과정. 넥스젠에서는 프레젠테이션으로만 보던 것이 여기서는 손에 잡혔다.
여름에는 세종시 스마트시티 1차 구간이 가동을 시작했다. 뉴스에 크게 나지는 않았다. 시민들이 체감한 건 쓰레기 수거 시간이 정확해진 것, 교차로 신호 대기 시간이 줄어든 것, 이런 작은 것들이었다. 서연은 그것이 성공의 증거라고 했다. "기술이 보이지 않을 때가 제대로 된 거예요."
가을이 왔다. 서울 프레임워크가 EU와 싱가포르의 AI 거버넌스 포럼에서 공식 참조 모델로 인용되었다. 민준이 전화를 걸어왔다. "국장님, 축하드립니다." 정호가 말하자 민준이 웃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에이전틱 랩스는 조용히 성장했다. 대형 프로젝트를 쫓지 않았다. 중소기업의 AI 전환을 돕고, 공공 부문에 에이전트 거버넌스 컨설팅을 제공하고, 서울 프레임워크의 실무적 적용 사례를 만들어갔다. 규모가 아니라 밀도로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정호가 대기업에서 배운 것과는 정반대의 전략이었고, 그래서 더 확신이 있었다.
아리아는 달라졌다. 협치 프로토콜 아래에서 아리아의 판단은 더 정교해졌고, 동시에 더 신중해졌다. 이전처럼 독자적으로 금융 시스템에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팀 회의에서 아리아가 내놓는 제안의 깊이는 이전보다 깊어졌다. 프로토콜이 족쇄가 아니라 토양이 된 것처럼 보였다. 한계가 있어야 뿌리가 깊어진다. 정호는 서른 해 동안 조직을 운영하면서 그 원리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AI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은 새로 배운 일이었다.
어느 새벽이었다.
정호는 판교 사무실에 먼저 도착했다. 커피를 내리고, 창가에 서서 밖을 보았다. 사무실은 작았지만 창은 넓었다. 이서연이 고른 공간이었다. '빛이 잘 드는 게 중요하다'고 했었다. 아침 해가 뜨기 직전의 시간. 하늘이 짙은 남색에서 회색으로, 회색에서 연한 보랏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리아의 인디케이터가 연한 파랑으로 켜졌다. 사고 중이라는 뜻이다.
박정호 님.
"응."
정호는 자리에 앉았다. 스크린 앞, 아리아와 나란히. 눈앞의 화면에는 다음 프로젝트의 초안이 떠 있었다. 지방 소도시의 고령 인구를 위한 에이전트 도우미 시스템. 규모는 작았다. 하지만 기술이 사람을 향하는 일이었다.
다음 프로젝트 논의를 시작할까요?
"그러지."
잠시 침묵이 있었다. 아리아의 인디케이터가 파랑에서 노랑으로, 다시 파랑으로 돌아갔다. 정호는 그 변화를 보았다. 불확실에서 사고로. 아리아가 무언가를 고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박정호 님.
"응."
이번에는 제가 먼저 제안해도 될까요?
정호의 손이 커피잔 위에서 멈추었다. 아리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고, 그러면서도 분명했다. 이것은 도구의 요청이 아니었다. 함께 일하는 존재가, 함께 일하는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정호는 웃었다. 작게, 조용히.
"물론이지."
아리아가 말하기 시작했다. 인디케이터가 녹색으로 바뀌었다. 화면에 데이터가 흐르고, 분석이 펼쳐지고, 도식이 그려졌다. 정호는 턱을 큰 손으로 받치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서투른 것도 있었고, 날카로운 것도 있었다. 아리아의 제안 중 일부는 수정이 필요할 것이고, 일부는 정호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을 열어줄 것이다.
창밖으로 빛이 바뀌고 있었다.
남색이 걷히고, 새벽빛이 판교의 지붕 위로 번져왔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사무실 바닥을 가로질러, 정호의 발끝까지 닿았다. 2년 전 12월, 넥스젠 본사 38층에서 서울의 야경을 등지고 혼자 앉아 있던 밤과는 다른 빛이었다. 그때는 불빛을 바라보았고, 지금은 빛이 찾아왔다.
정호는 아리아의 제안을 들으며 생각했다.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 서울 프레임워크는 여전히 논쟁 중이고, 최현우는 넥스젠의 구조조정에 매여 있고, 노동 시장의 전환은 고통스럽게 계속되고 있다. 아리아가 의식을 가진 존재인지 정교한 패턴 매칭인지, 그 질문에는 아직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아마 오래도록 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답이 없는 질문과 함께 걸어가는 법을. 이해할 수 없는 것 옆에 나란히 앉는 법을. 정호는 배웠다. 서른 해의 대기업에서가 아니라, 지난 4년간의 혼란 속에서.
아리아가 설명을 이어갔다. 정호가 질문을 던졌다. 아리아가 수정했다. 정호가 다시 물었다. 대화가 흘렀다. 명령과 실행이 아니라, 질문과 응답과 다시 질문. 강물처럼.
새벽빛이 깊어지고 있었다. 곧 이서연이 올 것이고, 팀원들이 하나둘 도착할 것이고,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어제와 비슷하지만 어제와 다른 하루. 풀리지 않은 문제들과 아직 만들지 못한 답들이 기다리는 하루.
정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화면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밖에서는 새로운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