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노래를 다른 곳에서 들었을 뿐인데

그녀의 손목에 문신

by Robinsoon

헤어지자는 그녀의 말은 카페 안의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어? 뭐라고?'라는 얼빠진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거의 잠을 못 잔 탓일까? 뿌연 시야에 비친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멍해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 이별의 말을 들었을 때 대처하는 최악의 반응이 아니었을까하생각이 들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그녀가 일어나면서 마지막으로 무언가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피로로 잠시 청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노랫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떠나간 곳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는 나의 시선은 왼쪽 손목에 가 있었다.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인 문신이다. 줄기와 이파리가 그려진 문신의 끝에는 꽃잎이 없었다. 꽃잎은 그녀의 오른쪽 손등에 그려져 있었다. 우리가 손을 맞잡을 때 문신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몸 여기저기에다 문신을 새겼다. 사귀면서 그 문신의 의미를 하나씩 알아가는 건 좋았지만 그녀가 1주년 기념으로 같이 문신을 새기자고 했을 때는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그녀의 단골 타투이스트에게 왼쪽 손목을 내밀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팠고 생각했던 것보다 잘 그려서 나중에는 퍽 맘에 들었던 문신이다. 지워지지 않는 문신 때문이었을까, 나는 우리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내 손목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카페의 노래는 어느새 다른 걸로 바뀌어 있었다. 아까 그 노래는 뭐였을까. 밝은 조명의 카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뭔가 옛날 느낌이 나는 멜로디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다 오늘까지 마감인 작업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정신없이 작업에 열중하다가 걸려온 전화에 억지로 끌려 나왔었다. 여기 있어 봤자 별 수 없다는 생각에 비운 커피 잔을 픽업대에 두고 카페를 나왔다.




그 뒤로 꽤 시간이 지났다.


여름이 지나고 가벼운 외투 정도는 입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근래에는 출퇴근보다는 집에서 하는 작업이 많아져서 면도도 안 한채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았다. 선인장처럼 쌓인 재떨이와 여기저기 흐트러진 옷가지와 서류더미들은 집을 훌륭한 돼지우리로 만들어줬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사귀던 때는 열심히 청소를 했던 것 같은데. 그녀는 깔끔한 내 방을 좋아했다. 담배도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피우지 않았다. 억지로 끊은 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냥 담배 생각이 안 났다.


헤어진 뒤 연락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녀 쪽에서도 연락은 없었다. 그냥 그녀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내가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졌던 계기는 분명했지만 과연 그것 때문만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언젠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린 표현하는 방식이 정말 달랐다. 마치 같은 사람이 말로 할 때와 글로 쓸 때가 다른 것처럼. 흐릿해진 마음과 달리 손목의 문신은 여전히 선명했다. 꽃잎이 없는 이파리와 줄기는 위화감이 들었지만 손목이란 부위는 의외로 다른 사람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괜찮을 듯싶었다. 원래 시간이 지나면 뭐든 익숙해지는 편이다. 그녀가 없는 시간도 이내 익숙해지겠지 싶었다.


헤어진 뒤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일상이었지만 묘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작업하던 중, 멍하니 있고 싶을 때 녹음했던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거였다. 연애했던 시절 그녀와 통화하면서 어느 날인가 녹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물어보자 기쁜 목소리로 언제든 하고 싶을 때 해도 된다고 했다. 그녀의 이름으로 저장된 플레이리스트에는 내 전화를 받아 기분 좋은 목소리, 왠지 모르게 침울했던 목소리, 출근길에 전화를 걸었을 때 들린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약간 허스키하지만 밝은 톤의 그녀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목소리에 담긴 내용은 별거 없는 일상이었지만 가사의 의미를 알 수 없는 프랑스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처럼 목소리만을 듣기 위해 틀었다.


담배가 떨어져 집 근처 편의점을 가기 위해 외투를 걸쳤다. 제일 가까운 편의점은 10분 정도 걸렸다. 가는 길에 기찻길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새벽 2시 편의점에는 아무도 없었고 점원은 내가 들어가도 폰질에 열중이었다. 맥주도 살까 둘러보다가 창가 쪽 가판대에 있는 여행잡지가 보였다. '지나간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장소, 가고시마'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다음 주부터 일주일 정도 시간이 나는데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블랑 맥주 한 캔을 들고 계산대로 갔다. 알바생은 내가 다가서자 귀찮다는 눈빛을 하며 이어폰을 귀에서 떼고 폰을 계산대 한켠에 올려놨다. 유튜브로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한글로 적힌 가수의 이름이 조금 특이했다. 외국 가수인가?


집으로 가는 길에도 역시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 다리를 건너려면 3-4분 정도로 딱 노래 한 곡을 다 들으면 다리가 끝난다. 가수의 이름을 검색했을 때 촌스러운 노래 제목 하나가 보였다. 무슨 90년대 발라드 제목 같았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다리를 건넜다. 다리 중간쯤 건넜을 때였나, 후렴구인 것 같은 멜로디가 익숙했다. 그 노래였다. 그 날 카페에서 들렸던 노래. 순간 다리 아래를 지나는 화물 기차 소리에 노랫소리가 먹혀 잘 들리지 않았다. 희미한 노랫소리 속에서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인 걸까? 내가 좋아했던 그 목소리가 단단한 결심을 한 뒤 건넸던 한 마디. 그 말을 건네기까지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가 했던 많은 말 중 나는 마지막에 했던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던 걸까.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멈추지 않는 눈물 때문에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난간을 붙잡고 주저 앉았다. 한동안 그 상태였다. 늦은 시간이라 다리 위에는 나 혼자였다. 함께했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주저앉아 있어도 그녀가 일으켜주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깨달은 건 지금 이 순간이었다. 그렇게 노랫소리와 기차 소리에 묻혀 나는 펑펑 울었다. 나이 먹은 남자 새끼가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말이다. 묵혀둔 감정은 오랜 버퍼링 뒤에 한꺼번에 몰려왔다. 한참을 울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캐리어를 들고 현관을 나서는데 문득 비밀번호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간 네 자리 번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비밀번호를 바꾸는 왼손을 바라보며 꽃이 그려진 그녀의 오른손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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