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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빈 Sep 04. 2017

논란의 세계사 – 임팔 , 코히마 전투

2차 세계 대전 최악의 공격작전 - 일본의 가장 멍청한 공세 작전 

예전에 국내 TV에서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란 드라마가 있다. 개인적으로 드라마를 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탓에 (시간에 맞춰 뭔가를 본다는 것 자체가 성격에 맞지 않고, 스토리의 흐름이 다음회로 이어지는 형식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피소드가 매편마다 바뀌는 형태의 미국 미니시리즈형 드라마는 좋아하는 편이다) 드라마 전체를 보진 못했다. 하지만 몇편 본 내용중에 주인공인 최재성이 참가하는 임팔작전 전투 장면은 기억에 많이 남는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는 전투에 패배해서 후퇴하던 일본군인들이 배고픔에 서로 잡아 먹게되는 것과 최재성이 뱀을 산채로 먹는 장면이었다. 이후 임펄 전투에 대한 관심이 많아 여러 자료들을 찾아 보면서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이 전투의 역사적인 의의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임팔 전투의 실패를 불러올 지휘관들의 전략적인 오류에 대해 알게 되면서 전략이라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만든 그래서 전사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들어준 전투이기도 하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던 일본 육군의 뼈아픈 패배였던 임팔 – 코히마 전투를 보면서 논란의 세계사를 다시 한번 돌아 보도록 하자.




전투의 배경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1941년 진주만 기습에 이은,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버마 전역에 이르기까지 일본 육군은 불패의 신화를 기록하고 있었다. 심지어 일본군은 일본이 만들어진 이래로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역시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선전)고 선전하며 자신들의 위대함을 홍보 하곤 했다. 하지만 1942년 6월 태평양 미드웨이에서 미군의 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니미츠 제독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일본 해군은 빠르게 패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일본 해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수뇌부와 정부는 전쟁의 승기가 아직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해군과 해군 육전대는 계속 패배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무적이라 불리는 관동군, 즉 육군이 건재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해전에서는 계속 되는 패배를 만회 할 수 있는 방안으로 태평양측에 집중되어 있는 연합군의 공세 방향을 돌릴 수 있는 공세가 필요했다. 이에 인도 침공, 정확히 말하면 뱅골지역 점령을 계획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계획에는 1943년 기근에 영국 식민지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인도 내부에서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감이 극대화 되고 있는 상황도 일본의 결심에 한 몫을 했다. 일본군 육군 본부는 만일 일본군이 인도를 침략해 일정 지역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둘 경우 영국군의 나약함을 인지한 인도인들의 반란으로 영국군과 연합군을 인도에서 몰아 낼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했다. 만일 인도에서 연합군이 물러나게 된다면 중국과의 전쟁에서 중국군에 지원되는 물자를 차단할 수 있게 되고, 중국군과의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섰다.

(임펄 - 코히마 전투의 총 사령관인 무다구치 렌야 중장 - 말레이시아 전역에서 병사와 함께 찍은 사진) 


전투 계획


임펄 작전 (U-Go 작전)의 총 책임자는 말레이 점령전과 싱가포르 전투에서 공을 세운 무다구치 랜야 중장이였다. 그가 지휘하는 15군은 3개 보병 사단과 1개 탱크 연대를 중심으로 하여 남쪽과 동쪽에서 임펄을 공격하기로 했다. 공격은 총 4방향에서 진행되며 33사단과 15사단 그리고 31사단이 투입되기로 했다. 전투의 가장 핵심은 임펄의 영국군 물자 집결지이자 철도 교통의 요충지인 디마푸르로 이곳을 점령하게 될 경우 일본군은 부족한 식량과 연료, 탄약을 보충 할 수 있었으며, 영국군과 연합군은 임펄을 포기해야 했다. 디마푸르로 가난 가장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 코히마는 산악 지역에 위치한 작은 원주민 마을이였고, 별도의 영국군 배치 없이 지역 관리는 영국 지역 담당 찰스 포지가 있었다. 일본군의 작전은 기습적인 진격을 통해 코히마를 점령하고, 이를 이용해서 병력을 총 동원하여 디마프루를 공격하는 것이였다. 코히마는 완전한 산악 지역으로 대규모 병력의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믿어 졌기 때문에 영국군의 경계가 약했던 것을 노린 작전이였다. 문제는 일본군 진영인 버마에서 임펄로 가는데 도로를 비롯한 별도의 교통 통로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이였다. 일본군은 말 그대로 장비와 식량을 직접 몸에 간직하고 밀림을 통과하여 공격을 수행해야 했다. 여기에 제대로 된 교통 수단을 확보 할 수 없는 관계로 보유한 식량과 탄약이 떨어질 경우 재 보급을 받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였다. 이에 일본군 1달치의 식량과 탄약을 보유할 것을 명령 받았고, 무다구치 중장은 1달안에 모든 전투가 마무리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또한 비상 식량의 경우는 물자 수송에 동원된 가축들을 도축하여 일부 조달하기로 하였다. (징기스칸 전법이라 불렀다)




