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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빈 Aug 09. 2017

논란의 역사 -독일의 프랑스 침공

덩케르크 철수 작전 - 그 첫 번째 이야기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전면적인 네덜란드 공격이 시작되면서 서부전선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프랑스 – 영국과 독일 간에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지만 (1939년 9월 3일에 프랑스 – 영국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서부전선에서 8개월간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었다. 영국은 프랑스군을 간접적으로 도와준다는 입장을 견지했고, 프랑스군은 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막강한 화력을 갖춘 방어선을 향해 공격을 가하는 건 자살 행위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공격보다는 방어가 피해가 적다는 개념 아래 독일을 소모전으로 끌어들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름하여 마지노선으로 불리는 이 계획은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 걸친 강력한 방어 진지로 완전 갱도화 진지화 된 방어선으로 독일군이 공격할 경우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히틀러는 폴란드의 점령이 끝나고 영국과 프랑스에 평화협정의 체결을 제안했지만, 프랑스와 영국 모두 이를 거절했다. 체코의 단츠이 지역을 내주는 조건으로 독일과 이미 평화 협정을 맺었던 경험이 있는 영국과 프랑스로써는 두 번 속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정치적인 해법이 없이 독일군이 쳐들어 오면 박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연합군 내부에 강하게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는 서류상으로는 세계 최고의 육군이었고, 벨기에 역시 60만이 넘는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영국 해군이 바다를 틀어막는다면 독일군의 물자는 조만간 바닥날 것이 자명했다. 연합군은 지휘 체계에서도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모리스 가믈랭 원수는 1900년대 초반 손자병법 연구서를 출판할 만큼 뛰어난 전략가였으며, 1차 세계 대전에서 1차 마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고, 프랑스군의 기계화 프로그램과 마지노 기지 건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백전노장이었다. 영국군은 1차 세계대전 전쟁 영웅이자 빅토리아 훈장을 받은 경력의 고트 경이 지휘를 맡고 있었다. 연합군은 야포는 독일군의 2배, 탱크는 1천대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고, 영국군의 주력인 마틸다 전차와 프랑스의 주력 전차인 R35, Char B1, S35는 당시 독일군이 보유하고 있던 팬저 3 나 팬저 4를 능가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5월 15일과 5월 17일에 있었던 프랑스 북부의 스톤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Char B1중전차 한 대가 팬저 4호 전차 2대와 팬저 3호 전차 1대를 수분 내에 몰살시키는 일도 발생했다.) 독일군 역시 이와 같은 전력의 열세를 인지하고 있었고, 심지어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프랑스군 최고 사령관인 가믈랭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프랑스 침공은 독일 최고 사령부의 입장에선 도박과 같은 상황이었다.


(마지노 요새의 단면도 - 지형을 활용하여 전 후방이 모두 방어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며, 강력한 화력전을 통한 공격 측의 피해를 유도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1927년 착공하고 1936년 완성되었으며, 프랑스군의 대독 작전의 기본 개념인 장기 전와 화력 우선주의가 잘 반영되어있다. )


연합군 (프랑스 – 영국 – 벨기에 =네덜란드)는 딜 계획 (Dyle Plan)을 이미 수립하여 놓고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딜 계획은 이미 언급한 수세적 방어작전을 기반으로 독일군의 자원을 고갈 시킴과 동시애 전장을 프랑스가 아닌 벨기에로 이동시키는 전략이었다. 이는 1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국토가 서부 전선의 주요 전장으로 변했던 프랑스의 의견이 강력히 반영된 작전으로 독일군이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슐리펜 계획에 의거하여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공할 경우 프랑스와 영국군이 주력이 벨기로 북상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막는다는 전술이었다, 특히 이 전술의 핵심은 네덜란드의 주요 항구인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을 연합군이 점령하여 독일군의 해상 보급을 막아 버린다는 계획으로 독일의 대서양 진출을 막아 자원 조달를 어렵게하고 장기전에서 승리를이끈다는것이었다. 이런 딜 계획의 핵심은 두 개의 요새의 방어에 달려 있었다. 하나는 이미 언급한 마지노 요새였고, 두 번째는 벨기에와 국경선에 건설되어 있는 에방-에말 요새의 방어였다. 에방 에말 요새는 벨기에-독일 국경선의 알바르 운하 요충지에 건설되어 있었다. 특히 65m 높이의 절벽 위에 5km의 걸치는 지하 터널로 구축되어 당시의 화력으로는 단기간에 공략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요새의 가장 주요 목적인 독일과 벨기에는 연결하는 개의 주요 교량을 방어하면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다, 교량을 준비된 방식으로 폭파하고 후퇴하여 딜강까지 후퇴하여 연합군에 합류하는 것으로, 지연 목적으로 설치된 요새로는 충분히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었다.


