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binsoon Feb 15. 2021

새해는 이별과 함께

1월 월간 일기

2020년에서 2021년으로 넘어가기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을 때 '헤어져요!'라는 말을 들었고 기다렸다는 듯 1초의 여유도 주지 않고 '알았어!'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같이 사는 친구들(셰어 홈에 살고 있다)과 치킨을 시켰지만 연말이라 대부분 배달 불가인 와중에 그나마 가능한 업체에서 시켰음에도 두 번이나 취소당한 뒤에야 주문에 성공했다. 친구들에게는 바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일이 되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맥주 한 잔과 치킨 두 마리와 남자 셋이 모여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다가올 새해를 상상했다. 새해의 키워드를 물었을 때 나는 '연애'라고 했다. 여자친구가 있는 걸 알고 있는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어찌 되었든 해피 뉴 이어. 마스크와 함께 차분하게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다음 날에 친구가 혼자 운영하는 돈까스 집에서 밥을 먹으며  30대가 되어 한 살 더 먹은 소회를 나누고, 이제는 전여친이 된 사람과 함께 가기로 했던 전주의 친구 집으로 갔다. 친구는 여자친구와 함께 오면 해주려고 했던 훈제오리와 동파육, 그리고 토마토 계란 볶음을 해줬다. 가지고 간 와인과 그 집에 원래 있던 와인 두 병을 거의 혼자서 다 마시고 거실에 빔프로젝트를 틀어놓고 영화를 봤다. 그러다 거실 바닥에 엎어진 채로 잠들었다.


 2박 3일간 어디 나가지도 않고 빈둥거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그녀에게 언제 다시 전화할까 고민하다가 하루를 더 보냈다. 그동안 그녀가 빌려줬던 웹툰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잘 안 넘어가던 페이지가 중반부부터 탄력을 받아 한 호흡에 끝까지 읽혔다. 이야기의 감동에 잠시 빠져 있다 책상 의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무슨 말로 시작할지 고민하다가 30분 정도를 흘려보낸 뒤 전화했다. 전화한 구실은 빌려준 책의 감상을 얘기하고 싶어서, 뻔한 수작이었다. 두 시간 정도 통화했지만 헤어지자는 결론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진짜 이별이구나 싶었다.


 1월의 첫째 주는 '이대로 헤어져도 되나?'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새해의 계획이나 각오, 뭐 이런 것을 세울 생각은 안 하고 아직 작년에 머물러 있었다. 중간에 그녀에게 전화 한 번 했지만 '이제 전화하지 말아 달라'라는 메몰찬 말이 돌아왔다. 그 날 저녁 본 절절한 일본 멜로 영화 덕분인지 다음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 침대맡 창가의 유난히 맑았던 하늘 때문인지 이대로 헤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카톡이 오지도 않겠지만 각오를 다지기 위해 카톡에서 그녀를 차단했다.


 한동안 마음은 오락가락했다. 날씨에 좌우된 적이 많았는데 맑은 날에는 마음속에서 희망이 부풀어져 혼자가 된 뒤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리며 헤어지길 잘했다 싶다가도 구름 가득한 흐린 하늘 아래를 걷고 있으면 끊임없이 그녀가 떠올랐다. 특히 그녀에게 상처 받았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아무도 들리지 않게 틱 증상처럼 욕을 중얼거렸다. 마스크를 쓴 게 다행이다 싶었다. 상처 받았을 당시엔 인지 못 하다가 시간이 지난 후 복기하는 편이다. 언젠가 정신과 의사가 나오는 팟캐스트를 들었는데 자기도 심한 감정 변동이 이어질 때면 자가 처방해서 약을 먹는다는 얘기를 한 적 있었다. 조만간 진료를  번 받아볼까 생각했다.


