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은 진실로 왜 무너졌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소추되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문제인 정부의 좌파적인 생각과 정책을 비난하고, 최근 고조되는 북한의 핵 개발 및 미사일 위협을 들어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지나치게 과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북한의 위협의 우리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정부를 좌파, 종북 프레임으로 공격하는 것은 지나치다. 특히 아직도 탄핵 심판의 무효를 주장하는 측의 사람들은 북한 정권의 사주와 언론 미디어의 조작에 의한 탄핵임을 주장하고, 체제 전복을 위한 날조라고 이야기 하면서 인터넷상에 국가 체제 전복을 위한 시나리오라고 말하는 이야기들을 전파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보고, 종북 척결을 내세우고 있는 탄핵 반대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주장에서 한가지 의문이 드는 사항이 있었다. 바로 남 베트남의 패망에 대한 주장이다. 남 베트남이 패망한 것의 뒤에는 사회의 안정을 뒤 흔든 북 베트남 정부와 그들의 지원을 받은 베트콩의 날조된 여론, 그리고 그런 날조와 정치적 프라파간다에 속아 넘어갔던 남 베트남 지식층의 동조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남북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남 베트남의 지식층이 어떻게 숙청의 대상이 되었는가와 같은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운 이야기도 따라 온다. 1975년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숙청의 진실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다. 해외 유학 시절 수년 동안 베트남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과의 대화에서 (대부분의 친구들이 자유로운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이 되지 않아 정확한 의미전달은 못 했지만) 베트남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는 있었다. 그리고 전사를 공부하면서 베트남의 패망의 원인을 미군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분석을 해 보았지만, 남 베트남 국민의 측면에서 바라 본적은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들이 근거가 있는지는 보아야 했다. 특히 남 베트남의 패망이후 엄청나게 증가 했던 보트 피플의 슬픈 이야기부터, 베트남 패망시의 베트남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성에 대해서는 수 없이 많은 영화와 책들을 통해서 접해 본지라, 정말 정부와 사회의 불안이 공산당의 날조와 여론 조작에 의거해 일어 났는지를 확인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남 베트남은 왜 패망하였는가?
남 베트남의 패망에 대한 조사를 하는 과정을 거치다가 보니 국내 자료들과 해외 자료들간에 차이점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특히 미군의 군사적인 관점에서 베트남 패망을 바라본 자료들이나 북베트남의 관점에서 바라본 남 베트남의 패망의 원인과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베트남 패망의 원인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국내 자료들의 경우는 베트남 패망에서의 북 베트남의 역할과 베트민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 지리적 – 전술적인 이격성을 지적하는 자료들이 많았고,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 상에 늘어난 북 베트남의 공산화 전술에 의해 사회 – 정치적 불안이 확장된 남 베트남의 멸망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하지만 남 베트남의 패망에 관하여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단순하게 북 베트남, 또는 공산당의 책동으로 인하여 남 베트남이 무너질 수 있었느냐에 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왜 공산당과 북 베트남의 선전이 남 베트남 국민에게 유효 하게 먹혔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공산당의 치밀한 계획과 실행이라는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인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일 북 베트남과 공산당의 사회 혼란과 정치적 갈등에 대한 전략이 유효했다면 왜 그런 전략을 바탕으로 미국이나 서방국가들의 공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에는 답이 되지 않는다. 60~70년대 미국의 반전 운동이나 흑인 인권 운동을 보면 그런 운동들을 조정해서 공산화를 시도하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남 베트남의 멸망에 단순한 공산당의 책동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 베트남 패망의 교훈은 일치된 국민 여론과 강요된 단결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본다.
(베트남 왕국의 마지작 왕인 바오 다이. 향락에 빠진 삶을 즐겼고, 천주교도로 국민들과 감정적인 이격이 심했다. 패위 된 두 프랑스로 망명해 죽을때까지 프랑스에서 살았다.)