(연합군의 대독 작전의 기본이 된 딜 계획 - BEF는 영국군을 의미하고 프랑스 1-9-7군이 벨기에와 네덜란드로 진출하여 딕강 유역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는다는 계획으로 독일군의 대서양 진출을 막아 장기전에서 승리를 거둔다는 계획였다. 계획의 기본적인 이유는 마지노 방어선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자극할 수 있어 프랑스-벨기에 국경 간에 설치되지 않은 관계로 독일군의 공격이 이쪽 방면으로 집중될 것으로 예상했다. 프랑스 국내에선 절대 전쟁을 할 수 없다는 프랑스 측의 강력한 열망과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전이었으나, 당시 발전하는 비행기 기술과 탱크, 자동차 기술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지 못했으며, 신속 이동이 필요한 작전의 내용에 불구하고 무선 통신 설비가 각군마다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연합군의 계획에는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1.    마지노 방어선과 딕강 방어선 사이에는 룩셈부르크과 세 당을 연결하는 아르덴 산악 지대가 약한 방어선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중부 전선에 핵심 요충지인 세당의 방어선이 돌파될 경우 뮤즈 강까지의 천연 방어선을 활용한다고 하더라도 독일군이 연합군 주력의 후방으로 우회하는 것을 막기 힘들었다.

2.    연합군은 독일군에 비하여 전차와 야포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은 연합군을 상대로 항공 전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특히 전투기에서 프랑스군은 서류상으로는 700대 이상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총 생산량 역시 2000기 이상으로 나왔지만 각종 장비 부족과 정비 소요 등을 계산하면 약 500여 대의 비행기가 운항이 가능했고, 그중 전투기는 약 330대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가운데 영국군 역시 최신형인 스핏 파이터가 아닌 200대의 호커 허리케인을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는데 이는 독일군의 800여 대의 Me109 전투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는 초기 제공권을 독일군에게 넘겨주는 결과로 이어진다.

3.    연합군의 탱크는 숫자면에서 연합군이 1000여 대 이상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고, 탱크의 질도 독일군에 비하여 우수하였지만, 탱크를 운영하는 전술에서 탱크의 특징을 살리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탱크를 집중적으로 운영하면서 기동화된 보병의 탱크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닌 탱크를 보병의 보조 수단으로만 운영했다. 그 결과 전선에 걸쳐 탱크가 골고루 배치되는 결과를 낳았고, 개별 전투에서 독일군에 비하여 탱크의 숫자가 절대적인 열세에 몰리게 된다.

4.    연합군은 탱크 집단 운영과 제공권 장악 후의 항공기의 대지 공격 능력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다 보니 보병 전력에 대 항공 전력과 대 탱크 전력을 배치하는데 소홀했다. 또한 기동화된 전장에서의 원활한 통신 수단의 확보를 위한 무선 통신 기구가 일선 부대까지 배급되지 못하였거나 지나치게 오래되어 성능을 신뢰할 수 없는 수준인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미리 계획된 전선이 돌파될 경우 통신이 절단되어 혼란이 야기될 가능성이 많았다.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인 가믈랭 원수 -중앙-,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영웅이자 당시 유럽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현대화된 독일군의 기갑 군과 항공 전력, 빠른 진격 속도에 반응하지 못하였고, 자신들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여 속절없이 패하고 만다.)