하지만 무다구치의 이와 같은 작전 계획에 대해 현장 지휘관들은 전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계획이라며 공공연히 반대의 의견을 냈다. 특히 코히마 점령을 부여받은 31사단의 사토 소장은 무다구치가 머리가 꽉 막힌 사람이며, 그가 이전 작전을 계획한 동기에도 불순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 중앙 공격을 맡았던 야마구치 준장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을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인물이였다. 일본군은 여기에 밀림에서의 전투에 많은 양의 대포가 동원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다량의 화포를 공격 작전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특히 연합군의 탱크에 대적할 대전차 화포 대부분을 작전에 동원하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다구치의 작전 계획에서는 연합군의 항공 전력 활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는데, 제공권의 장악을 통한 공중 통제가 밀림 전투에 미치는 영향과 보급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지 못한 실책으로 평가 된다.


(동부 인도 지역 사령관이였던 윌리엄 슬림 중장 - 임펄 전투에서의 승리를 공적으로 하여 후에 원수에 오르게 된다) 



전투 전개


일본군의 진격은 밀림을 통과하여 임펄 지역으로 진출함과 동시에 31사단의 코히마 점령이 가장 중요한 작전이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빠른 기동과 함께 동시 다발적인 공격을 통해 연합군 방어 전력의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작전 개시 5일만인 3월 20일에 인도인들로 구성된 51 인도 여단을 상삭 인근에서 발견한 31사단은 코히마 진격을 멈추고 이들 부대를 공격하는 실수를 범한다. 상삭 Sangshak을 지키는 인도 51 여단은 영국군 맥스웰 톰슨 준장이 지휘아래 5일간 상삭을 방어 해 냈고, 결과적으로 일본군 31사단의 코히마 진격을 1주일 가량 지연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여기에 상삭 전투중 전사한 일본군 장교의 시체에서 임팔 작전의 자세한 계획이 들어지는 지도와 문서가 영국군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로써 일본군은 자신들의 모든 계획이 영국군에게 알려진지도 모른체 전장으로 향하게 된다. 한편 일본군의 임팔 공격 작전 계획을 입수한 영국군 14군의 윌리엄 슬림 중장은 일본군의 목표가 코히마 – 디마푸르임을 알게 되었다. 코히마로 향하는 도로와 전체 지형을 볼 때 일본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규모가 연대급일 것이라 예측 했던 영국군 수뇌부에 사단 규모 이상의 부대가 코히마로 향한다는 것은 충격이였다. 슬림은 자신 휘하의 인디안 5사단을 임펄 전역으로 보내 일본군의 공격을 대응하도록 함과 동시에 코히마와 디마푸르를 방어하기 위한병력을 재빨리 배치하기 시작했다. 당시 코히마에는 영국군 1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병력적으로 절대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인디안 161 여단과 24 산악 포병 연대가 코히마와 디마푸르를 방어 하기 위해 급파 되었다. 여기에 윙게이트 장군 휘하에서 버마 지구 게릴라 전투를 진행했던 23 장거리 침투 여단이 디마푸르의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 급히 투입됨과 함께 인도 중부와 남부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2사단과 인도 33군단이 임펄 지역으로 급히 소환되었다.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설치 했던 게리슨 고지의 전투 후 모습) 


