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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빈 Aug 23. 2017

논란의 역사 - 독일의 프랑스 침공

덩케르크 철수 작전 그 두 번째 이야기

그곳을 사수하라..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독일군의 전면적인 진격 중단이 지시되기 하루 전인 5월 23일. 영국 원정대 사령관인 고트경은 아라스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던 영국군에게 퇴각을 명한다. 고트경은 프랑스의 새 사령관인 베이강 원수가 수립한 반격 계획에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고, 반격이 힘들 경우 플랑드르 지역을 고수하라는 베이강의 제안 역시 믿지 않았다. 고트경은 베이강의 제안대로 해안을 등지고 수세적인 저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항만 시설이 준비된 항구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연합군이 확보하고 있는 항구들은 이미 독일군의 공격권에 들어왔었다. 5월 23일 독일군 제2 기갑사단이 볼로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고, 24일에는 칼레도 독일군 10 기갑사단에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다행히 칼레를 수비하던 영국군은 독일군의 칼레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했고, 그 기간 동안 칼레 지역에 집결하고 있던 프랑스 군과 영국군 28000여  영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영국군이 해안으로 통해 영국으로 탈출하려고 한다는 것은 자명해 보였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상황에도 독일군은 덩케르크를 향해 26일까지 전진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연합군에게 독일군에게 모두 몰살당하거나 모두 포로로 잡히게 되는 참패의 어두운 기운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5월 25일 전쟁 상인 엔소니 이단에게 영국군 총사령관 고트경은 “귀하께 숨겨서 뭐하겠습니까? 영국군의 주력 군대와 대부분의 장비는 가장 최선의 상황에서도 대부분 상실될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대규모의 철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항구와 항만 시설이 반드시 필요했지만 독일 육군의 진격이 멈춘 동안 독일 공군에 의한 덩케르크 시가지와 항만 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이어져 철수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영국 육군은 덩케르크 해안 지역을 최대한 방어하기로 결정했고, 영국 해군은 재빨리 대륙 원정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5월 26일 엔소니 이단이 고트경에게 “프랑스 군과 벨기에 군에 알리지 말고 병력들을 서쪽으로 후퇴시켜 최종적으로 철수하라”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덩케르크 해변을 통한 철수 작전이 시작된다. 고트경은 철수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Lys 운하를 경계선으로 하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아직까지 철수하지 못한 영국군에게 퇴로를 열어 주고자 했다. 임무를 맡은 영국군 2사단과 50 사단, 그리고 1,5,48사단은 독일군의 거센 공격을 받으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방어선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 이방 어선을 통해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던 3,4,42 사단과 프랑스군 1군의 30%가 덩케르크 지역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5월 27일이 되어서 영국군과 프랑스 군은 덩케르크를 두고 치열한 격전을 치르기 시작하는데, 독일 공군의 지속적인 폭격 이외에 독일 포병의 포탄이 덩케르크 시가지에 떨어지기 시작한 것도 5월 27일 이후부터였다. 한편 Lye 운하를 중심으로 한 전투가 진행되는 5월 26일 고트경은 3군단 장인 로널드 아담 중장에게 덩케르크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지시하고, 2군단장인 알란 브룩 중장에게는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하는 작전을 수행할 것을 지시한다. 이에 브룩 중장은 벨기에 국경 지대의 빗스하에터까지 진격하여 독일군에 대한 공세를 진행한다. 브룩 중장의 3 군단은 자신들을 공격해온 3개 사단 규모의 독일군을 상대로 그의 28일까지 빗스하에터 지역으로의 진출을 막아 낸다. 하지만 이후 브룩 중장의 부대는 덩케르크로 철수하던 중에 벨기에의 포페린케 지역에서  독일 공군과 육군의 공격을 받아 44 사단이 괴멸되는 것과 같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이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이 지역을 통해 3 사단과 50사단이 철수에 성공하고, 카셀 지역에서 영국 글로스토셔 연대의 2대대 와 옥스포드셔 연대의 4대대가 독일군의 진격을 27일에 30일까지 저지하는 데 성공하면서 철수 작전에 필요한 시간을 벌게 된다. 한편 프랑스 3군단을 제외한 5개 사단은 독일군의 추격을 따돌리지 못해 릴에서 롬멜이 이끄는 독일 7 기갑 사단을 비롯한 7개 사단에 포위를 당한다. 퇴로가 완전히 막힌 절망적인 상황에서 프랑스 몰리에르 소장은 대부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출신으로 구성된 병력 40000명과 탱크 50여 대를 가지고 300대가 넘는 독일군 전차와 15만 명의 독일군을 6월 1일까지 묵어 두는 데 성공했고, 이들의 용맹에 감동한 독일군은 이들이 항복할 때 그들의 용기를 기리는 퍼레이드를 허용했다.