5월 10일 전격적으로 시작된 독일군의 공격은 우선적으로 슐리펜 계획에 의거하여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 – 벨기에로 향하는 것으로 보였다. 독일군의 B 집단군은 페도르 본 보크 장군의 지휘 아래 29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연합군을 북쪽으로 유인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그의 부대는 연합군의 예상과는 달리 개전 5일 만에 네덜란드군의 항복을 받아 내고 개전 1일 만에 벨기에의 에방-에말 요새를 점령하며 연합군을 충격에 빠지게 했다. 특히 독일군은 개전과 함께 Me-109 전투기를 활용에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제공권을 장악했고, 전투기가 장악한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독일군 폭격기인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와 하인켈 중 폭격기가 연합군의 사기를 떨어트렸다. 특히 슈투카 폭격기는 급강하할 때의 찢어지는 듯한 소음을 내면서 정확한 폭격을 가함으로써 미리 준비된 방어 진지에 고정되어 있던 연합군 병력들은 속절없이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특히 에방 -에말 요새는 독일군의 낙하산 부대와 글라이더 침투병들의 공격에 속절없이 붕괴되면서 연합군이 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전에 독일군이 알베르 운하를 건너는 데 성공하여 연합군 수뇌부를 패닉에 빠지게 했다. 또한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을 독일군의 수중에서 방어하려 했던 연합군의 계획은 네덜란드 군이 연합군이 도착도 하기 전에 항복함으로써 차질을 빚고 있었다. 한편, 중앙의 아르덴 산악 지대를 통해 중심 공격을 지휘하는 게르트 폰 륀쉬테트 원수는 45개 사단에 7개의 기계화 사단을 배치하고 독일군 기갑 전술을 체계화시킨 전설의 혁명가 하인츠 구데라인이 독자적인 가깁군단을 A집단군에서 운영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앙군은 개전 초기 벨기에의 기동화 보병의 효율적인 방어에 막혀 약 8시간 동안 진격이 막혀 있었지만, 벨기에군이 프랑스 지원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후퇴함으로써 진격에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산악 지역에 갑자기 나타난 엄청난 숫자의 독일군 전차에 압도되었고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한 채 뮤즈 강 쪽으로 후퇴하여 그곳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한편 연합군은 독일군의 공격기 있고서도 2일 동안 아르덴 산악 지역에 나타난 독일군이 주공이 아닌 벨기에 쪽의 주공의 주의를 분산하기 위한 조공으로 판단, 병력의 증원이나 작전의 변경을 못하는 결정적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5월 11일 뮤즈 강변으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위협을 알아차린 가믈랭 사령관이 프랑스군 예비대에 뮤즈 강의 방어선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였지만, 독일군은 프랑스 방어선에 대공화기와 대전차 화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이용하여 뮤즈강을 돌파하는 데 성공한다. 프랑스군은 뮤즈강과 세 당의 방어를 준비하면서 100여 개의 요새화 된 진지들과 대규모의 야포들을 배치하여 강을 도하하려는 독일군을 격퇴하려고 하였지만, 독일 공군이 하루 3900회에 달하는 비행을 소화하면서 집중 폭격을 가하고 탱크를 이용하여 전선을 돌파해버리자 방어선이 붕괴했다. 특히 일부 지역의 방어병들은 방어선이 돌파되어 후방에서 독일군이 공격해온다는 소문에 진지를 버리고 후퇴해버렸다. 이에 세다 방어선의 총사령관인 가스통 비요트가 뮤즈강을 가로지르는 주요 교량 3개의 폭파를 위한 공중 폭격을 요청하였지만 연합군의 폭격은 연합군 폭격기 전력을 44%를 소모하기만 하였을 뿐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게 된다.


(독일군 전격전의 중심이 되어준 공군의 슈투카 전투기. 융커스 Ju-87이 재식 명칭이다. 1936년 개발된 이후 1944년까지 생산되었으며 독일의 패망 시까지 사용된 근접 지원 급강하 폭격기이다. 빠르게 전개되는 기갑 군의 경우 이들을 지원해줄 야포가 부족하게 되는데 야포의 지원 부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개발되었다. 수직에 가까운 강하 각도를 이용하여 목표물에 정확한 폭격을 가함으로써 빠르게 기동 하는 기갑전력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영국 항공전 이후 느린 속도와 빈약한 무장 때문에 적 전투기의 표적이 되었고, 점차 그 위력을 상실하게 된다.)



