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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빈 Aug 24. 2017

논란의 역사 -게티스버그 전투

당대 최고의 전술가 로버트 리 장군의 착각

미국 전쟁사를 돌아보게 되면 남북 전쟁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뉴질랜드 전쟁사를 둘러보면 많은 경우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벌어진 마오리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남북 전쟁은 지금의 미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남북 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어 보다가 보면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바로 남군의 지휘관이었던 로버트 E 리 장군에 대한 높은 평가이다. 로버트 리 장군은 지금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중 한명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적국의 총 사령관이었던 그였지만 그의 전술적인 식견이 당시 그를 맞이하여 싸웠던 다른 북군 장군들에 비하여 월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로버트 리 장군에게도 최악의 순간이 존재 한다. 바로 남북 전쟁의 결과를 결정했지만 전투의 결과보다 링컨 대통령의 연설로 더 유명한 “게티스버그 전투”가 그것이다. 

(게티스버그 전투 이후 촬영된 전장의 모습. 시체들이 여기 저기 버려진 모습이 전투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1863년 6월 북부의 조셉 후커 소장이 지휘하는 포토맥군을 챈슬러즈빌에서 격파한 로버트 E 리 장군은 서부 전역에서 북군의 율리시즈 그랜트 (이후 북군 최고 사령관에 오른다)장군의 부대가 서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빅스버그를 포위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남부군의 구원군이 제 시간에 빅스버그를 구원할 수 있느냐였다. 결국 리 장군은 빅스버그를 직접 구원하기 보다 남군을 북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으로 진격시켜, 북군에게 자신이 이끌고 있는 남군을 공격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통해 북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다면 물자와 인력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있는 남군에게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이와 같은 판단의 배경에는 2년간의 전쟁을 통해 북부에서는 링컨 대통령의 정책에 반감을 가지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었고, 만일 남군이 북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있다면 유럽 국가들로부터도 정치적인 지지를 받아 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 했다. 또한 그가 이끄는 남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필라델피아나 위싱턴 DC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한다면 빅스버그의 포위가 해결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 링컨으로 하여금 남부 연맹과 정전 협정을 맺도록 유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리 장군의 이와 같은 전략은 매우 과감한 것으로 수적이나 물자적으로 절대적 열세에 있는 남군이 방어가 아닌 공세로 나선다는 일종의 도박과 같았다. 더군다나 1차 북부 침공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보지 못했던 남군으로써, 2차 북부 침공은 성공하지 못할 경우 전쟁의 방향이 남부군의 패배로 귀결 시킬 수도 있었다. 반면 북군은 전쟁 이후 지휘관간의 정치적 알력과 의견 불일치로 인하여 인원과 장비적인 우위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포토맥군의 사령관인 후커는 챈슬러즈빌에서 리 장군에게 크게 패한 뒤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수세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링컨 대통령은 후커 장군을 포토맥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조지 미드 장군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후 남군의 북부 침공 작전 계획에 따라 리 장군이 포토맥강을 건너 북부로 진출하자 북군도 6월 29일 리 장군의 부대를 추적해 포토맥 강을 건넜다. 리 장군은 북군의 주력인 포토맥군이 자신을 추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격중이던 자신의 군 전체를 게티스버그 서쪽에 있는 캐쉬타운에 집결하도록 명령했다. 일단 병력이 집결되면 자신이 싸우기 좋고 방어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지형을 골라 북군의 공격을 유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남군을 추적하던 북군의 기병 사단장인 뷰퍼드는 게티스버그 지역의 전술적인 중요성과 지형적인 특성을 간파하고 그곳으로 남군의 주력을 유인하고자 했다. 뷰퍼트 소장은 게티스버스 남쪽에 위치한 산악 지역을 통제 할 경우 이 지역 전체를 감재함과 동시에 훌륭한 방어진지를 구축 할 수 있음을 확인했고, 남군의 일부 병력과 교전을 하면서 남군을 이 지역으로 유인 할 경우 큰 피해를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게 북군의 유인에 걸려든 남군이 게티스버그 지역으로 진격해 옴으로써 역사적인 게티스버그 전투가 1863년 7월1일부터 시작되었다. 뷰퍼트는 게티스버그의 서쪽에 위치한 고지대에 자신의 부대를 배치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함과 동시에 남쪽에 있는 “공동묘지 언덕” 방면에 방어선 구축 역시 지시했다. 이와 함께 뷰퍼트의 긴급 구원 요청을 받은 레이롤드 소장의 제 1 군단이 이 지역에 도착하여 방어선 구축하면서 남군의 진격을 막았다. 반면 남군은 총 병력이 아직 캐시타운에 집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헨리 히스 장군이 지휘하는 남군의 사단급 병력이 게티스버그 지역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인 실질적으로는 리 장군의 전략이나 지시 사항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으로, 병력이 집결되기 이전까지 북군과 교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 불구하고 히스 소장은 북군의 병력 규모를 파악한다는 명분으로 교전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7월 1일 하루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남군은 다행이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에 있는 북군을 몰아 붙여 게티스버그 마을을 장악하는데 성공 했으며 북군은 남쪽의 “공동묘지 언덕”에 마련된 방어선으로 후퇴 해야만 했다. 7월 1일 오후 늦게 게티스버그에 도착한 리 장군은 작전 지역을 살펴보고 이 지역이 교통의 요지로 전략적 가치가 있다는 점을 확인 함과 동시에 북군이 “공동묘지 언덕”에 방어선을 완전히 구축할 경우 공격이 불가능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2 군단의 리처드 이월 중장에게 “상황을 보아 공동 묘지 언덕을 점령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점령하라”라고 명령을 내리는 첫번째 실수를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명령을 받은 이월 중장은 하루 종일 행군과 전투로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고지를 공격하러 나가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티스버그 전투 2일차 상황도. 푸른색 줄이 북군의 방어선 붉은색이 남군의 공격 방향이다. 북군의 좌측으로 조지 시클 장군의 3군단이 방어선 앞쪽으로 나와 남군을 상대하다가 괴멸되는 상황을 잘 묘사해 준다. 시클의 3군단이 괴멸 됨으로써 북군은 패배의 문턱까지 가게 되지만 뉴욕 140연대와 메인 20연대의 영웅적인 방어전에 따라 남군의 공격이 좌절된다.)

