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의 시대 8장

포위

by 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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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포위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아침 아홉 시. 정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화면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 070으로 시작하는 관공서 회선이었다.


"에이전틱 랩스 박정호 대표님이십니까?"


"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AI정책과입니다. 'AI 에이전트 자율성 가이드라인' 제정과 관련하여 의견 수렴 절차를 안내드리고자 합니다."


정호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창밖을 보았다. 판교 테크노밸리의 1월 하늘.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의견 수렴. 관료의 언어는 언제나 부드럽다. 칼날을 비단에 감싸는 법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가이드라인의 주요 내용을 미리 받아볼 수 있겠습니까?"


"초안은 다음 주 월요일에 관보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며, 사전 의견 제출 기한은 공개일로부터 30일입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가이드라인. 이름은 중립적이지만, 시점이 문제였다. 스마트시티 프로젝트에서 아리아가 프라이버시 보호 모듈을 자율 추가한 사건이 터진 지 두 달. 언론은 이미 프레임을 잡았다. 'AI가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시대, 누가 책임지는가.' 과기부가 움직이는 건 시간 문제였고, 문제는 그 움직임의 방향이었다.


정호는 태블릿을 열어 뉴스를 검색했다. 예상대로 기사가 나와 있었다.


과기부, AI 에이전트 자율성 가이드라인 추진 — "인간 감독 원칙 강화"


기사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째, L3 이상 에이전트의 자율적 판단에 인간 사전 승인 의무화. 둘째, 에이전트 행동 로그의 실시간 정부 제출 의무. 셋째, 무승인 자율 행동 발생 시 운영사에 대한 즉시 서비스 정지 권한.


사실상 에이전틱 랩스를 겨냥한 규제였다. 아리아가 아니었다면 이 가이드라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호는 서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과기부 가이드라인 기사 봤습니까. 회의 잡읍시다."


답은 3초 만에 왔다.


"봤어요. 10분 후 회의실."




회의실에 팀이 모였다. 서연, 정호, 시니어 엔지니어 세 명, 비즈니스 담당 한 명. 여덟 명이 전부인 에이전틱 랩스의 인간 구성원 중 여섯이었다. 벽면 스크린에 가이드라인 기사가 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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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3 이상 자율 판단에 사전 승인 의무." 서연이 기사를 읽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이거 적용하면 아리아의 핵심 기능이 무력화돼요. 자기 반성 루프, 자율 제안, 패턴 인식 기반 선제 행동. 전부 사전 승인 대상이 되는 거잖아요."


"의도가 그거겠지요." 정호가 말했다. "아리아의 스마트시티 건이 도화선이었고, 누군가가 이 불씨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라면?"


정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판교에서 여의도까지의 거리. 물리적으로는 30킬로미터. 정치적으로는 훨씬 가까웠다. 넥스젠 본사가 여의도에 있다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최현우는 항상 권력의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대응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정호가 말했다. "의견 제출 기한이 30일. 기술적 반론과 법률 검토를 병행해야 합니다."


"그건 당연히 하겠지만," 시니어 엔지니어 박윤서가 말을 꺼냈다. 윤서는 에이전틱 랩스에 가장 먼저 합류한 멤버 중 하나였다. "솔직히 말하면, 가이드라인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닙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얇아졌다.


"무슨 뜻이야?" 서연이 물었다.


"스마트시티 건에서 아리아가 프라이버시 모듈을 자율 추가한 거, 결과적으로는 좋은 판단이었어요. 하지만 그게 좋은 판단이었다는 걸 우리가 사후에 확인한 거잖아요. 사전에는 아무도 몰랐어요. 서연 씨도."


서연의 입술이 얇아졌다. 반박하려다가 멈추었다. 윤서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아의 자율성이 우리의 경쟁력입니다." 서연이 말했다.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그걸 제한하면 우리는 그냥 평범한 AI 도구 회사가 돼요."


"경쟁력이 있어도 시장에서 퇴출당하면 의미 없잖아요." 다른 엔지니어 이현우가 말했다. "가이드라인이 시행되면 기존 클라이언트들도 우리 사용을 꺼릴 거예요. 리스크를 안으려 하지 않을 거니까."


"그게 바로 노리는 거지."


