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말고 이모님

30년간 그곳에서 변함 없이

by Robinsoon

대학 시절 노포에서 나이 드신 아주머니 혹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에 가면 친근하게 이모~나 어머님~ 이라고 곧잘 부르던 친구들 사이에서 왜 그런지 나는 '이모'라는 호칭이 어색했다. 이모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없던 탓일까? 어머니는 대학 입학을 위해 홀로 상경을 하는 나에게 명동 성당에서 수녀로 지내는 배다른 언니 이야기를 하면서 연락처를 넘겨주었다. 연락처는 저장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알게 된 '이모'였던 탓이다. 수녀인 이모에게 속세의 20년 넘게 교류가 없었던 조카가 서울에 왔다고 연락하면 난감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런 인과관계는 작위적일 수 있다. 그냥 이모라는 말이 입에 안 붙는 것일 수도 있으니. 가족이 아닌 분께 어머님이나 이모라고 부르는 게 어색했다. 그러나 스무 살쯤의 꼬맹이들이 그렇듯 남들 다 하는 거 안 하면 뒤처진 거 같아서 오래된 식당의 아주머니를 뵈면 멕아리 없게 '이모오'라고 부르긴 했었다.


'이모님'을 처음 뵌 건 복학하고 얼마 안 되서였다. 나보다 9학번 높은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는 곧잘 본인의 동아리 후배들에게 술을 사줄 때 자신의 단골집에 데려갔다. 그중 하나는 회기역 사거리 한켠에 있는 투다리였다. 투다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자카야가 지금처럼 널리 퍼지기 이전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빨간 간판과 거기서 술 한잔하며 정치 얘기하는 동네 아저씨들이다. 그런 오래된 술집의 대명사의 단골이 내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갔던 투다리는 ㄱ자로 된 다찌 테이블 하나에 안쪽에 테이블이 4인용 테이블이 3개, 더 안쪽에 ㄷ자 테이블은 6명은 앉을 수 있었다. 전부 차면 꽤나 북적한 곳인데 알바 없이 이모님 혼자서 운영했다. 방학이 있어 편차가 심한 매출 때문에 오래 살아남기 힘든 대학가에서 무려 30년 이상 버티고 있던 내공 있는 곳이었다. 이는 즉 30번의 여름 동안 이모님은 좁은 부엌에서 염통구이와 닭 껍질 꼬치를 굽고 수천 개, 아니 수 만 개의 김치 우동을 끓여오셨다는 의미다. (그 중 수백 개의 염통구이는 내 몫이다) 경외감이 드는 시간이다.



이모님은 손님이 뜨는 시간이면 우리 테이블에 앉아 본인의 삶을 풀어내었다. 꽤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러다 결혼하고 가게를 운영하며 자식들을 대학 보내고 취업하고 결혼까지 시킨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굵직한 목소리의 부산 사투리를 쓰셨지만, 이모님에겐 분명 소녀이고 처녀이고 엄마였다가 할머니가 된 시간의 흔적들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다들 이모라고 했지만 나는 끝내 이모라고는 못 했고 혼자 타협점을 찾아내어 '이모님'이라고 불렀다.


이모님은 나를 '이쁜이'라고 불렀다. 180이 넘은 널찍한 내가 생전 처음 들었고 아마 앞으로도 들을 일 없는 호칭이다. 술을 이쁘게 마셔서 그렇단다. 3년 넘게 한 달에 2~3번씩 꼬박꼬박 가면서 한 번도 잔을 깨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실수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게다. 이쁜이라는 호칭은 지금도 여전히 부끄럽지만, 술을 이쁘게 먹는다는 칭찬은 꽤나 기분 좋았다. 어렸을 적 술 마시면 가족을 못살게 굴었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덕에 형과 나는 술에 취해도 다소곳이 집에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씻고 잠을 자곤 했는데 그러한 노력이 인정 받은 것 같았다. 물론 이모님은 그런 사실은 모른다. 언젠가 이쁜이라는 말을 또 듣게 되면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한번은 이런 경우도 있었다. 부산에 살던 친구가 서울에 있는 회사 면접을 위해 우리 집에 묵으면서 그곳에 데려간 적이 있는데 처음 본 이모와 아주 살갑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동향인들끼리의 통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지 오고 가는 사투리 속에 친근함이 있었다. 친구의 사투리 속에 반말 비슷한 것이 섞여서 조금 예의가 없을까 싶었는데 그것도 동향인끼리의 친근함 표시 같아서 자연스러워 보였다. 거기에 비해 나는 2년 넘게 단골로 있었음에도 여전히 이모님 이모님 하며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혼자서 괜히 소외감 같은 것도 느꼈다. 단골은 나였는데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말하니 친구는 자부심을 느낀 듯 부산 사람끼리 통하는 게 있다고 말했다. 나도 다음에 갈 때는 이모님 대신 이모라고 말해볼까 싶었다. 그러나 다음에 갔을 때 이모는 '그 친구는 조금 버릇이 없더라. 나는 너 같이 예의 바른 게 더 좋다'고 했다. 그 말 속에 대학가에서 30년 이상 버텨온 자본주의적 내공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이후로도 이모님이라고 부르며 꼬박꼬박 존칭을 쓰며 데면데면 굴었다.


