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같은 그들의 대화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by Robinsoon


※ 영화 전반부의 스토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2. 05. 26 기준 관람객: 19,903명


하마구치 류스케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세 시간의 러닝 타임 동안 묵직한 감동을 남겼다면 <우연과 상상>은 40분짜리 단편 3부작으로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더군다나 그 몰입감을 극적 연출이 아닌 정적인 카메라 워크 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만으로 끌어낸다는 게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이다.


어떻게 대화만으로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싶으면 이런 식이다.


메이코(후루카와 고토네)와 츠구미(현리)는 베프라고 할 정도로 친한 친구 사이다. 영화는 택시에서 나누는 둘의 대화로 시작한다. 츠구미는 메이코에게 지난밤에 일어난 마법 같은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에서 만난 어떤 남자 이야기인데, 츠구미와 그는 처음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대화만으로 15시간을 함께 했다. 함께한 시간의 분위기는 더없이 자연스러웠으며 이성 관계에 보수적인 편인 츠구미는 처음 만난 남자와 섹스를 하지 않지만 그 남자와는 그대로 끝까지 가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바람난 전 여자친구 때문에 새로운 연애를 망설이는 남자는 다음에 만났을 때 이 감정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때 제대로 된 교제를 시작하자고 말한다.
영화는 일종의 구전동화처럼 회상씬 없이 츠구미와 메이코가 하는 대화만을 보여준다. 여기까지는 연애담을 공유하는 흔한 여자들의 대화와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츠구미가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간 뒤 메이코는 집으로 가지 않고 기사에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고 한다, 굳은 표정으로. 그리고 츠구미가 말했던 남자를 만난다. 그렇다, 메이코는 그가 말했던 바람난 전 여자친구다. 그리고 비꼬는 말투로 말한다.


어제 마법 같은 시간을 보냈다면서?


영화는 이때부터 대화 위주의 연출에 지루해하며 고개를 뒤로 젖힌 관객을 확 끌어당긴다. 그때부터 이루어지는 대화는 관객을 미친 듯이 몰입하게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뿐만 아니라 두 번째랑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역시 대화 위주의 연출이지만 특정 포인트를 기점으로 관객에게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1부, <마법(보다 불확실한 것)>


단순히 기교로서 반전을 활용하는 정도라면 몰입감이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나누는 대화에 담긴 강렬한 메시지다. 번째 에피소드에서 메이코는 자신의 제일 가까운 친구가 운명의 상대라고 느낀 사람이 전 남자친구임을 알게 되면서 다시 한 번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말처럼 내 옆에 있을 때는 매력이 없어 보이던 남자친구가 '남의 떡'이 되어버리니 눈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심리를 날 것 그대로 남자에게 드러낸다. 아무 관심 없던 네가 누군가의 운명의 상대가 되니 관심이 생겼다고. 메이코와 츠구미가 나누는 대화에서 공감과 대화에 기름칠하는 적절한 리액션이 어우러지는 사근사근한 클래식에 가까웠다면(물론 2회 차 관람 때 츠구미와 대화 중인 메이코 표정을 보면 조금씩 미세하게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메이코와 그 남자(카즈키)의 대화는 험악함과 감정의 날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하드락이 된다.


2부, <문은 열어둔 채로>


영화의 몰입감은 독특한 액자식 구성으로 가능해진다. 택시의 뒷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관객은 카즈키와 츠구미의 어젯밤의 독특한 경험을 메이코의 시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야기 속 허구의 존재 같던 카즈키는 메이코가 찾아감으로써 눈앞에 나타난다. 이때까지 츠구미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로서 메이코의 시점과 공명하던 관객은 마치 이야기 속에 본인이 들어간 것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둘은 아무도 없는 카즈키의 사무실을 무대로 컴퓨터와 의자만이 있는 빈 자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감정의 날것을 쏟아낸다. 택시의 뒷자리에 불과했던 한정적인 장소는 사무실로 넓혀지니 마치 커다란 연극무대가 된듯한 느낌이 든다. 미세한 구성의 변화지만 이 작은 변화가 관객을 빨아들인다.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 특징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독특한 대사 암기 방식에서 기인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배우에게 대사를 외우지 않고 리딩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과 같이 읽으면서 외우게 한다. 이 때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국어책을 읽듯 대사의 의미를 하나씩 되새기면서 자연스럽게 암기하게 된다. 그렇기에 배우는 자신의 대사만을 암기하는 게 아닌 다른 배우와의 대사와 공명하는 자신의 대사를 익힐 수 있다. 이는 비슷한 시기의 작품인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연극배우들이 대사를 암기하는 장면에서 세세하게 구현되었다.


3부, <다시 한 번>


대사 암기 과정부터 리딩을 통해 같이 익힌 그들의 대사는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대사간의 공명을 일으킨다. 온전히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이를 소화하고 받아치듯 내뱉는 그들의 말들은 대사가 아닌 실생활 속 그들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카메라는 그럴 때마다 한 번씩 배우의 얼굴을 정면샷으로 촬영하여 그들이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 느껴지게 한다.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젊은 천재가 아닌 이미 거장의 반열에 다다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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