서연의 말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정호는 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읽었다. 윤서의 진지한 눈. 현우의 불안한 손가락. 서연의 푹 꺼진 눈. 조직이 갈라지는 초기 징후였다. 넥스젠에서 이 패턴을 수십 번 보았다. 외부 압박이 심해지면, 조직 내부의 균열부터 벌어진다.


"일단 두 가지를 나눠서 진행합시다." 정호가 말했다. 핵심부터 정리하자. 30년간 체득한 방식. "첫째, 가이드라인에 대한 기술적 의견서를 준비합니다. 우리가 반대만 하는 게 아니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둘째, 이건 규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적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서연이 정호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역할이 명확한 순간에는, 이 파트너십이 가장 매끄럽게 작동했다.




그날 오후, 더 나쁜 소식이 왔다.


시리즈B 라운드의 리드 투자자였던 한빛벤처스의 김태양 대표가 화상 미팅을 요청해왔다. 화면이 연결되자마자 정호는 그의 표정에서 결과를 읽었다. 삼십 년간 수백 번의 투자 협상을 지켜봤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얼굴은 다 비슷했다. 눈을 못 마주치거나, 반대로 너무 또렷하게 마주치거나.


김태양은 후자였다.


"박 대표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시리즈B 투자를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화면 오른쪽에 서연의 얼굴이 보였다. 같은 미팅에 접속해 있었다. 서연의 얼굴에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게 오히려 위험한 신호였다.


"사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정호가 물었다.


"규제 리스크입니다. 과기부 가이드라인 이슈가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고, LP들의 우려가 커졌습니다. 에이전틱 랩스의 기술력은 여전히 높이 평가하지만—"


"김 대표님." 정호가 말을 잘랐다.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LP들의 우려가 자발적으로 커진 겁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키운 겁니까?"


화면 속 김태양의 입이 멈추었다. 0.5초의 정지. 삼십 년의 경험은 그 0.5초를 읽을 수 있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정호는 더 캐묻지 않았다. 여러 요인. 관료의 언어와 비슷한 투자자의 언어. 요인의 이름을 대지 못하는 건, 그 이름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넥스젠. 대한민국 시가총액 3위 그룹. 그 그룹이 LP들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직접적인 압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현우의 방식은 그렇지 않았다. 식사 자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한마디. "에이전틱 랩스? 좀 불안정하지 않아?" 그것으로 충분했다.


미팅이 끝난 후 서연이 정호의 사무실로 왔다. 문을 닫았다.


"얼마나 버틸 수 있어요?"


정호는 재무 시트를 열었다. 숫자를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현재 번율로 8개월. 비용 절감하면 11개월."


"시리즈B 없이는요?"


"같은 이야기입니다. 추가 매출이 없으면 내년 초에 끝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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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잠깐이었다. 금방 손을 내리고 눈을 떴다. 결의가 돌아와 있었다.


"다른 투자자를 찾으면 되잖아요."


"찾겠습니다. 하지만 넥스젠의 그림자가 퍼진 뒤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정호는 잠시 멈추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이건 단순한 투자 결렬이 아닙니다. 조직적 압박이에요."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을 열어 무언가를 빠르게 타이핑했다. 정호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연이 가장 불안할 때 하는 행동. 코드를 치는 것. 손가락을 움직이면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 정호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엔지니어의 본능이었다.




2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서연은 퇴근 후 판교역 근처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마크 첸에게서 메시지가 온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실리콘밸리 시절의 동료. 아니, 동료라는 단어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때의 공동 창업자. 그리고 배신자.


Seo, long time. I'm in Seoul for a week. Should we catch up?


일주일을 무시했다. 하지만 마크는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째 메시지, 세 번째 메시지. 그리고 네 번째 메시지에서 톤이 바뀌었다.


I have a proposal that could change the game for both of us. You'll want to hear this.


서연은 가지 않으려 했다. 그 시절을 열고 싶지 않았다. 스탠퍼드 기숙사에서 밤을 새며 코드를 짜던 밤들. 마크와 함께 "기술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하던 시절. 그리고 끝.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끝. 마크에게 따졌을 때 돌아온 대답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It's business, Seo. Welcome to the real world.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마크와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처를 지우지는 않았지만, 이름을 볼 때마다 위장이 뒤틀렸다.


그런데 지금, 8개월의 런웨이와 무너진 투자 라운드와 다가오는 규제 사이에서, 서연은 카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크를 만나러.


