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80장, 13,648개의 단어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한창 자소서를 쓰던 나는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없었다. 그저 학교 앞 새벽 2시까지 영업하는 카페의 구석 테이블에 앉아 매일 쓰는 자소서가 지겨웠다. 무언가 즐거운 걸 쓰고 싶었다.
영화관 매니저로 취업하고 천안으로 내려가면서 소설 쓰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간간이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을 때 초단편 소설을 썼지만 순전히 자기만족이었다. 취업을 하니 시간은 광속으로 흘러 4년이 지나 어느새 맞이한 2020년의 겨울. 코로나의 영향으로 하루에도 관객 수가 0인 상영관이 수두룩하여 영사기의 램프를 끄는 일만 반복하던 나날이었다. 한적한 야간의 극장, 매표소 뒤쪽의 사무실에 앉아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잠시 과거의 향수에 젖었다. 무언가 떠올린 듯 구글에 누군가의 이름을 검색했다. '한예종 xxx'라고 검색어를 입력하면서 뭐가 뜰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졸업 작품 내용이 담긴 블로그가 있었다. 그 글을 읽던 나는 머리에 무엇으로 쾅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오래전 함께 보냈던 시간이었고, 그녀의 졸업 작품 스토리이기도 했고, 쓰고 고치길 반복하던 나의 유일한 장편 소설의 내용이기도 했다.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고 꽤 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시기를 정하진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그녀의 졸업 작품 내용을 알았고, 문학 동네 소설 공모전 마감일이 7월 31일인 걸 보았다. 일을 그만두고 한 달간 미친 듯 소설을 쓰면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듬해 2021년 6월, 나는 퇴사했고 7월 한 달 꼬박 소설을 썼고 마침내 완결을 내어 제출했다. 투박하고 관념적인 내용이기에 수상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래도 장편 소설 한 편을 써내었다는 성취감이 컸다. 언젠가 그녀의 눈에 들어올 일이 있을까?
1년이 지났다.
재수생 시절 이후 처음으로 무소속의 시간을 보냈다. 수영을 배우고 하루키처럼 매일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싶었다. 1년 간 아침 수영을 나간 덕에 접영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글 쓰는 열정은 놓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2022년 7월, 여름은 또다시 찾아왔다. 문학동네 공모전의 마감일은 여전히 7월 31일이었다.
다시 키보드와 모니터 앞에 앉았다. 관념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지난해의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썼다. 좋은 이야기는 독자가 다음 페이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거라는 걸 머리 한켠에서 계속 상기하며 이야기의 줄기가 되는 커다란 수수께끼가 도입부터 결말까지 관통하도록 이야기의 얼개를 다시 짰다. 더운 여름날, 어떤 날은 식탁 위에서 밥을 먹으면서, 어떤 날은 오래 있어도 눈치가 안 보이는 대학가의 스타벅스 카페에서, 어떤 날은 작업실처럼 만들어둔 내 방 한켠에서 글을 썼다. 에어컨이 없었기에 선풍기 바람을 의지하며 시선은 폰트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라가며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타오르는 태양과 흐르는 땀과 하얀 모니터 속의 검은 글자. 그 시절 나의 여름이었다.
작가라는 말을 듣는 어느 한 남자와 작가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공시생인 여자의 이야기. 삶에서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 한 채 꿈만 바라보는 남자를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작가라는 꿈을 놓지 못 한 그녀의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는 나아간다. 작년에 냈던 소설을 고쳐 쓰면서 주제 의식은 선명해졌다. '예술을 하는 건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 예술가는 내면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영감을 글, 그림, 음악, 건축물 등의 형태로 표현하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는 존재로 그리고 싶었다. 그 영감을 원하는 모습으로 구현했을 때 비로소 삶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예술가가 아닐까 싶었다.
1년 전의 집필은 오롯이 혼자 하는 과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주위의 도움을 빌렸다. 1차 퇴고가 끝난 글을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들었다. 프로가 아닌 공모용 소설, A4 용지 80장이 넘고 13,648의 단어와 53,893개의 글자로 채운 글을 읽고 의견을 말해준다는 건 바쁜 삶을 보내는 직업인에게는 쉽지 않은 노력이라는 걸, 다시 취업하고 어느새 3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오니 다시금 고마움을 되새기게 된다. 보내어준 소중한 피드백을 다시 읽었다.
차분하지만 그렇다고 몰입감이 확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어 확 끝나버리는 게 제 스타일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ㅎㅎ
- 10년 넘게 한 기자 생활을 마치고 최근 스타트업 창업을 하신 H 님
네가 준 글이어서가 아니라 브런치나 아님 잡지나 책에서 봤더래도 나는 끝까지 다 읽었을라고 장담해!
- 달달한 간식을 좋아하고 전해주는 말에도 달콤함이 가득한 J
지인의 원고를 완독 했다. 시중에 나온 책처럼 여겨져서 북큐레이션 피드를 남긴다. 이 책이 꼭 출판되었음 좋겠다.
- 만나면 티격태격하지만 책에는 진심인 북 인플루언서 H
설정오류: 서정연 씨의 방에 대한 묘사가 계속 달라짐. 어떤 때는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고 했다가 어떤 때는 해가 잘 든다고 표현되어 있음.
- 웃는 게 선한 대학 동기 S
방금 글 다 읽었는데 한 시간에 휘릭하고 지나갔네요. 너무 좋았어서 카페 하는 친구한테 보여주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 말은 가끔 쌀쌀맞지만 누구보다 정이 많은 형님 K
그때의 응원을 잊고 2년 동안 나는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 했다. 시간을 내어 글을 읽고 보내준 응원의 글을 마주하는 지금, 부끄러움은 참을 길이 없다. 여름이라는 계절의 강렬함은 해마다 강해지니 그 강렬함에 묻힌 추억들이 때때로 떠오른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 여름의 고마움을 기억한다.
언젠가 다시 소설을 쓴다면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