1차 인도 차이나 전쟁이 프랑스의 패전으로 귀결된 이후 제네바 협약을 통해 프랑스와 베트남 정부가 휴전을 체결하기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1945년 3월 일본은 프랑스의 비시 정부가 몰락하는 상황을 틈타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 차이나 전역을 장악하고 당시 프랑스 식민지 아래의 허수아비 왕이였던 바오 다이 (부대제 Hoàng đế Bảo Đại)를 옹립한다. 명목상 독립 베트남 왕국의 수립이라고 했지만,실지로는 일본의 위성국가였던 만주국의 부이 황제와 다를 바 없는 위치에 있었던 바오 다이는 이후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을 할 때가지 독립 베트남 왕국의 황제로 있다가 1944~ 45년에 베트남에 닥친 대 기근을 통해 세력을 확장한 베트민의 지도자 호치민이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베트남 인민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자 보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호치민은 1941년 오랜 기간의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베트남에 돌아와 베트민을 결성하고 베트남 무장 투쟁을 시작한 이래 1945년 8월의 무장 혁명은 베트남 독립의 주춧돌이 되었다. 한편 1945년 7월에 독일 포츠담에서 연합군간에 열린 회담에서 연합국은 인도차이나의 위도 16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재를 맏도록 하고, 남부는 영국군이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결정한다. 이와 함께 인도차이나의 적법한 소유권이 프랑스에 있음을 확인하고, 독일의 점령으로 약화된 프랑스의 역할을 영국과 인도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잠정적으로 담당하여, 프랑스의 식민지 수복이 원할하게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할 것을 합의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호간의 합의 아래 영국군으로 구성된 인도차이나 상륙군으로 명명된 부대가 8월 중순에 인도차이나 지역에 진군하여 일본군의 무장 해재 및 연합군 포로의 구출 및 지원 작업을 진행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연합군 태평양 지역 사령관이였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이를 제지 하면서 전체적인 일정이 뒤로 밀리게 된다. 맥아더는 8월 28일로 예정되어 있는 일본 정부와의 항복 문서 서명 이전까지 어떠한 군사적 작전의 수행은 안된다고 주장했고, 항복 문서 서명식이 태풍으로 인해 9월 2일로 연기되면서 8월 한달간 베트남은 이미 항복을 한 일본군과 8월 혁명으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하고 있던 베트민이 같이 장악을 하고 있는 상황이 진행된다.
(베트남 독립의 영웅인 호치민. 북 베트남의 수장으로 프랑스 - 미국등과 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일 이후 중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지금도 국민적인 영웅으로 숭배 받고 있다. 평생 청렴 결백하게 살았다. 독립 이후 기득권층이자 소수자인 천주교도들과 신민지 부역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처벌, 그리고 통일 이후의 숙청 과정에 대한 논쟁은 있다.)
이와 같은 권력 및 군사력의 공백기를 틈타 베트민의 지도자인 호치민과 그 추종 세력을 하노이와 사이공을 중심으로 재빨리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특히 치안과 군사력의 공백기를 틈타 호치민을 비롯한 베트민은 자신들과 정치적인 경쟁관계에 있는 세력들을 암살하거나 숙청해나가는 작업을 진행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한편 맥아더의 반대로 군사 작전 진행을 방해 받고 있던 영국군은 맥아더가 일본 정부와 정식 항복 문서 서명을 받고 3일 뒤인 9월 5일 의료 및 지원 부대인 11 대대를 낙하산으로 투입했다. 이후 9월 13일 영국군 본대를 비롯한 인도차이나 상륙군이 인도차이나 지역의 일본군으로부터 정식 항복을 받게 되는데, 일본군의 정식 항복을 받은 인도차이나 상륙군 사령관 더글라스 그래이시는 베트남의 정치적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인도차이나 상륙군 사령관인 그레이시는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 있넌 프랑스 식민지 군을 급한대로 무장 시켜 사이공 지역을 중심으로 치안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하고, 베트민이 장악하고 있는 행정 시설과 관공서를 일부 무력을 사용하여 되 찾는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움직임은 베트민을 비롯한 베트남 주민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사이공을 중심으로 영국군 – 프랑스군 – 일본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베트민과 그 추종 세력 그리고 연합 세력들로 구성된 민병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1946년 프랑스 식민지군이 다시 투입되어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전까지 호치민과 베트민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을 끊임없이 작은 규모의 게릴라 전투를 진행함과 동시에 베트남 내부에 남아 있던 우파 국가주의자들의 지도자들과 추종 세력들에 대한 숙청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1946 ~1948년 기간을 베트남에서는 Great Purge – 위대한 숙청 이라 부른다)
(북 베트남 최고 사령관인 보구엔 지압 장군. 프랑스 독립 전쟁과 미국과의 전쟁, 이후 중국과의 전쟁 및 캄보디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20세기 아시아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 받는다. 전쟁의 목적을 단순한 전투의 승리가 아닌 정치적 승리와 무력의 승리로 나누어서 다루고, 지형 지물과 열세인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공세적으로 무력화 시키는 전술과 치밀한 준비를 통한 작전의 최대 효율화를 선 보였다.)