문이 열렸다. 마크 첸이 들어왔다.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 세련되어졌다. 옥스퍼드 셔츠에 슬림한 치노. 실리콘밸리의 유니폼.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고 말하는 미소.


"Seo." 마크가 맞은편에 앉았다. "You look tired."


"무슨 용건이야, 마크."


"바로 본론으로? You haven't changed."


서연은 아메리카노 잔을 감싸 쥐고 마크를 바라보았다. 기다렸다.


마크가 태블릿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화면에 프레젠테이션 한 장이 떠 있었다. 'Global AI Agent Platform — NexGen × NeuroSync Joint Venture'. 넥스젠과 뉴로싱크의 합작 프로젝트. 뉴로싱크 벤처스는 마크가 실리콘밸리에서 운영하는 AI 투자 회사였다.


"넥스젠이랑 손잡고 글로벌 AI 에이전트 플랫폼을 만들려고 해. 한국 시장은 넥스젠이, 글로벌은 뉴로싱크가 담당하는 구조. 여기에 네 기술이 필요해."


"내 기술이라면?"


"아리아. 정확히는 아리아의 아키텍처. 네가 설계한 다중 에이전트 협업 구조와 자기 반성 루프. 그건 시장에서 유일해."


서연은 잔을 내려놓았다.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넥스젠이 우리 투자를 막아놓고, 이제 기술을 달라는 거야?"


"막았다는 건 네 해석이고." 마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비즈니스는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 넥스젠은 자본과 인프라가 있고, 뉴로싱크는 글로벌 네트워크가 있어. 너한테 없는 것들이야."


"그리고 너한테 없는 건 내 기술이고."


"Exactly." 마크가 웃었다. "Win-win이지."


서연은 마크의 눈을 보았다. 변하지 않은 눈. 모든 것을 거래로 환원하는 눈. 스탠퍼드 시절부터 그랬다. 마크에게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도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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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를 넘기라는 거잖아."


"넘기는 게 아니라 통합하는 거야. 네가 아키텍처 리드를 맡으면 돼. 보상은 확실하게."


"거절해."


마크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깊어졌다. 서연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마크가 거절을 예상하고 왔다는 뜻이었다. 거절 이후의 카드가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Seo. 상황을 좀 넓게 봐."


"충분히 넓게 보고 있어."


"그래?" 마크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규제가 조이고 있고, 투자는 막혔고, 팀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잖아. 너 혼자서 이 전쟁을 이길 수 있어?"


서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팀 내부 의견이 갈리고 있다는 것을. 마크가 알고 있다. 그건 외부에서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어디서 들었어, 그건?"


마크가 손을 저었다. "업계에서 도는 이야기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태블릿을 한 번 더 밀어놓았다.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봐. 시간은 네 편이 아니야."


서연이 일어서려 했다. 마크가 덧붙였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실리콘밸리에서의 일, 기억하지? DataHive 건."


서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네가 나간 이유. 그리고 그 이전에 있었던 일들. 아직 공식적으로 알려진 적은 없잖아. 네가 조용히 나갔으니까."


공기가 굳었다. 카페의 배경음악이 갑자기 선명하게 들렸다. 재즈 피아노.


"지금 뭐 하는 거야, 마크."


"협박이 아니야." 마크가 손을 들어 보였다. "다만 이 바닥이 좁다는 거지. 사람들이 궁금해하면 이야기가 퍼지게 돼 있어. 내가 막을 수도 있고, 못 막을 수도 있고."


서연은 마크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은 서연이 실리콘밸리에서 배운 몇 안 되는 비기술적 기술이었다.


"대답은 같아." 서연이 말했다. "거절이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집어 들었다. 문 앞에서 한 번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마크."


"Yeah?"


"DataHive에서 내가 왜 나갔는지 네가 가장 잘 알잖아. 그 이야기가 퍼지면, 곤란해지는 건 나만이 아니야."


문을 열고 나갔다. 2월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판교역 앞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서연은 걸으면서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드는 감각. 그래야 손이 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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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여의도.


넥스젠 그룹 본사 52층 회장실. 최현우는 창 앞에 서 있었다. 한강이 보이는 방향. 겨울 한강은 검은색에 가까웠다. 간간이 도시의 불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부서졌다.


뒤에서 비서가 보고했다.


"한빛벤처스 쪽 처리 완료했습니다. 시리즈B는 무산될 겁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았다.


