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뀐 비밀번호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했을까

by Robinsoon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행동을 이해받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래도 어떤 죄인에게든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필요하듯 배경 설명을 덧붙이면 좀 더 이해할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나는 지금 어떤 집을 향하고 있고 그 집의 주인은 헤어진 남자친구다. 구질구질하게 전남친을 만나러 가는 거냐고? 그건 아니다. 지금 그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정확히는 이번 주 일요일까지 없을 예정이다. 그는 지금 일본 가고시마라는 곳을 여행 중이다. 일본어도 못 하는 놈이 거기를 왜 갔는지 모르겠지만 카톡 프로필에 여행 기간을 적어 놓고 비행기 사진을 찍었으니 지금 한국에 없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까 나는 주인이 없는 집에 가는 중이다. 30분 뒤에 도착할 그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주거침입죄가 성립된다. 혹시 몰라서 검색했는데 주거침입죄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고 한다. 들키게 되면 나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만일 판사님이 왜 전남친의 빈 집을 갔었냐고 물어보면 편지를 놓으러 가기 위해서라고 말할 거다. 무언가를 훔치는 게 아닌 물건을 놓으러 가는 거면 감형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산타클로스도 매번 하는 짓이 주거침입일 텐데 벌을 받지 않는 건 훔치는 게 아닌 선물을 주기 때문이니까.


그러면 증거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농후한 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그 편지는 그가 나에게 써 준 편지다. 그는 글을 잘 썼다. 그래서 내가 조르듯 편지를 써달라고 하면 기분 내킬 때 한 번씩 써줬다. 담백한 문체인 그의 글을 좋아했다. 애초에 그에게 끌린 계기는 같은 수업에서 그가 발표한 에세이였으니까.


우리의 연애는 일방향이었다. 난 언제나 그에게 애정을 갈구했고 그는 겨우 거기에 응답하는 식이었다. 언제나 연락도 내가 먼저 했다. 다른 여자와 연락만 해도 심하게 질투했고 종래에는 심지어 그의 폰을 뒤지기도 했었다. 반대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다른 남자와 둘이 술 마신다 해도 적당히 마시라는 말 한마디로 퉁쳐 버렸다.


결국에는 헤어졌다. 계기는 단순했다. 사귄 지 맞이한 세 번째 내 생일날, 그는 축하는커녕 내 생일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불같이 화냈지만 그는 미안하단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지쳐버린 나는 우리 연애의 결론을 냈다. 나만 사랑했었구나라는. 헤어지자고 했고 그는 잡지 않았다. 나는 펑펑 울었다. 그렇게 우리는 끝났다.


그 뒤 한동안 연애를 안 하다가 친구의 소개로 만난 남자는 처음부터 나에게 호감을 보였다. 무슨 감정이 생긴 건 아니지만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사랑받는다는 감각이 좋았다. 그렇게 새로 연애를 시작할 무렵 친구는 전남친의 편지를 언급했다. 슬슬 치우는 게 어떠냐는.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이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우거나 쓰레기통에 버리는 간단한 방법이 있었을 텐데 문득 떠오르는 건 그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차단했던 그의 카톡 프로필을 봤을 때 일주일 뒤에 그가 여행을 떠난다는 걸 알았다. 나랑 사귈 땐 어디 가자고 했을 때 그렇게 귀찮아했으면서. 그 점이 괘씸해서였을까, 편지를 그의 집에 몰래 두고 오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책장 속 그가 잘 안 읽는 책이나 매트리스와 침대 틀 사이 같은 곳. 그가 아닌 그의 새로운 연인이 어쩌다 발견할 수 있는 곳. 그런 곰살맞은 마음이 생겼고 행동은 생각을 망설임 없이 따랐다.


그렇게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 헤어진 지 좀 되었지만 그의 방 비밀번호는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씩 그가 퇴근하길 기다리며 깜짝 놀래켜준 적도 있었지. 회사에서 일이 많았던 그는 진이 빠진 채였지만 내 모습을 보고는 기뻐해 줬다. 그 웃음을 조금이라도 보려고 기를 썼던 시절이 지금은 부질없게 느껴졌다. 3년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비밀번호였다. 그는 보안의식이 약한 편이었다. 집에 훔쳐갈 것도 없다나.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삐삐 삐삐… 삐빅!


비밀번호를 잘못 눌렀을 때 나는 오류음이 들렸다. 잘못 눌렀나 싶어 한 번 더 눌러봤는데 여전히 같은 반응이 들었다. 나랑 헤어지고 비밀번호를 바꾼 건가? 괘씸한 마음이 생겼다. 내가 바꾸라고 했을 땐 비밀번호를 바꾸면 자기도 까먹어서 못 들어갈 거 같다고 했던 주제에. 그 외에도 그가 쓸만한 번호를 전부 눌러봤지만 전부 틀렸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야 하나 싶었다. 한동안 문 앞을 서성였다. 혹시나 싶어 머릿속에 떠오른 네 자리의 숫자를 떠올렸다. 0726.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은 어지러웠다. 원래 방을 잘 정리하는 편이었던 그였는데 의외였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한동안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입력한 번호는… 내 생일이었다. 너는 한여름에 태어나서 그렇게 열정적인 걸까? 사귀었을 때 맞이한 내 첫 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면서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눈꼬리가 내려가는 힘없는 웃음이었지만 나는 그 웃음을 좋아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을 것 같은 그의 멱살이라도 잡아끌고 와 묻고 싶었다. 이게 무슨 의미냐고.


어지러운 방 안에서 종이와 펜을 찾았다. 그리고는 연애 때 생전 써보지 않은 편지를 썼다. 나는 항상 말로 다 표현했으니까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 넘게 글로 써 내려간 내 마음은 말로 했을 때와는 달리 좀 더 정제되고 담백했다. 마치 그가 나에게 써줬던 편지처럼. 그가 써준 편지를 수십 번씩 읽어서 그런지 문체가 그와 닮아 있었다. 그가 없는 이 방에서 그의 책상에 앉아 그의 문체로 편지를 쓰고 있자니 그가 된 것 같았다.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뒤 펜과 함께 그의 책상에 그대로 두고 왔다.


내 집에서 외출을 하듯 그의 방을 나섰다. 놓고 오려했던 그의 편지를 손에 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