 소비가 늘었다. 태블릿 PC와 스마트 워치를 샀다. 어쩌다 목돈이 생긴 것도 있지만 연애하면서 있던 고정지출이 사라진 것도 있을게다. 태블릿 PC를 사면서 이벤트 가격으로 저렴하게 갤럭시 버즈 라이브를 샀는데 나는 이미 에어팟이 있었다. 미포장 상태로 그냥 당근 마켓에 팔아버릴까 싶었다.  만일 지금도 사귀고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줬을 텐데,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매일 두 시간 넘게 통화할 때 그녀는 스피커 폰이나 목에 거는 구형 블루투스 이어폰을 썼다. '언젠가 괜찮은 무선 이어폰을 사주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 이제 그녀에게 무언가 줄 일은 사라졌다. 헤어진 연인에게 주기엔 너무 과한 선물이다. 상대에게나 나에게나. 그렇게 가끔씩 그녀에 관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아마 한동안은 그러겠지 싶었다.


 하지만 좀 더 생각을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벌써 세 번째 이별 편지다. 진심을 담아 쓰는 편지에 대해 얘기한 사람이 있었다. 내 첫 번째 편지의 수신인이었다. 답장을 받길 기대했지만 결국 받지 못해 그대로 이별 편지가 되었다. 그러나 편지를 쓰는 것 자체는 마음 정리에 꽤나 도움이 되어서 그 이후에도 계속 쓰게 되었다. 그게 벌써 세 번째가 되었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의 이별 편지를 쓸 것인가.


  편지에는 좋았던 부분, 별로였던 부분을 비슷하게 담았다. 담백한 어조로. 지난 편지는 마지막을 좋게 끝내고 싶어서 좋은 내용만을 담았는데 이번엔 진솔하게 쓰고 싶었다. 연애할 때 그녀는 불현듯 생각난 듯 이런 점이 좋다고 말했고 싸울 때는 이런 점이 별로다라고 구체적으로 말했다. 예를 들면 '종업원을 대하는 태도가 좋아요' 뭐 이런 거. 처음엔 그저 그런가 하며 듣다가 좋다는 말에 매달리고 싫다는 말을 두려워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 자존감의 유무가 상대에게 달렸다는 건 밸런스가 무너졌다는 징후다.


 이별의 표면적인 이유는 작년 마지막 날 들었던 '헤어져요'와 거기에 답했던 '알았다' 였지만 사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게 이유였다.


 아마 내일 당장 죽는다면 연애를 많이 못한 것, 괜찮은 영화를 더 못 찾아낸 것, 첫사랑에게 편지를 못 보낸 것, 뉴욕 여행을 못한 것 등 많은 후회가 밀려오겠지만 그중 제일은 괜찮은 글을 써내지 못한 것 일 것이다. 나의 진심이 담기고 그 진심이 누군가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글 말이다.


 글을 꾸준히 써내기 위해서는 밸런스가 필요하다. 그 밸런스를 위해서는 차분한 자존감이 갖춰져야 되는데 연애를 하게 되면 자존감의 변동이 심하다. 사랑받는다 느낄 때는 마음을 가득 채울 듯 자존감이 넘쳐나고 그렇지 않다 느낄 땐 바닥을 긴다.  다 글을 쓰기엔 적절치 않은 상태다 밸런스를 기 위해서는 간헐적으로 심리적인 고립 상태가 필요한데 연애, 특히 초반에는 그러기가 힘들다. 그렇게 무너진 밸런스는 관계에 영향을 준다. 지난번 연애도 비슷한 이유로 헤어졌는데 이번에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연애가 한창 즐거운 삼십 대에게 꽤 심각한 문제다. 애를 하면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방법, 다음 연애의 과제.


 연애가 끝났으니 글을 못 쓰는 핑계도 사라졌건만 새로 산 태블릿 피씨에 무선 키보드라는 고사양 환경 앞에서도 글 써지지 않았다. 무언가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지금의 나는 무색무취한 편이라 의미란 게 보이지 다.


 의미를 찾기보다 그저 있었던 것들, 생각했던 것들을 나열하듯 쓰는 것부터 시작하자. 영하 5도의 오후 다섯 시쯤, 맑은 하늘 아래를 한 시간 동안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Cigarette After Sex의 노래를 들으면서 걸었다. 맑은 하늘의 햇살이 걷고 있는 천변 너머의 벽돌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그저 평이한 건물들의 나열이 햇볕의 색감으로 찬란해진다.



 눈 앞에 마주하는 것들과 떠오르는 생각을 나열하듯 써보자.


 그래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일을 선물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