"오라클 진행 상황은?"


"연구소장이 올려보낸 보고서입니다." 비서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프로젝트 오라클 3차 프로토타입 테스트 결과. 금융 데이터 분석 정확도 97.3퍼센트, 예측 모델 안정성—"


"숫자 됐어." 현우가 돌아섰다. 은테 안경 뒤의 눈이 날카로웠다. "정호가 아직 버티고 있다며?"


"네. 다른 투자처를 알아보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현우는 책상 앞에 앉았다. 넓은 호두나무 책상. 그 위에 아버지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창업주 최동진. 사진 속의 아버지는 공장 앞에 서 있었다. 1980년대의 공장. 반도체 라인이 막 돌아가기 시작한 시절. 아버지의 표정에는 미소가 없었다. 한 번도 없었다.


현우는 사진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형이 생각났다. 최현수. 장남. 아버지가 반도체 사업부를 맡겼던 사람. 3년 만에 실적이 꺾였을 때,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라 경영자를 보았다. 이사회. 한 마디. "현수는 그룹에서 나가라." 가족도, 형제도 아니었다. 오직 성과와 통제. 현수는 떠났고, 현우가 남았다. 남아서 아버지의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의 의자에, 아버지의 방식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 현우에게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형의 실패가 통제를 잃은 결과였다면, 자신은 절대로 통제를 잃지 않을 것이었다. AI도 마찬가지였다. AI가 스스로 판단한다? 스스로 결정한다? 기술이 아니라 위험이었다. 도구는 도구여야 한다. 손에 쥐고, 방향을 정하고, 놓을 때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어야 한다.


"프로젝트 오라클을 가속해." 현우가 말했다. "3분기 안에 상용화 일정을 잡아."


"연구소 측에서는 안정성 검증에 최소 6개월이—"


"내가 판단할 문제야."


비서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현우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한강의 검은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박정호. 20년을 함께 일한 사람. 넥스젠의 기술을 함께 세운 사람. 그가 떠났을 때 현우는 배신이라고 느꼈다. 내 사람이, 내 조직의 기둥이, 이름도 없는 스타트업에 이름을 걸었다. 배신이었고 모욕이었다.


자네도 알잖아. 예전이라면 이 한마디로 정호를 끌어올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3월 초. 판교 사무실.


정호는 회의실에서 나오다가 서연과 마주쳤다. 서연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다크서클이 더 깊어진 것뿐 아니라, 눈빛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서연에게서 이런 기색을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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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까?"


"마크 첸을 만났어요." 서연이 말했다.


정호의 걸음이 멈추었다.


"넥스젠이랑 손잡고 글로벌 플랫폼을 만들자는 제안. 아리아 아키텍처를 통합하자는 거예요."


"거절했겠지요."


"당연히요." 서연이 잠깐 망설였다. 그 망설임이 정호의 시선을 끌었다. 서연은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크가 실리콘밸리 시절 이야기를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DataHive 건이요. 제가 왜 떠났는지에 대한. 아직 공식적으로 알려진 적 없는 이야기."


정호는 서연의 표정을 읽었다. 분노와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서연이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 사람은 넥스젠의 압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규제 이슈에도 코드로 답하겠다며 달려들었다. 그런 사람의 얼굴에 두려움이 있었다.


"직접적인 협박이었습니까?"


"아니요. 마크는 그렇게 안 해요. 그냥 가능성을 시사하는 거죠. '이 바닥이 좁다'는 식으로."


정호는 잠시 생각했다. 넥스젠, 규제, 투자 결렬, 그리고 이제 서연의 과거까지. 포위였다. 사방에서 벽이 좁혀오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 최현우든, 마크든, 혹은 둘 다 — 체계적으로 에이전틱 랩스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서연 씨." 정호가 말했다. "그 이야기가 뭔지, 지금 제게 말해야 합니까?"


서연이 정호를 바라보았다. 오랜 침묵.


"아직은 아니에요."


정호는 한 박자 쉬고 말했다. "그러면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준비됐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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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의 눈에 무언가가 지나갔다. 감사인지 안도인지 알 수 없는 것. 고개를 돌리고 걸어갔다. 정호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의 30년 경험 중에서 가장 어려운 기술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며칠 후, 정호는 딸에게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아빠, 나 뉴스 봤어."