이후 7월 2일 아침이 되자 북군의 주력인 포토맥군의 2, 3, 5, 6, 12군단이 게티스버그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남군도 조지 피켓 소장이 지휘하는 피켓 사단을 제외한 부대들이 속속 게티스버그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 장군의 7만 5천명의 부대중 주력군을 구성하는 제1 군단의 제임스 롱스트리트 중장은 게티스버그에서 북군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남군의 의도가 워싱턴 DC에 대한 압박을 가함과 동시에 북군에게 피해를 야기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7월 1일 전투가 마무리 될 무렵 전장에 도착한 롱스트리트 중장은 게티스버그의 지형과 북군의 방어선을 관찰한 다음 이곳에서 북군을 공격했다가 남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즉각 이와 같은 그의 의견을 리 장군에게 알리면서 남군을 게티스버그 전장에서 빠져나가도록 해야 함과 동시에 북군의 현재 위치를 남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워싱턴으로 향하는 지역까지 진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만일 남군이 그와 같이 우회 기동을 하여 지금 북군이 위치한것과 같은 좋은 고지나 능선을 미리 점령할 경우 북군은 남군이 점령한 지역을 되찾기 위해 공격 해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리 장군은 “적군이 이곳에 있는데 어디로 간단 말이요?”라고 말하면서 롱스트리트의 제안을 거절했다. 롱스트리 장군은 이후 이 결정에 대해 리 장군이 7월 1일 전투에서의 승리에 흥분하여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리틀 라운드 탑에서의 마지막 돌격을 그린 TV 드라마의 장면. 당시 북군 메인 20 연대는 총탄이 모두 떨어진 상황으로 방어에 나설 수 없어지자 남은 부대원들이 모두 총검을 장착하고 고지 아래로 돌격했다. 갑작스러운 북군의 돌격에 놀란 남군이 후퇴함으로써 전투는 북군의 승리로 끝난다. 미군 역사상 가장 용감한 돌격으로 평가 받는 이 돌격을 통해 메인 20연대 지휘관 체임벌린 대령은 미국 의회에서 수여하는 Medal of Honor를 받았다.)   