5월 12일 돌파구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독일군 독립 전차군단의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은 최대한 빠르게 프랑스를 가로질러 해안가로 진격하길 원했다. 그와 독일 참모본부의 만슈타인이 계획한 작전에 따르면 전 차부태는 최대한 빠르게 전개하여 연합군을 둘로 나누고 고립시켜 전쟁을 끝낸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구데리안의 직속상관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하루 8Km 이상의 진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결정은 독일군 서부지역 사령관인 륀쉬테트에 의해 다시 한번 확인된다. 하지만 이런 모든 지휘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구데리안은 직속상관인 클라이스트로부터 받은 “공세적 정찰”이라는 임무에 근간하여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프랑스군  제2군의 샤를 왕치제르는 스톤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역습을 지시하였고, 프랑스군과 독일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5월 15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되었으나 결국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반격을 물리치고 돌파구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가운데 7 기갑 시단을 지휘하던 롬멜은 스톤 지역의 격전과 구데리안이 프랑스군 6군과 9군을 포위 격파하는 사이에 발생한 틈새를 이용하여 빠르게 프랑스군의 전설을 돌파하였고, 직속상관의 지휘를 무시한 체 쾌속 진군을 거듭하며 프랑스 5 보병사단을 괘멸 시키고 하루 24킬로에 해당하는 속도로 진격을 시작했다. 5월 17일이 되자 롬멜의 군대는 포로만 1만 명을 사로잡을 만큼 전술적인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고, 19군단을 지휘하는 구데리안은 롬멜의 승리에 한껏 고무되어 더 빠른 통한 전쟁의 종결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군 최고 사령부와 히틀러는 롬멜의 믿기지 않는 승리와 진격 속도, 그리고 구데리안을 중심으로 한 기갑 지휘관들이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진격을 멈추지 않는 것에 경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프랑스군은 아직 60개 이상 의사단이 마지노 라인과 남부에 배치되어 충분히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었고, 몇몇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차들의 성능이 독일군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연합하여 독일 기갑 군의 측면을 반격한다면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승리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독일군의 기갑 전력이 전멸을 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독일 총참모부를 업습하고 있었다.


(프랑스 육군의 Char B1 중전차. 개전 당시 독일군은 Char-B1과 같은 중전차를 보유하지 못했고, 독일군의 전차로는 프랑스군 중전차를 대응할 수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전차를 보병과 포병의 보조수단으로 인식 집중 운영하지 못함으로써 탱크 기술의 우위를 전혀 이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미 상부에서부터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프랑스 수상 폴 르노는 프랑스 2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스톤 지역에서 양군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던 5월 15일 새롭게 영국의 수상으로 임명된 윈스턴 처칠에 전화를 걸어 “우리는 패배했습니다.”라고  읍소 했다. 처칠은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독일군이 연합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던 적이 있었지만 결국 막아낸 경험이 있다고 위로하고 격려했지만 프랑스 수상은 완전히 이미 전의를 상실한 것으로 보였다. 이에 프랑스로 직접 날아간 처칠은 이 같은 패배주의가 정치인들만이 아닌 군부에도 깊숙이 퍼져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데, 특히 총사령관인 가믈랭과의 대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처칠: (1차 세계대전 당시와 같이 파리를 방어한) 전략적인 예비대는 어디 있습니까?

가믈랭: 전혀 없습니다. (가믈랭은 전후 이 대답에 대해 “이젠 더 이상 없습니다”라는 의미로 대답한 것이라 설명한다)

처칠:  그렇다면 독일군이 돌파한 구역에 대한 반격 작전은 어디에 어떻게 수행될 것입니까?