1946년 12월 19일 베트민 민병대의 총 사령관이 보구엔 지압 휘하의 30000명의 베트민 민병대가 하노이의 지배권을 두고 대규모로 충돌하게 되면서 발발한 제 1차 인도 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는 하노이를 중심으로 북쪽에 지배력을 확산하고 있던 호치민에 대항하기 위해 사이공에 이전에 자신들이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던 바오 다이를 다시 권좌에 올리게 된다. 바오 다이는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통해 남부 베트남 왕국을 프랑스 연합의 일원으로 두겠다는 서약을 진행하고, 이로 인해 북쪽에서 프랑스 군과 지속적인 게릴라 전투를 벌이고 있던 베트민 및 베트남 인민 공화국과 및 독립 운동가들로부터 거샌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후 1950년 북쪽에 위치한 베트남 인민 공화국은 소련과 중국 모택동 정부로부터 베트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을 받고, 사이공에 위치한 바오다이의 베트남 왕국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정식 정부로 인정 받으면서 상호간의 경쟁은 내전 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미국은 당시 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 전역의 개입의 필요성을 역설 하였지만, 2차 세계 대전 당시 5성 장군으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정보 당국의 보고에 따라 프랑스 군이 베트남을 다시 실효적으로 지배 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함과 함께 아시아 지역에서 다시 미국이 전쟁에 휘말려 들 경우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판단아래 개입을 거부 한다. 이런 가운데 소련과 중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호치민과 베트민은 보구엔 지압의 지휘아래 프랑스 식민지군 주력을 라오스와 베트남 인접 지역인 디엔비엔푸에서 고립 시켜 항복을 받아 냄으로써 프랑스의 베트남 완전 철수를 얻어낸다.
(디엔 비엔 푸 전투 장면. 16000명의 프랑스 식민지 군이 50000명의 베트민군에 디엔 비엔 푸 분지에서 포위되어 고립 된 전투. 당시 프랑스 군 사령관인 나바르 장군은 라오스와 북 베트남의 교통의 요충지인 디엔 비엠푸를 장악하고 할 경우 베트민 군이 디엔 비엠 푸를 공격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이곳에 공수 부대를 포함한 대규모 부대와 화력을 집중 할 계획을 세운다. 만일 베트남 군이 공격 해 올 경우 압도적인 화력을 바탕으로 박살 낼 계획이였지만 지역을 포위한 베트남군의 공세에 2달여 간의 전투 끝에 프랑스군 10000명이 사상자를 내고 항복하게 된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프랑스와 북 베트남 정부간의 협의에서 양측은 16도선을 경계로 하여 300일 동안의 기한을 가지고 주민들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게 함과 함께 300일의 기간이 끝나면 통일 베트남 정부 구성을 위한 자유 선거를 치루기로 합의 한다. 이 기간 동안 북 베트남에서는 주로 소수인 카톨릭 신자들을 중심으로 약 100만명이 남베트남으로 이주하였고, 남 베트남에서는 5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런 가운데 1953년부터 총선이 약속된 1956년동안 북 베트남 정부는 토지 지대를 혁신적으로 낮추는 토지 개혁을 중심으로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지역 농부들에게 분배하는 사업이 진행되었고, 이런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공식 기록으로 14000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남부 베트남 왕국은 프랑스 정부의 허수아비 왕이였던 바오 다이가 우파 정치인이자 유능한 관료 출신의 응오 딘지엠을 총리로 임명하여 북 베트남과 정책 대결에 들어가게 된다. 응오 딘지엠은 학창 시절부터 유명한 수재로 알려져 있었으며, 프랑스 치하의 바오 다이 왕정에서 돋보이는 업무 능력과 청렴함으로 많은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특히 바오 다이는 프랑스 치하에서의 식민지에서 베트남의 자주적 결정권을 넓혀 나가는 노력을 했던 인물이고, 3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독립 운동가와 정치 세력들을 만나 독립 운동에도 관여한 대표적인 인물로 심지어 북 베트남의 지도자인 호치민이 처음에 그에게 정부 요직을 제안할 정도의 능력자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모습.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반대 하였고,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을 특수 부대들을 이용한 제한 전쟁을 통해 승리를 쟁취 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남 베트남 정권의 부패와 국민 민심 이반은 제한 전쟁의 성공 가능성을 낮췄으며, 결국 미국의 전면 개입을 불러 오게 된다.하지만 미군 역시 베트남 전쟁의 저변에 깔려 있는 민심을 다독이는데 실패 했고, 단순한 일반 전쟁으로 보다 결국 패하게 된다.)