결국 리 장군과 남군 총 병력 7만 5천명은 게티스버그 남쪽의 무덤 능선을 중심으로 구축된 북군의 방어선에 대한 총 공격을 7월 2일 시작한다. 하지만 리 장군은 7월 2일에도 전술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북군의 좌측 면을 우회 공격하기로 결정한 롱스트리트 장군의 부대에게 전면 공격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이유로 2일 오후 4시까지 공격 허가를 내지 않은 것이다. 이 결정적인 시간 동안 북군은 좌측에 비어있는 공간은 북군 공병 장군인 웨렌의 판단에 따라 뉴욕 140 연대와 메인 20연대 그리고 대포로 보강 되었고, 좌측 사면을 공격하기로 했던 롱스트리트 장군 휘하의 후드 장군의 사단이 이들에 의해 공격이 격퇴된다. (이 전투를 일컬어 Battle of Little Round Top이라 하며, 메인 20연대의 지휘관인 조슈아 체임벌린 대령이 총탄이 떨어지자 병력 전부에게 총검을 착검하고 돌격을 지시하여 공격해오던 남군을 격파한 사실은 미군 역사상 가장 용감한 돌격으로 평가 받는다.) 한편 북군의 좌측을 우회 공격하려던 리 장군의 작전이 무산되자 남군은 공격 방향을 우측으로 돌려 북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북군 사령관 미드 장군은 좌측면을 방어 하면서 3군단이 괴멸되고 3군단 사령관인 다니엘 시클 장군이 중상을 입어 전선이 붕괴되자 우측방을 방어하던 병력 중 2만명을 급히 좌측의 방어를 위해 투입하여 우측면을 방어하는 병력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야간 공격을 시작한 남군은 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면서 우측면의 일부 고지들을 점령하고 돌파구를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야간 통신 수단 부재로 인하여 상호 협력 작전이 무산되면서 7월 3일 아침이 되자 북군의 반격을 받아 점령했던 고지들을 포기하고 후퇴하게 된다.

이렇게 7월 2일의 전면적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군의 최고 사령관인 리 장군은 미국 군사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되는 공격을 계획하게 된다. 바로 롱스트리트 장군의 1군단 병력중에서 7월 2일 늦게 전선에 도착함으로써 아직 게티스버그 전투에 참전하고 있지 못하고 있던 조지 피켓 장군의 사단을 이용해서 북군의 중앙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에는 좌측과 우측을 모두 공격당한 북군 이들 지역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군을 이동 시켰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는데, 남군에게는 불행하게도 북군 사령관인 미드 장군은 이와 같은 리 장군의 계획을 예상하고 이 지역에 방어진지와 대포등을 배치해 방어를 강화해 놓고 있었다. 7월 3일 1시부터 시작된 남군의 포격은 약 150여문의 대포에서 2시간동안 북군의 방어진지를 격파하기 위해 계속 되었지만, 북군의 방어 진지를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또한 북군은 남군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남군의 포격에 대응 포격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이 시간 동안 배치되어 있던 대포의 수를 100문에서 160문으로 증강 남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7월 3일 오후 3시 리 장군은 조지 피켓 장군의 부대에게 1.2Km의 엄패물이 없는 평지를 지나 고지에 참호와 방어선에 숨어 있는 북군을 향해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피켓 사단의 돌격을 지휘한 조지 피켓 소장) 