가믈랭: 병력, 장비, 전술이 모두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 대화와 프랑스 전역을 돌아본 처칠은 더 이상 영국군이 프랑스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처칠 자신의 위치 역시 영국에서 안정적이지 못했다.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겠다는 의지로 무리하게 동맹국 체코를 희생시킨 채임벌린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노르웨이 작전에서의 실패와 프랑스 전선의 개전 인하여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내의 인기와 국민적인 신망이 가장 높았던 헬리팩스 경이 수상직을 승계함이 원칙이었으나, 헬리팩스 경이 영국 상원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하원 주도의 영국 의회를 지도할 위치에 가지는 못했음을 이유로 수상직을 고사하면서, 수상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 옹호론자로 낙인찍히고, 자유당 내에서도 지지 기반이 높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민적인 지지도 매우 낮은 인물이었다. 처칠의 이미지는 대외적으로 지나치게 호전적이고, 오늘 말 흔히 말하자면 막팔 파동에도 자주 휘말렸던 인물이라, 일부 극우파를 제외하면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또한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군 장교 출신에 1차 세계대전 중 해군상을 역임했지만, 갈라 폴리 작전, 유틀란트 해전과 같은 영국군이 패배하거나 논란이 되었던 작전에 책임이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처칠 자신도 그와 같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수상직을 지키려면 영국이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거나 최소한 영국군이 독일군에 괴멸적인 타격을 받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독일 기갑 전술의 창시자인 하인즈 구데리안. 전차의 집중 운용을 통한 전격전이라는 개념을 완성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후티어 대령이 지루한 참호전을 돌파하기 위해 창안한 전술에 전차 운영과 항공기 지원을 결합한 전격전은 지금도 주요 국가들의 기본 공격 전술의 근간이 된다. 아래는 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군의 주력 전차인 팬저 3 -3호 전차-이다. 프랑스 전역에서 대전차 임무를 수행한 전차로 37mm 대전차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Char1B나 영국군의 마틸다 전차와의 대결에서 장갑과 화력이 압도됨이 드러나 1942년부터는 보조적 임무의 전차로 변경된다. 3호 전차가 담당한 대전차 임무는 후에 개량형 4호 전차와 타이거 전차가 맡게 된다.) 



한편 독일군의 진격은 5월 19일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구데리안이 이끌던 19 기갑 군단은 솜강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영국 12, 23 사단을 공격에 대한 허가를 받기 무섭게 아미앵을 점령하고 아브빌에 위치한 교량을 장악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5월 17일까지 진격했던 위치에서 100km를 더 전진하여 연합군 A 그룹을 5월 20일에는 완전 포위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한편 영국군 참모총장인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는 5월 19일 영국 대륙 원정군의 지휘관인 고트경을 만나 모든 예비 병력을 동원하여 아미맹으로 공격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고트 경은 자신의 휘하의 대부분의 병력이 프랑스군의 지휘에 따라 북부에 배치되어 있고, 예비 병력은 2개 사단에 불과하다는 전황을 전해 듣는다. 이에 아이언사이드는 연합군 A군을 지휘하는 빌로테 장군을 찾아 가지만 빌로테 장군이 완전한 패배주의에 매몰되어 무기력한 상황임을 발견하고, 이를 고트 장군에게 알림과 동시에 영국 원정군이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으며, 즉각 철수를 준비할 방법을 찾을 것을 지시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프랑스 수상 폴 르노는 총사령관인 가믈랭 원수를 해임하고 막심 베이강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총반격에 나설 것을 지시하였지만, 베이강 원수의 취임과 계획 변경 등으로 5월 23일이 지나서야 반격 작전이 시작될 수 있었다. 여기에 정교하게 계획되어야 하는 북부 A 집단군과 남부 C 집단군 간의 공격 조율은 A 집단군 사령관인 빌로테 장군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면서 더욱 오리 무중에 빠지게 된다. 이런 혼란속에 영국군 사령관인 고트 경은 영국군의 철수를 23일 최종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연합군이 반격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작은 규모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반격이 독일군 수뇌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5월 21일 약 70대의 마틸라 전차와 2개 보병 대대, 그리고 1개 오토바이 대대로 구성된 영국군이 아라스에 위치한 독일군 7 기갑 사단을 기습했고, 5월 22일에는 캉브레를 프랑스군이 기습한 것이다. 특히 아라스를 향한 기습은 독일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당시 독일군은 길고 얇은 점령 구역을 병력들을 산개하여 방어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영국군의 기습이 이 전선의 측면의 약점을 파고들어 왔다. 아라스 전투를 총지휘한 헤롤드 프랭클린 소장은 초기 아라스 지역에 고립된 방어 부대를 구출하고 독일군의 통신-연락망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공격에 나섰다. 그의 부대 (프랑크 부대라고 불린다)의 공격은 대대적인 전술적 반격이 아닌 지역적인 반격에 불과했지만 좌측에 위치한 주공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16km까지 진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독일군 전선의 붕괴가 예측되기도 했다. 독일군으로는 다행히도 7 기갑 사단의 사령관인 롬멜의 지휘 아래 88mm 대공포를 대전차 화기로 활용하여 방어선의 최종 돌파를 위해 진격하는 영국군 마틸다 전차 24대를 격파하면서 방어에 성공하면서 전황이 바뀌었고, 이후 전술적 목표를 달성한 영국군이 독일군의 반격과 항공기 폭격을 피해 후퇴함으로써 독일군의 포위망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만쉬타인 계획과 독일군의 진격을 잘 보여주는 작전도이다. 독일 총참모부는 연합군이 남부와 북부에서 반격을 할 경우 지나치게 빠르게 전진한 기갑부대와 후위 보병부대 간의 연결이 끊어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이런 위험성에 대한 인식을 극대화시킨 것이 영국군에 의한 아라스 반격이었다. 당시 영국군의 소규모 마틸다 전차의 공격에도 독일군은 속 무무 책으로 돌파당했다가 롬멜의 지휘 아래 이를 격퇴한다.) 