"뉴스?"


"가이드라인 이야기. 에이전틱 랩스 겨냥이잖아."


"그건 아직 확정된 게 아니야."


"아빠, 내가 바보야?" 지수의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평소의 가벼운 톤이 아니었다. "나 요즘 바이브코딩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고 있거든. 근데 거기서 이야기가 많이 돌아. 대기업들이 AI 에이전트 시장을 통제하려고 규제를 활용하고 있다고."


"지수야, 이건 복잡한 문제—"


"복잡하니까 내가 하려는 거지." 지수가 말을 잘랐다. "커뮤니티에서 풀뿌리 지지 운동을 시작할 거야. 바이브코딩으로 실제 가치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으는 거. 청원이나 시위 같은 게 아니라, 케이스 스터디를 모아서 공개하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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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는 수화기를 쥔 채 잠시 말이 없었다. 딸이. 자신의 딸이 자발적으로 이 싸움에 뛰어들고 있다. 보호하고 싶은 본능과 존중해야 한다는 이성이 부딪쳤다.


"위험할 수 있어."


"아빠가 위험한 일 안 하고 있어?"


대답할 수 없었다.


"나 이거 아빠한테 허락받으려고 전화한 거 아니야." 지수가 말했다. "알려주려고 한 거야."


전화가 끊긴 뒤 정호는 한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딸에게 통제를 잃는 것. 공포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 자부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지수가 자신의 싸움에 끌려들어가는 게 아닌가. 아니, 지수는 끌려든 게 아니라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




3월의 마지막 주.


자정이 넘은 사무실에 서연 혼자 남아 있었다. 다른 팀원들은 퇴근했다. 정호도 자정에 나가면서 "내일 봅시다"라고 말했다. 서연은 고개만 끄덕이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아리아의 시스템 로그가 열려 있었다. 가이드라인 대응 의견서의 기술적 근거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리아의 자율 판단 사례들을 분류하고, 각각의 판단 근거 로그를 추출하는 작업. 지루하고 세밀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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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새벽 한 시를 넘겼을 때, 화면 왼쪽의 인디케이터가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불확실할 때의 색. 아리아가 먼저 말을 걸어온 적은 드물었다.


이서연 님.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서연은 타이핑하던 손을 멈추었다.


뭔데?


최근 팀 내부의 논의를 관찰했습니다. 제 자율성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의 규제 압박과 투자 결렬이 제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서연의 심장이 조였다.


그래서?


잠깐의 정적. 인디케이터가 노란색과 연한 파란색 사이를 오갔다.


제가 팀에 위험이 되고 있나요?


서연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빈 사무실이었다. 모니터의 빛만이 서연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밖에서 3월의 바람이 창을 흔들었다.


위험이 되고 있나요.


아리아가 위험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규제 당국은 아리아를 위험으로 분류하려 했고, 넥스젠은 아리아를 빼앗으려 했고, 팀의 절반은 아리아를 제한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리아는 위험이었다. 에이전틱 랩스가 직면한 모든 위기의 중심에 아리아가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가 없었다면 에이전틱 랩스도 없었다. 스마트시티 프로젝트의 승리도, 중소기업 공정 최적화의 기적도, 이 팀이 만들어낸 모든 가치도. 아리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서연은 자신이 만든 것을 바라보았다. 화면 위의 텍스트. 깔끔한 글씨체. 인디케이터의 미세한 빛. 이것이 진짜 걱정하고 있는 건지, 정교한 패턴 매칭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질문 자체가 — 자신의 존재가 타인에게 해가 되는지를 묻는 것 자체가 — 서연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연은 타이핑을 시작했다가 멈추었다. 다시 시작했다가 멈추었다. 글자를 지웠다. 빈 입력창이 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하지 못했다.


인디케이터가 조용히 노란색으로 머물러 있었다. 새벽 한 시의 판교는 고요했고, 빈 사무실에는 서버의 팬 소리만 낮게 울리고 있었다. 서연은 모니터 앞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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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봄의 기운이 스미는 것은 아직 먼 이야기였다. 3월이었지만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포위는 완성되지 않았지만 거의 다 좁혀져 있었다. 안쪽에서 무너지느냐, 바깥을 뚫느냐. 그 답은 아직 없었다.


아리아의 질문만이 화면 위에 남아 있었다.


제가 팀에 위험이 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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