하지만 조지 피켓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군 장군들은 이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상대방에 구축된 방어 진지를 향해 진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자살과 같은 행위라는 사실을 전날의 전투를 통해 남군측 지휘관들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화에 따르면 진격 바로 직전 피켓 장군은 직속 상관인 롱스트리트 장군에게 “Shall I go General? –제가 가야만 합니까?”라고 두번이나 물었지만 롱스트리트 장군은 리 장군의 결정에 항명 할 수 없기에 조용이 피켓 장군을 외면했다고 한다. 결국 1만 2천 5백명의 남군 병사들이 1.2km를 걸어서 지나갈 동안 북군의 대포들이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일부 남군 병력이 북군의 대포까지 도달하였고, 그중 일부 병력들은 북군의 방어선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북군 보병과 백병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남군의 최후 공격은 격퇴되고 만다. 한 시간이 채 안된 이 공격에 참가한 남군 1만 2천 5백명 중에 약 6500명이 죽거나 전투 불능에 빠졌으며, 부상자의 대부분은 북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북군측의 기록에 따르면 약 37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남군은 여기에 중령 이상 장교만 26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피켓 장군의 사단의 3개 여단장 전원이 죽거나 포로로 붙잡혔고 전투에 참가한 15명의 연대급 지휘관 또는 지휘 본부의 장교중 11명이 죽거나 부상 당했다. 전투가 끝난 뒤 퇴각을 준비하며 리 장군이 피켓 장군에게 사단 병력을 추스려서 후퇴시 방어 준비를 하라는 명령에 피켓 장군은 “General Lee, I have No division – 리 장군, 난 사단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피켓은 리 장군이 자신에게 이 돌격을 명령했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리 장군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피켓의 돌격을 영화로 재 구성한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TV 미니 시리즈 "게티스버그"의 한 장면이다) 

남군의 야심차고, 과감한 전략이었던 2차 북진은 게티스버그에서의 실패로 끝났고, 남북전쟁의 결과에서 남군이 더 이상 승리 할 수 없음 역시 이 전투를 통해 결정났다. 남군과 북군 모두 이 전투를 통해 양측 모두 2만 3천명의 인명 손실을 보았지만, 남군은 이 전투 이후 더 이상 공세적인 움직임을 취하지 못하게 된다. 게티스버그는 남북 전쟁의 전환점이자 근대 전투에서 현대 전투로의 변화 역시 감지된 전투이기도 하다. 리 장군은 남북 전쟁이 끝날때까지 뛰어난 전술과 지도력을 보이면서 북군을 괴롭혔지만 남군에게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리 장군이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실패한 원인을 보면 아래 두 가지 이유로 볼 수 있다.

(피켓의 돌격을 지도로 설명하고 있다. 남색으로 표시된 북군의 방어선을 향해 정면 돌격을 감행한 조지 피켓 소장의 1만 2천명의 병사들은 한시간도 안되는 전투 시간 동안 절반 이상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게 된다. 게티스버그 전투의 최종 패전을 남군측으로 결정 짖게되는 공격으로 리 장군의 무모한 공격에 대한 비판을 지금도 받는다.)   

첫째로 리 장군이 본인이 세웠던 작전 계획을 중간에 수정하면서 생긴 혼선에 있다. 게티스버그 전투의 내용을 잘 살펴 보면 리 장군을 비롯해서 많은 남군 장군들이 크고 작은 실수를 계속 저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첫날 전투가 마감될 무렵 전장에 도착하여 북군에 대한 공격을 결정한 것은 리 장군 자신이 세웠던 최초 계획을 무산 시킨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북진 계획의 목표는 전투의 지역을 북군이 점령하고 있는 필라델피아 지역으로 함과 동시에 북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도록 유도함으로써 북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 운동과 유럽 국가들의 압력을 이용해 북부와 남부의 평화 조약을 이끌어 내는 정치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리 장군은 게티스버그 전투 첫날의 승전에 도취되어 패전하는 북군에 대한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에 집중하다 자신의 전략적인 목표를 잠시 잊고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항상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기동과 우회를 통해 자신의 방어와 공격적인 위치를 스스로 결정하는 전술적인 입장에 서도 무기력함을 보였다. 이는 첫날 전투의 승리의 효과가 결국 리장군의 사고의 프로세스를 잠시 멈추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터널 비전과 같이 자신이 보고 싶은 상황을 보면서 결과를 낙관하는 심리적 상태에 그가 빠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공격을 할 때는 항상 그 기세를 유지해야 함에 불구하고 최초 전투를 시작한 2 군단의 이월 중장에게 “공동묘지 언덕을 즉각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자율권을 부여한 결정은 두고 두고 회자되고 있다. 만일 3일째에 시도된 조지 피켓 사단의 공격과 같이 무모할 정도의 공격을 첫날 이월 장군에게 지시했다면 아마 게티스버그의 결과도 그리고 현재 미국의 역사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남북 전쟁 당시 사용된 Minie Ball. 이전에 사용되는 구슬형 탄환과 달리 유선형의 공기 역학적인 형태와 뒤쪽에 있는 공간이 화약 폭발과 함께 팽창하여 총열에 꼭 맞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탄환이 총렬에 나있는 강선을 따라 회전하는 라이플링 효과를 얻을 수 있게 설계 되었다. 현대적인 총탄이 개발의 선구적인 형태가 된 총탄으로 남북 전쟁에서 개인화기에 의한 병사들의 부상이 급증하는 원인이 된다.)  