코히마에 도착한 161 인디안 여단은 현지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대대와 합류하여 코히마 전역의 방어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도착했을 당시 코히마는 전투에 대한 준비가 전혀되어 있지 않는 상황이였지만, 일본군이 상삭에서 시간을 허비하며 자체적으로 진격을 늦춰준 바람에 급한대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영국군은 디마푸르에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병력을 확보 할 수 없어 코히마 방어에 주력할 수 없었고, 사령관인 슬림은 일본군이 영국군의 이와 같은 약점을 노려 코히마에 있는 병력들을 우회하여 디마푸르를 공격할 수도 있는 상황을 걱정 했다. 하지만 31사단장인 사토 소장은 코히마를 점령하고 디마푸르로 진격한다는 계획에 따라 전 병력을 투입하여 코히마를 포위하고 공격한다. 병력의 차이는 영국군과 인도군의 총 병력이 약 1500명이였던 반면 일본군은 약 15000여명으로 10:1의 전투였고, 영국군은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공중 지원을 통한 보급에 의존하여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4월 6일 코히마를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영국군 진영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였고 양측간의 피해는 계속적으로 늘어만 가기 시작했다. 전투의 양상은 일본군의 포격과 돌격 반복 되는 사이에 양측간의 저격수들이 기회를 포착하여 상대방 병사들을 사격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격렬한 전투는 코히마 지역 담당관이였던 찰스 포지의 관사에 부속된 테니스 코트에서 진행되었다. 테니스 코트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테니스장 양쪽 끝에 참호를 파고 대치한 일본군과 영국군은 4월 9일부터 17일까지 8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포지의 관사와 테니스장은 4월 17일 밤에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고, 후퇴한 영국군은 일본군의 최후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지만 4월 18일 아침 영국군 2사단이 일본군의 포위를 뚫고 도착하여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하게 된다.



(코히마 전투에 참가했던 인도 사단 병력들이 전투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인도인들로 구성된 인도 사단은 임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  



전투 분석


코히마 전투는 2차 세계 대전의 3대 포위전으로 불리는 전투로 혹자는 아시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전투의 규모나 기간에 있어서 스탈린 그라드 전투와 비교할 바는 못되지만, 벌지 전투 당시 미군 101공수 여단이 독일군에 포위되어 벌였던 바스통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공격측의 의도를 분쇄하고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투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전력에 불구하고 자신들의 의도를 사전에 노출하는 문제를 드러냈을뿐 아니라 전투 수행에서도 유연성을 보이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원래 계획의 수행만을 주장하다가 승기를 놓치는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임팔 작전 – 코히마 전투는 패배하는 군대가 보여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다 보여준 전투라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을 몇가지로 정리 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전장 통합 운영 및 지휘 체제간의 신뢰 부족


전투를 진행함에 있어서 계획에 따르는 움직임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일본군은 임펄 – 코히마 전투에서 전장에서는 나와서는 안되는 두가지 모습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일단 31사단이 코히마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상삭을 공격한 것은 아무런 전략적 목표가 없는 전투였다. 그곳에 영국군과 인도군이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실익이 없는 공격이 진행되었고, 그로인해 작전 성공에 필요했던 시간과 물자를 소비하였을뿐 아니라 우연이였지만 자신들의 공격 기도와 목표도 모두 적에게 노출하고 만다. 이 공격은 당시 58연대를 지휘하던 미야자키 소장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럴 경우 상급 지휘관이였던 사토 소장이 공격을 즉각 중단 시키고 원래 목표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음에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던 문제가 있다. 또한 작전 개시 이전에 코히마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적과의 불필요한 접전을 금지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작전 수행 규칙을 미리 전달하지 못함으로써 작전 수행에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토 소장은 지나치게 코히마 점령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전체 전략 자체를 실패로 이끌었다. 코히마 전투중 상급 지휘관이였던 무다구치 중장이 수차례 걸쳐 코히마에 일부 병력만 놔두고 병력을 위회시켜 디마푸르를 공격할 것을 명령 했지만, 원래 작전 계획에 부합되지 않을뿐 아니라 전투중인 병력을 우회시켜 다른 목표를 공격할 자원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린 주역이 된다. 이와 같은 결정에는 사토 소장이 무다구치의 개인적인 판단력에 심각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을뿐 아니라 작전 자체의 목적이 무다구치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던것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이 뿐 아니라 1930년대 일본 육군성 내부에서 있었던 정치적 세력 다툼에서 반대편에 섰던 두 사람간의 관계가 이런 문제를 일으킨 원흉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하자면 이런 관계의 인물들을 한 부대안에 넣은 일본 대 본영의 실수라고 할 수도 있다.  