하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응오 딘지엠은 정치적으로 융합될 수 없는 북 베트남 정부에 일하지 않고 바오 다이 치하의 남 베트남의 총리로 취임하기로 결정하고 프랑스 망명에서 돌아 온다. 하지만 돌아온 그가 처한 남 베트남의 상황 역시 쉽지는 않았다. 허수아비 왕인 바오 다이는 권좌만 가졌을뿐 실권은 가지지 못했고, 남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부역자들과 대형 군부간의 경쟁, 그리고 당대 최대 범죄 조직이 경찰을 운영하고 있는 혼란의 무정부 상태였다.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여 나라를 운영하게 된 응오 딘지엠은 자신의 친 인척과 주변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국가 운영을 시작 하는데 이것이 그의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이런 환경에서 북 베트남에서 이주해온 100만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은 딘지엠의 정치적인 지지층을 넓혀주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을 공격하던 군부를 비롯한 우파 정치 세력을 공격하여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정치적인 혼란의 상황에서 프랑스와 북 베트남 정부 그리고 남 베트남 정부간의 협의된 제네바 조약에 따른 통일 총선이 다가오자 양측안의 긴장이 더욱 높아졌다. 특히 남 베트남 정부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아 통일 총선이 유엔의 감시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제네바 조약에서 합의된 총선의 관리 감독을 지역 책임자가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내용이 되어 양측간의 1956년이 다가 올수록 양측간의 긴장의 수위가 높아져 갔다. 특히, 자유 총선이 실시 될 경우 프랑스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산주의자 호치민이 국가의 수장으로 뽑힐 것이고 바오 다이가 권자에서 물러 날 것이라는 공포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퍼져 나갔고, 이를 통해 베트남 전역가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면서 미국의 남 베트남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게 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딘지엠 대통령.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 유명했으며, 식민지 관리 시절에서 청렴함과 업무 추진 능력으로 촉망 받던 관료였다. 독립 운동가들과도 교류 했으며, 외교적인 베트남의 독립을 주장했다. 1955년 바오 다이 황제를 축출하고 대통령에 취임하고 1963년 쿠데타로 암살 될때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특히 국민 대부분이 불교 신자인 국가에서 천주교 우대 정책을 쓰면서 불교를 탄압하고, 식민지 시대 지주들의 토지를 되 돌려주는 토지 정책은 가장 큰 패착으로 불린다. 정치적으로도 공산주의자뿐만 아닌 모든 반대 세력을 체제 붕괴 세력으로 몰아 공격하고 억압 했다. 아이젠 하워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Adviser들도 딘지엠의 무능과 부패를 알았지만 "그 말고는 우파에 마땅한 사람이 없다"라며 그의 철권 통치를 감수 했다. )
결국 1955년 10월 23일 남 베트남에서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딘지엠은 자신의 동생을 통해 선거에 개입하는 선거 부정을 저지르고 이를 통해 전체 투표수의 98.5%에 달하는 찬성을 얻어 정권을 장악, 자유 베트남 공화국을 선포 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미국의 정보 관계자와 정권 조언자들은 60~70%의 지지를 얻는 것이 훨씬 보기에도 자연스럽다고 조언을 했음에 불구하고 딘지엠은 지지율이 자신의 권력의 권위를 보장하는 것으로 보아 지지율을 높여서 정권을 장악 하였다. 북 베트남 역시 조작된 투표 속에 99%의 찬성을 얻어 북 베트남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하지만 투표 결과에 불구하고 딘지엠은 남부 베트남 일반 국민의 폭 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고 보여지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점이였다. 당시 베트남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불교 신자였던 반면 일부 지배층과 지식층은 천주교 신자 였는데, 이와 같은 종교적인 차이는 정치적인 분열로 이어져 공산주의자 척결을 내세운 딘지엠의 치하에서의 천주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는 국민적인 반발을 사게 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딘지엠이 1955년에서 57년 기간동안 처형한 정치범이 12000여명였으며 1958년에는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의 숫자가 40000명을 넘어서는 종교에 의한 공포 정치가 자행되었다. 