하지만 20~21에 걸친 아라스 전투는 독일군 지휘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원래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 계획은 참모본부장인 프란츠 할더와 그의 부하들이 1939년 10웡에 계획한 황색 작전 (Case of yellow)를 기반으로 하겠다고 히틀러에게 보고 되었다. 독일 총 참 보본부의 초기 계획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슐리펜 계획을 좀 더 보완한 작전 계획이었다. 초기 계획은 슐리펜 계획과 유사하게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진격하여 연합군을 솜강 유역까지 밀어 내고 전선을 고착화시켰다가, 1942년이 되어 탱크와 병력이 더 준비가 되면 본격적인 프랑스 공격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 역시 1차 세계 대전 당시 무리한 공격으로 초기 가용 자원을 너무 많이 소진한 독일이 장기전에 패배했음을 염두한 장기전 계획이었지만, 독일군의 위대함과 우월성을 과시하고 싶었던 히틀러가 거부했다. 할더와 브라우 히치를 만난 히틀러는 폴란드에서와 같이 기갑 전력을 이용한 강력한 돌파 전술을 이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브라우 히치와 할더는 그런 전술이 준비가 덜된 폴란드군에게 먹힐지 몰라도 장비가 좋고 훈련이 잘된 프랑스군을 상대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펼쳤었다. 하지만 A 집단군을 지휘하는 륀쉬테트는 할더와 브라우 히치의 작전이 독일군이 19세기부터 발전시켜온 기동전 전략과 맞치 않으며, 전진의 가장 약한 방어선인 세 당을 돌파하여 적의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계획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륀쉬테트의 생각은 자신의 참모장인 만슈타인과 합의하면서 만슈타인이  입안하는 작전 계획을 준비하도록 했고, 이렇게 탄생된 것이 연합국을 혼란에 빠트린 만슈타인 작전이었다. 이 작전에는 독일 전격전 교리를 완성한 하인츠 구데리안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어 있었고, 이미 알려진 대로 아르덴 산악 지역을 돌파하여 세 당과 뮤즈강을 건넌 뒤 연합군의 주력의 후방에서 크게 우회하는 작전이었는데, 탱크전 신봉주의자인 구데리안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다 보니 당시 전투 사상에서 지나치게 혁신적이라는 비판을 들어왔다. 특히 독일의 일선 지휘관들도 이 작전 계획에 대해 연랍군이 저지대를 공격하는 독일군을 방어하기 위해 벨기에로 올라올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전략적 예비대 역시 주력부대 뒤쪽에 배치시킬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위험한 작전이라 판단했다. 심지어 작전을 입안을 지시한 륀쉬테트 마저도 작전 계획에 포함된 기갑 군단의 완전 독립적 운용에 대해 위험성을 지적하였고, 탱크의 취약점을 막아줄 보병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여기에 히틀러도 어느 정도 동의를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시작되자 구데리안의 기갑 군단은 연합군을 패닉에 빠지게 했지만, 작전이 성공하면 할수록 히틀러와 참모본부, 그리고 A집단군 사령관 륀쉬테트의 걱정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 연합군을 완전히 포위하였다고 생각한 순간 소규모 영국군의 반격에 독일군 기갑 군단의 방어선이 붕괴될 뻔 하자 모두가 깜짝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만슈타인 -위-와 롬멜 - 아래-. 구데리안이 독일군 전격전의 개념을 완성하였다면, 만슈타인을 프랑스 전역에서 이를 적용한 사람이고, 롬멜을 이를 실행한 사람이다. 특히 롬멩을 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적의 종심을 깊숙하게 침투하여 적의 혼란을 야기하는 작전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을 뿐 아니라 부족한 물자와 병력을 가지고도 임기 음변에 능한 전술 적용에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아라스 전투에서 대공포인 88mm 대포를 대전차포로 전환시킨 발상의 전환부터 아프리카 전선에서 압도적인 숫자의 영국군을 공포에 떨게 만든 그의 능력과 전술은 지금도 연구되고 있다.)


