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obinsoon May 29. 2019
꼭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 아니 아이라고 해야 맞겠네.
그 아이는 쿨해 보이고 싶었어. 순정만화에서 자주 보던, 동년배의 아이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적당히 동경의 대상이 되는 남자 주인공 같은 위치에 서 있고 싶었어. 지금 보면 겉멋에 빠졌지.
그 아이는 반에서 키가 제일 컸고 공부도 제일 잘했어. 쿨해지기 좋은 조건이지. 하지만 머리는 까까머리에다가 생김새는 투박한 편이었어. 순정만화와는 거리가 멀었어. 당시 아이가 '카드캡터 체리'를 챙겨보던 건 친구들은 알지 못 했어. 반의 여자애들 사이에서 그 만화 얘기를 할 때 끼어들고 싶어 했던 건 지금 생각해보면 귀엽게 보이기도 하네.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에 나가 농구를 했고, 싸움도 제법 잘했어. 누구를 괴롭히거나 하진 않았어. 아이의 부모가 싸우는 건 괜찮아도 먼저 때리거나 괴롭히는 건 안 된다고 했거든. 그 아이도 그건 쿨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그렇지만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진 않았지. 그땐 애들 근력이 고만고만할 때라 싸움을 이기는데 제일 중요한 게 팔의 길이였고 아이는 키가 큰 만큼 팔도 길었거든.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인싸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반에서 주류긴 했지. 한 그룹 안에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애랑 제일 웃긴 애가 같이 있었으니까. 학교 생활은 재밌는 편이었어.
같은 반에는 키 순으로 그 애의 바로 앞인, 두 번째로 키가 큰 애가 있었어. 성이 임 씨였나 윤 씨였나 잘은 모르겠지만 'ㅇ'으로 시작하는 이름이었어. 이 씨는 아니었던 거 같아. 반에서 두 번째로 키가 크지만 뚱뚱한 편인 데다 조용하고 표정은 늘 어색하게 수줍어하는 것 같았지. 곰 같은 친구였어. 무척이나 순한 곰. 아이와 구별하기 위해 곰이라고 할게.
곰은 따돌림을 당했어. 반에서 잘 나가는 남자애들은 처음엔 동물원에 있는 아기곰에게 장난치듯 하던 정도였지. 하지만 곰은 전혀 저항하지 않았지. 때렸고, 욕하고, 물건을 빼앗았을 때도 말이야. 어쩌다가는 부모를 모욕하는 말을 했었어. 곰은 움츠러들 뿐이었어. 괴롭힘이 격해질수록 반의 다른 아이들은 곰을 멀리 했어. 같이 따돌림당할 것 같았거든. 실제로 누군가는 그런 걸 무시하고 다가갔다가 그렇게 될 뻔하기도 했고.
아이는 곰을 잘 몰랐어. 그냥 곰이 괴롭힘 당하기 전에 지우개를 빌릴 일이 있었는데 한 번도 안 쓴 새 지우개였거든? 곰은 그걸 망설이지 않고 빌려줬어. 보통은 새 걸 빌려줄 때는 망설이잖아. 하지만 곰은 수줍게 웃으면서 그냥 빌려줬어. 아이는 조심히 쓰고 돌려줬지. 그게 다야. 그 이후는 딱히 접점이 없었어. 지우개가 없는 날은 종종 있었지만 빌리러 가기엔 곰의 자리는 너무 멀었거든.
사실 아이는 2년 전쯤 돼지라고 불렸어. 키가 크기 전, 잠시 살이 불었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전학 온 지 얼마 안돼서 친구도 별로 없던 때였거든. 주위에선 아이를 돼지라 불렀고 곰이 당했던 것과 비슷하게 당했지. 하지만 아이는 이내 주동자를 찾아내서 싸웠고, 이겼어. 불었던 살은 2년 동안 전부 키로 가서 반에서 제일 커질 정도가 되었고. 아이는 생각했어. 곰도 싸우면 좋을 텐데. 그런데 곰은 그러지 못했어. 아이는 도와주지 않았어. 다시 돼지가 될까 두려웠거든.
몇 년 뒤 아이는 곰과 길 가다 만났지. 그때까지는 다른 중학교에 가서 볼 일이 없었거든. 아이는 좀 더 키가 컸지만 다른 아이들도 한창 클 때라 반에서 2, 3번째로 큰 정도였지. 그렇지만 곰은 키가 하나도 크지 않았어. 거기다가 살이 빠졌지. 표정은 어딘가 위축되어 있었어. 더 이상 곰이 아닌 그냥 아이 같았어. 지우개를 빌려줬을 때 보여준 수줍은 웃음은 더 이상 지을 수 없을 것 같았어. 아이는 그게 사실 큰 감흥은 되지 않았어. 말을 걸지도 않았어. 그런데 십 년이 넘어도 그 모습이 잊히지 않더라. 왜일까.
어찌 되었든 아이는 죽지 않고 어른이 되었어. 어른이라는 말을 그냥 아이에서 나이만 먹어 신체의 부피가 커진다는 관점으로 보자면 말이지. 하지만 어른이 된 아이는 때때로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면서 그때 한 번 죽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지. 그래야 다시 태어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야 조금 덜 비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다른 어른들 처럼 적당히 비겁하게 현실을 살아가고 있어. 어른은 비겁하지. 아이가 잔인한만큼. 그래서 나는 둘 다 싫어, 어른도 아이도.
갑자기 혼자 무슨 소리를 주절거리냐고? 그냥, 오늘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한 생각이야. 바보 같이 혼자 주절거렸네.
그런데 말이야, 죽이고 싶은 건 아이였을까? 아니면 돼지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