또한 절대 권력을 가진 딘지엠의 측근인 동생과 친인척들이 정부의 주요 사업을 비롯한 각종 부정 부패를 일으켰고, 결국 딘지엠에대한 국민적 평가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군부 역시 최악의 무능을 보이면서 군기 문란 행위를 지속하가 하면 절대적인 전력 우위의 전투에서 베트콩에세 패배하는 말도 안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여기에 자신의 철권 통치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발표된 59년 10호 법안에 의해 모든 정치적 혼란 행위에 대한 사형이 언도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지만, 오히려 딘지엠에 대항하는 저항 세력인 National Liberation front (NFL – 베트콩)이 결성되어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계속 확산하게 된다. 딘지엠의 정책 중 가장 문제시 되었던 것은 토지 정책으로 국민의 대다수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대를 낮추고 빚을 탕감해주는 북 베트남의 정책에 비하여 딘지엠의 정부는 식민지 시대 지주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돌려주고 그렇게 토지를 돌려 받은 지주들이 농부들에게서 자신들이 수 년동안 받지 못한 토지 이용료를 강제로 받아 낼 수 있도록 군대를 동원해주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많은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게 된다. 이런 가운데 군부는 능력이 아닌 정치적 세력에 의해 승진이 결정 되었고,지주들과 결탁하여 무리한 지대를 강제하는 행위에서부터 각종 무기와 장비를 베트콩과 북 베트남에 매각하는 군인들도 나오면서 남베트남의 군사력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무너지게 된다.
(딘지엠의 축출 후 수차례의 구데타와 혁명 이후 베트남의 정권을 잡은 응유엔 반 티에유. 그의 오른쪽은 그가 군 통치 위원회 수반으로 있을때 총리를 맏은 응유엔 카이키, 오른쪽은 베트남 미군 총 사령관은 존 웨스트몰랜드, 맨 왼쪽은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이다. 응유엔 반 티에유는 젊은 시절 독립 운동에 투신 하였다가 변절하여 프랑스 군에서 교육을 받은 경력자이다. 딘 지엠의 축출이후 반복되는 쿠데타 속에 최종적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베트남에 군부와 기득권에 만연한 부정 부패를 척결 하지 못했고, 자신 역시 부정 부패와 전략적 무능으로 인해 남 베트남을 패망으로 몰아 넣는다. 1975년 북 베트남군의 총 공세때 남 베트남 군의 사기를 꺽어 전투 의지를 상실하게 하는 전략적으로 무능에 가까운 명령들을 계속 내 놓아 패망을 앞 당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결국 계속되는 부정 부패와 종교 탄압으로 인해 딘지엠 정권이 베트남 국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고 판단한 미국이베트남 군부에게 쿠데타를 통한 딘지엠의 퇴출을 승인하자 상황이 더욱 악화되기 시작한다. 1963년 딘지엠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군부는 상대 군부를 몰아내기 위한 크고 작은 쿠데타가 계속 2년간 지속되었고, 이로 인하여 남 베트남 정국은 통일된 정권의 운영아래 정책적인 개발이나 집행이 부족한 단기 평화와 내전이 반복되는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한 상태는 미국의 대대적인 개입이 있은 이후인 1965년 공군 참모총장인 응유엔 카오키와 응유엔 반 티에유가 각각 총리와 국가 위원회 수장으로 임명되면서 찾아 온다. 하지만 그들의 정책 역시 딘지엠의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었으며, 지식과 사상에 대한 검열의 강화와 시민 자유에 대한 억압을 통한 공산당 척결에만 집중 되어 있었다. 1967년 반 티에유는 자신들의 정적들을 몰아 내고 미군이 강요한 총선을 조작하여 34%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정권은 그리 오해가지 못하게 된다. 그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 미국은 사회 각계 각층의 반전 여론이 거세지고, 베트남 전쟁을 지원하던 닉슨이 워터 게이트로 사임하게 되자 미국이 베트남에서 손을 빼면서 북 베트남에 의한 남 베트남의 패망이 가속화 된다. 1975년 봄 공세 (호치민 캠페인)시에는 남 베트남 군사 수뇌부와 정부의 무능으로 인하여 제대로된 작전을 수행하지 무너진 것 역시 마찬가지 이다.