2.    기존의 작전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답습


임펄 – 코히마 전투에서의 핵심은 부족한 보급을 현지에서 해결한다는 징기스칸 전법에 있었다. 일부 수송용 가축들을 도축하여 부족한 식량으로 사용하고, 현지에서 획득하는 물건들을 활용하여 보급을 해결한다는 전술은 일본군이 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많은 성공을 거둔 전법이기도 하다. 2차 세계 대전 초기 말레이 전투와 싱가포르 전투,버마 전투, 필리핀 등지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훈련이 덜 되고 공포에 질린 연합군이 버리고 간 무기와 탄약, 보급품을 활용해서 자신들의 부족한 수송 능력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본군과 일본군 수뇌부의 머리속에 연합군은 일본군이 공격을 하면 도망치기 바쁜 겁쟁이들에 불과 했고, 그럼으로 인해 현지 보급은 언제나 성공 할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43년 이후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의 게릴라 부대와 전투를 벌이고, 태평양에서 전투 준비가 된 미군과 전투를 거치면서 일부 지휘관들은 더 이상 연합군이 겁쟁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무리 말해봐야 상부에서 가지고 있는 연합군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현지 조달 작전의 위험성을 얘기하면 겁쟁이들을 무서워하는 겁쟁이 지휘관이 될 뿐이였다. 그리고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자 연합군은 일본군이 전에 만났던 도망치기 바쁜 겁쟁이들이 아니라 아귀같이 필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일본군이 포로들을 비 인간적으로 취급한다는 소식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잡혀서 굴욕스럽게 죽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생각이 당시 영국군 사이에 퍼져있었다.)



(전투 이후 영국군의 진지 모습. 참호 안에는 영국군, 인도군, 일본군의 시체가 포개져서 썩어가서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악취가 진동했다고 한다. 전투 당시 양측은 사상자를 불에 태워보려고 했지만 전투가 격렬하고 상호간에 사상자가 너무 많아 도저히 처리가 불가능했으며, 전투 이후 이 지역에 들어온 군인들은 시체 썩는 냄세에 한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3.    전략적 목표 설정의 부정확성


전투를 준비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전의 가장 큰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임펄- 코히마 전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런 큰 목표를 설정하는데 실패 했다는 것에 있다. 작전을 설립함에 있어서 “우리가 ~~한다면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가정에서 진행하는 것만큼 무모한 것은 없다. “임펄 지역과 뱅골만 지역을 점령 한다면 인도인들이 영국에 반기를 들것이다”라는 가정은 당시의 인도의 분위기에 편승한 작전일뿐 인도 현지 내부의 반대 세력이나 반영 세력과의 연대도 없는 무모한 작전이였다. 이와 같은 작전을 수립함에 있어서는 작전의 성공을 위한 현지 세력과의 연대를 먼저 구축하고, 그들을 지원하여 상대 세력을 약화 시킨뒤에 공세를 취해야 함에 불구하고 일본군은 인도를 통해 중국으로 지원되는 물자의 공급을 막아야 한다는 목표를 빨리 달성하기 위한 급조된 계획을 수행한 것이 문제이다. 같은 일본군인이자 진주만 기습을 기획했던 야마모토 제독이 전쟁 이전에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미국 본토로 처들어가 워싱턴에 일장기를 꽂을 생각이여야 한다”라고 얘기 했듯이, 전투나 전략을 세우는데 있어 가정에 바탕을 두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무모하고 성공을 하기 힘들다. 여기에 지휘관들 사이에 전략적 목표를 수립하고 이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구하는 과정이 생략 되면서 작전의 최종 목표인 디마푸르가 현장 지휘관들에 의해 무시되는 일과 같은 문제점 역시 일본군이 임펄- 코히마 전투에서 보여준 문제라 할 수 있다. 군대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조직이지만 그런 명령의 명확성과 상호간의 소통과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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