아라스 전투에서 롬멜의 뛰어난 지휘로 영국군의 공세를 막아내긴 했지만, 독일군의 충격은 상당했다. 진격 중이던 4군의 권터 폴 클루게는 륀쉬테트의 A 집단군을 지원하기 위해 진격 방향을 전환했고, 5월 21일 독일군 총참모본부는 아라스에 대한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낸 독일군은 모든 공세를 중단하고 보병이 전선에 투입되어 측면 방어를 강화할 것을 지시하고, 이는 히틀러에 의해 재차 확인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결정에도 불구하고 총참모장인 할더와 19 기갑 군단장인 구데리안은 연합군의 위협을 제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독일 기갑 군단이 연합군보다 먼저 영-프랑스 해엽의 길을 막아내는 것이라 보았다. 그들은 전술적으로 영국군이 도버해엽을 건너 탈출할 경우 장래에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고, 이에 따라 구데리안의 19 기갑 군단은 21-22일간에 걸친 정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22일 진격을 시작했다. 구데리안은 휘하의 제1 팬저 사단에게 칼레를, 제2 팬저 사단은 볼로뉴를 그리고 제10 펜저 사단에게 덩케르크를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5월 22일 당시 연합군의 대부분의 병력은 덩케르크로부터 100km 이상 내륙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구데리안의 명령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연합군은 바다로의 탈출이 완전히 봉쇄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5월 24일 A 집단군 사령부가 있던 샤르빌을 방문한 히틀러와 A 집단군 사령관 본 륀쉬테트간의 미팅에서 모모든 것 바뀌었다. 본 륀쉬테트는 덩케르크를 주변의 플랑드리 지역이 습지대가 전차의 기동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보병을 이용해서 아라스 지역에서 영국군을 공격함과 함께 기갑 군은 전선을 유지하면서 북쪽의 B 집단군의 진격에 밀려나는 영국군을 남하를 막는 것이 좋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 의견에 1차 세계 대전 당시 플랑드르 지역에서 근무하여 지역을 잘 알고 있는 히틀러가 동의하고, 미팅에 참가한 공군 사령관 괴링이 해안가에 몰려나온 영국군을 공군력만으로 괴멸시킬 수 있다는 허풍 역시 이런 진격 중단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륀쉬테트는 보병이 기갑 군에 합류할 때까지 A 잡 단군의 모든 진격을 멈추고, 기갑 군의 병력과 물자를 보충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덩케르크에 연합군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구데리안은 이와 같은 결정에 분노하였지만, 그의 부대도 상급 부대의 지원을 받지 않고 더 이상 독자적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5월 10일부터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매일 전투와 진격을 반복한 그의 부대 역시 탄약과 기름등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고, 그동안 손실되거나 고장 난 장비들을 수리할 필요도 있었다. 특히 병사들의 피로가 극에 달해 더 이상의 진격이 오히려 군대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상황도 고려해야 했다. 그리고 독일군이 24일부터 26일까지 3일 동안의 달콤한 휴식과 재정비를 하고 있는 동안 연합군은 덩케르크를 통해 영국으로 탈출하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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