(베트남 사회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항상 등장하는 사진이다. 1963년 불교 탄압의 중단을 요구하며 불교 지도자인 틱광득이 스스로 분신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사진을 찍은 말콤 브라운은 1963년 퓰리쳐 상을 받았다. 이 사진으로 베트남 딘지엠 정권의 종교 탄압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가중되기 시작 했으며, 불교계의 저항 역시 거세졌다. 이에 탄압을 중지 하겠다고 선언했던 딘 지엠이 군대를 동원하여 불교 사원을 공격하고 승려들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자 미국의 사주와 허가 아래 베트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딘지엠을 암살하고 정권을 탈취한다.)
역사적인 기록들과 사실들을 놓고 보면 남 베트남의 패망은 단순한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이나 여론을 조작하는 간사한 능력에 의해서 일어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남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개를 치면서 세력을 팽창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남 베트남의 기득권 세력과 정부 인사들, 군부의 부정 부패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사유라 본다. 역사적으로 그 어떤 나라도 내부의 단결이 없이 외부의 침략을 이겨낸 경우는 없다. 작고 힘 없는 나라라 할지라도 지도층의 각성에 따라 백성들이 화합하게 되면 큰 나라도 쉽게 그나라를 공격하거나 침략할 수 없다. 하지만 지도층이 부패하고 무능하여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게 되면 그 틈을 타고 국민들의 불만이 올라오게 되고, 그런 불만들을 이용한 다른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거나 외세의 침략을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 베트남의 정권을 잡았던 딘지엠은 독립 운동의 배경과 유능한 관료라는 후광이 있어 남 베트남을 북 베트남과 경쟁 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었다. 그는 비록 허상 뿐이였던 바오 다이 황제 아래 총리로 국가의 수장으로 기회를 잡았지만 공산당과의 대결이라는 중대한 명제를 두고 미국이라는 든든한 우방의 지원이 있었기에 기득권의 권익과 이해 관계를 보살피지 않고 개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거라 보인다. 하지만 절대 권력을 가진 뒤의 딘지엠은 자신의 분에 넘친 권력을 가진 자가 보여 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을 보였으며, 그가 망쳐 놓은 남베트남의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그 뒤의 다른 정권도 해결하지 못한 병이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바오 다이 황제가 식민지 시대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협조한 황제라는 오명에 향락에 빠져 살아 국민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이후에 권력자로 국민적인 지지를 얻어 남 베트남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인 세력을 강화하고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다른 세력들과의 연대와 대화를 거부한채 억압과 탄압을 자행한 딘지엠의 철권 통치는 자신가 친 인척의 부정부패와 군사적 무능에 의해 결국 미국에 의해 버림을 받게 되고 미국의 용인아래 군부에 의해 쿠데타로 축출된 후의 정권 역시 부정 부패와 무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혹자들은 당시 남 베트남에서 활동한 북 베트남 간첩들의 활동에 대해서 얘기 한다. 하지만 만일 딘지엠 정권이 국민적인 지지를 얻었다면, 그리고 민주주의를 수행하면서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허용 할 수 있었다면, 비판을 수용하요, 건전한 토론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이루어 냈다면, 마지막으로 단도 직입적으로 딘지엠 정권이 부패하지 않고 무능하지 않았다면 간첩의 준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나라가 흥망 성쇠의 길을 걷는데 있어서 국민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지도자의 역할이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다. 만일 딘지엠이 미래를 보면서 외부 세력을 포용하고 통합 할 수 있는 지도자였다면, 남 베트남의 운명은 패망으로 연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와 지도층에서 뿌리 내려오는 부정부패의 기운이 국가와 국민들을 좀 먹고 나라의 운명 마저도 위태롭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대학자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침(外侵)이 아니라, 공직자의 부정부패에 의한 민심의 이반(離反)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만일 이 나라가 정말로 종북 세력에 의해 여론이 호도되고 조작되어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면 정부와 기득권의 부정 부패에 눈 감고 그럴 수도 있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나서서 사회의 악을 척결하여 민심의 이반을 다스를 수 있는 그런 주장을 펴야 하지 않을까? 거리를 가득 매운 촛불들의 의미를 폄하하고 다수결에 의한 소수의 탄압이라 주장 하기 이전에 그런 불만과 민심이 자신들을 떠나게 된 이유를 다시 한번 살펴 보고 반성하는 자세를 갖출 수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하는 세상이 되길 기대 해 본다. 우린 적어도 그런 정치인을 가질 자격은 갖춘 국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