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한 쓰레기

<우리도 모르는 사이>, 신지우

by Robinsoon

나는 이성에게 호감을 표현할 때,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주의사항을 언급한다. '나는 너에게 호감이 있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부분이 별로다. 이런 나를 좋아해 줄 수 있니?' 식의 표현이다. 친구들은 굳이 별로인 점을 스스로 언급할 필요가 있나?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함 있는 제품을 판매하는 비양심적인 영업사원이 된 기분이 든다. 물론 제품의 결함을 제일 먼저 언급하는 영업사원의 실적이 좋을 리 없다. 이 습관이 좋아하는 이성과 연애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기에 고치려고 시도는 해봤지만 입 밖에 나오는 말이 통제가 안 된다.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더욱 나의 결점을 드러낸다. 백신을 주사하듯 말이다. 이토록 멋진 사람은 나라는 결함품을 멀리해야 한다는 양가 심리 같은 걸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으로 나를 포장하는 걸 못 한다. 이건 굳이 이성관계에 한정되는 게 아닌 인간관계 전반에 적용된다. 글로 나를 표현해왔지만 그럴듯한 말로 어설프게 포장하는 걸 싫어한다. 특히나 알맹이 없이 뭔가 있어 보이는 말 같은 거 말이다.


"작가님 좋아할 뻔했네."
"좋아하는 건 지현 님 마음이죠. 지현 님 마음을 잘 지켜보세요. 그냥 지나가는 마음일 수도 있잖아요."



작년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서 주인공인 지현(류이재)은 여자친구가 있는 건영(김다솔)에게 가정형의 고백을 한다. 여자친구가 있는지 모르고 호감을 품었던 그녀는 사진작가인 건영의 작업실에서 진행된 연말 파티에서 뒤늦게 그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의 가정형 고백은 호감을 전달하고픈 마음과, 연인이 있는 남자이기에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망설임이 뒤섞여 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여자친구가 있는 건영의 대답은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정도의 정중한 거절이 적당하다.


하지만 건영은 여지를 둔다. 적당히 그럴듯한 말로.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오래된 골목길과 뒤편에 지나가는 열차는 적당히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그의 말을 포장해준다. 하지만 말의 의도는 그저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가 자신에게 호감 있는 여자를 거절하지 않고 '키핑'한 것뿐이다.


"저는 다음에 사랑을 하게 되면 깊은 바닷속에 있는 사랑을 하고 싶어요. 파도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사랑이요."


프로필 촬영을 마치고 작업실에서 차 한 잔 하면서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건영이 지현에게 하는 말이다. 이때의 지현은 건영이 여자친구가 있는 걸 몰랐다. '다음'이라는 표현에는 어렴풋이 지금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볼 수 있지만 모호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틀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자에게는 이 말이 고백처럼 들릴 수 있다. 건영의 표현은 영화 내내 이런 식이다. 파도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흔들리는 파도에서 느끼는 긴장감 역시 즐기는 것 같다.


배려처럼 보이는 그의 말이 오래 사귄 여자친구와의 익숙함과 새로운 이성에서 느끼는 설렘을 동시에 품으려는 이기심이라는 걸 이 독립영화는 40분이라는 시간을 들여 보여준다. 지현의 시점으로 진행되기에 이야기에서 건영의 내면은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그의 이기심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주요 소재로 활용된다. 배우인 지현과 사진작가인 건영이 프로필 사진을 촬영하면서 시작한 둘의 관계에서 카메라는 줄곧 건영의 손에 있다. 맨 눈으로 누군가를 빤히 바라보면 시선의 부담을 주지만 렌즈를 통해 상대방을 바라보면 보이는 쪽의 부담은 덜 하고 카메라를 쥔 사람은 시선의 자유를 얻는다. 그렇게 얻은 시선의 자유로 건영은 자신을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렌즈를 통해 자세히 들여다본다. 반면 피사체인 지현은 그를 직접적으로 볼 수 없어 답답함을 느낀다.



그가 습관적으로 다른 여자에게 집적거리는 행동을 한다는 걸 알게 되고 그가 찍은 여자친구 사진을 본 뒤에야 지현은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렇기에 같이 나간 야외 촬영에서 건영의 카메라를 빌린 뒤 그의 모습을 렌즈를 통해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바닥에 던져버린다. 이전까지 자신이 품은 호감에 대한 배려로 보였던 그의 마음이 이기심이었단 걸 깨달은 순간이다.


작업실을 같이 사용하는 수민의 말처럼 '흘리고 다니는' 건영의 태도는 보는 이에 따라 문제성 여부가 다를 수 있다. 건영이 했던 행동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프로필 사진 촬영 중 지현에게 다가가 앞머리를 다듬어 준다
이틀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현을 (작업실 친구들과 진행하는) 연말 파티에 초대한다. 괄호 안에 내용은 미리 언급하지 않았다.
사진기 조작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카메라를 잡은 지현의 손을 잡는다.
자주 카톡을 보낸다. 카톡 내용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의도적 연출로 보이는 이러한 애매함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각자가 재판관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하게 만들었다. 마치 최근 유행하는 '깻잎 논쟁'에 서사를 부여해 구체적인 이야기로 만든 느낌이다.



한 다리 건너 한 명쯤 있는 흔한 쓰레기의 행적을 다룬 이 영화를 1년 전에 전주영화제에서 본 뒤 스트리밍 서비스와 유튜브에 뜨지 않을까 자주 검색했던 건 호감을 주고받는 남녀의 섬세한 내면 표현뿐 아니라 영화 전반에 흐르는 색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된 골목길의 가로등 불빛이나 건영의 작업실(상수나 망원동에 있을 법한 오래된 저택을 개조한 형태다) 테이블의 주황색 전등처럼 영화는 빛을 영리하게 사용하면서 독립영화가 흔히 보여주는 이미지의 단촐함을 극복한다.


주인공인 지현을 연기한 류이재 배우는 동시에 이 영화의 감독이기도 하다. 특이하게 감독일 때는 신지우라는 예명을 쓴다.




여자친구가 있는 건영을 좋아하는 지현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여자친구의 익숙함과 새롭게 다가오는 이성에게 느끼는 설렘을 동시에 느끼고자 하는 건영의 이기심 역시 공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호감을 받지도, 거절하지도 않은 채 잡아두기 위해 적당히 포장한 그의 말은 용납할 수 없다.


※ 독립영화지만 티빙, 웨이브, 시리즈온에서 감상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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