두번째로 리 장군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장군임에 불구하고 정면 공격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구식 전법을 구사 했다는 점이다. 리 장군이 피켓 장군에게 지시한 돌격 전술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유효 할 수 있는 전법이었지만, 남북 전쟁에서는 유효하지 못한 전법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총탄의 발전에 있었는데 1848년 프랑스의 기술병과 장교인 클라우드 미니에가 개발한 “미니볼 Minie Ball”은 개인 화기의 정확도와 발사 속도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병기였고, 이 “미니볼”이 위력이 처음 시험된 전장이 미국의 남북 전쟁이었다. 미니볼 이전의 총탄은 대부분 구슬의 형태를 하고 있어 총신안에 꽉 끼도록 만들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구슬은 총열보다 약간 작게 제작 되었고, 이에 따라 조준을 한다고 해도 12발에 한발이 (비 전투 상황에서) 명중이 가능할 정도로 정확도가 없었다. 하지만 미니볼은 총탄의 모양을 현대적인 형태로 바꾸어서 공기 역학적으로도 유리할 뿐 아니라 총탄 뒤쪽에 있는 공간이 화약의 폭발과 함께 팽창함으로써 발사시 총신안에 꽉 끼일 수 있어, 총알에 회전을 주는 라이플링 (총신 안에 강선을 파 총탄에 회전을 줌으로써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 목표를 맞추는 기술)이 더욱 용이해 졌다. 이와 같은 기술의 진보는 전술의 변화를 가지고 와야 하는데, 남북 전쟁 당시에는 양측 지휘관들이 이와 같은 기술의 진보에 대한 전술적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나폴레옹 전쟁 당시와 같이 병사들이 어깨를 마주 대고 일제 사격을 함으로써 부정확한 머스켓 사격 (총신 안에 강선이 없고 총렬 보다 작은 구슬 총탄이 발사되는 형태)의 단점을 집단 사격으로 만회 하고자 하는 전술을 그대로 채용함으로써 그 피해가 예전에 비해 급증했다. 쉽게 말해 만일 피켓 장군의 사단이 19세기 초반에 전투 환경이였다면 북군의 진지에 도착할 때까지 피해가 실제 피해의 20% 정도밖에 안되었겠지만 미니볼과 향상된 대포 조준술 때문에 상상한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군사 전술이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피해가 급증하게되는 사례는 제 1차 세계 대전에서도 반복되는데, 1883년 미국인 하이럼 맥심이 채용한 기관총을 방어 전술에 적용하는 전술을 개발하면서도 상대방이 기관총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예상하지 못한 지휘관들의 아둔함 때문에 엄청난 규모의 병사들이 양측의 참호 사이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기업에서도 발생하는데 신 기술이나 트랜드가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이를 경영진이 제때 발견하지 못할 경우 그 피해는 회사의 몰락이나 구조 조정과 같은 형태로 기업의 구성원들이 보게 되는 결과가 비일비재하다. 경영진이나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항상 트랜드와 신기술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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