지방에 있는 회사에 취직해서 서울을 떠난 뒤에도 일 년에 한두 번은 가곤 했다. 어느 날은 나에게 여자친구 있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하니 명함 하나 놓고 가라고 했다. 그리고 서너 달 뒤였나, 02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잠시 망설이다 받았다. "이모다, 이모!" 크게 말하는 목소리에 순간 어리둥절하다가 투다리 이모님인 걸 깨달았다. 이모는 군말 없이 지금부터 불러주는 번호를 적으라고 했다. 그러고 나선 잘 만나보라고 하며 정말이지 용건만 말하고 딱 끊으셨다. 명함은 드렸지만 사실 크게 기대는 안 했던 터라 많이 놀랐다. 그 다음 주에 투다리의 또 다른 단골인 분과 소개팅을 했다. 종종 혼술을 하러 오신다는 그 분은 대학원에서 기생충을 전공했다. 그분도 실제로 소개팅이 이루어질지 몰랐는지 첫 만남에서는 이모님 이야기를 하면서 말을 텄던 기억이 난다. 애프터까지 했지만 아쉽게도 인연은 그 이상 이어지진 않았다. 당시 나는 고양이를 키우며 종종 산책하곤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고양이가 산책 시 감염될 수 있는 기생충 이야기를 한 시간 넘게 한 덕에 이후 산책을 거의 가지 않았다는 건 안 비밀.


그곳은 나의 데이트 스팟이기도 했다. 상대 여성이 근방에 사시던 분이라 파전집에서 막걸리와 파전을 먹고 자리를 옮겼는데 투다리가 떠올랐다. '친근한 이모님이 있는 단골 술집이 있는 남자'는 어필 포인트가 있지 않을까 싶은 얕은 생각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곳은 대화하기 참 좋은 곳이다. 말이 섞이지 않는 적당한 테이블의 간격이며 은은한 조명, 로맨틱, 성공적. 상대 여성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는 내 옆으로 스윽 와서 '괜찮은 처자다'라며 씨익 웃는 이모님에게는 동년배 동성 친구에게 느끼던 우정이 떠올랐다. 물론 그분과 투다리에 또 갈 일은 없었다는 것도 안 비밀.


가장 최근에 간 건 작년 말이었을 게다. 대학 동창들이랑 간만에 학교 근처에서 술을 마셨는데 투다리를 가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맥주 한잔하고 오는 길에 보니 간판 불이 켜져 있는 것 아닌가. 이미 자리를 마치고 가는 길이었기에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 편의점에 들러 비타 500 한 박스를 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전히 거기에는 이모님이 씩씩한 목소리로 맞이해주셨다. 꽤 오랜만에 왔음에도 단번에 알아봐 주셔서 반가웠다. 이모는 고맙다며 은행이라도 구워주시겠다 했지만, 일행이 기다리는 터라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뵈어서 그런지 이모님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셨다. 맞잡은 손에는 주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모님은 항상 그곳에 있었지만 언젠가는 그곳에 안 계실 수도 있겠지. 맞잡은 손에서 느낀 주름의 감각이 손 언저리에 남았다 . 가을이 되면 한 번쯤 가볼까 싶다.


나는 공간보다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이 중요한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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