(릴 전투에서 탄약을 모두 소진하여 결국 항복한 몰리에르 소장 휘하의 릴 방어군이 독일군의 경례를 받으며 철 수하고 있다. 릴 전투는 독일군 기갑의 주력인 롬멜의 제7 기갑 사단을 비롯한 주력군 대부분을 이 지역에 묵어 둠으로써  영국군의 철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프랑스 전쟁 당시 지리 멸멸 무너지던 프랑스 군이었지만, 이들과 같이 용맹을 떨친 부대들도 다수 있었다)



한편, 영국군 사령부가 영국 원정대의 탈출을 결정한 것은 5월 25일이었고, 본격적인 탈출이 시작된 것은 5월 27일이었다. 일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다시 진격을 시작한 독일군에 맞서 치열한 지연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영국 해군은 해변가로 몰려온 영국 원정대를 병사들을 탈출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해변가로 몰려온 병력은 프랑스군과 영국군, 일부 벨기에 군대를 포함하여 약 35만여 명. 영국 해군이 이들 병력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철수시키기 위해서는 항만 부두 시설이 필요했고, 덩케르크는 프랑스 북부의 최대 항구였지만 항만 시설과 도시는 이미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많이 파괴된 상황이었다. 이에 현지 상황을 전달받은 처칠을 비롯한 영국 해군 수뇌부는 덩케르크에 모인 영국 원정대의 철수가 5월 26과 27일 양일간 약 45000명을 철수시키는 것을 목표로 계획된 다이나모 작전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진행한다. 영국 해군과 처칠을 비롯한 수뇌부는 27일이 후에 영국군이 덩케르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원래 계획한 45000명에 절반에 불과한 27000명만이 26~27일 양일간 덩케르크를 탈출할 수 있음으로 해서 이들의 걱정이 현실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안감 이영국 수뇌부를 감쌌다. 독일 공군은 27일부터 덩케르크 지역에 대한 폭격을 강화하고 남아 있는 항만 시설과 유류 저장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덩케르크 지역의 급수 탱크가 파괴되어 불을 끌 수 없게 되면서 항구와 도시에 폭격으로 발생한 화재로 마치 지옥과 같은 분위기기 연출되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참가한 배에서 본 덩케르크 해안의 모습.


5월 28일이 되자 연합군에게 더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 졌다. 덩케르크 지역이 북부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벨기에군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가 독일에 항복함에 따라 전투에서 이탈해버린 것이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철수를 위해 배치한 방어선의 한쪽이 독일군에게 완전히 열린 상황이었고, 그곳으로 독일군이 밀려들어온다면 덩케르크의 함락과 연합군의 몰살은 자명한 일이었다. 고트 장군을 비롯한 원정대 사령부는 급하게 영국군 3, 4, 50사단을 동쪽의 벨기에군 방어선으로 이동 시킴과 동시에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맡은 방어선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한편 27일과 28일의 독일 공군 공습으로 덩케르크 지역의 항구 시설을 사용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당시 덩케르크의 해안 지역 방위와 철수 작전을 감독하던 영국 해군의 윌리엄 테넛 대위는 벙력들을 해안가 모래사장을 통해 철수할 것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큰 배가 가까이 올 수 없는 얕은 수심 때문에 병사들을 작은 배를 이용해 큰 구함이나 수송선까지 나르는데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린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윌리엄 대넛 대위는 덩케르크 동쪽과 서쪽에 설치된 방파제를 임시 부두로 사용하여 병력을 철수시킬 것을 제안하고, 29일부터는 방파제에 접안된 배들을 통해 병력들의 철수가 진행된다. 한편 영국군은 덩케르크 항구에 가해지는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방어하기 위해 순양함 캘커타를 배치했고, 구축함 39척, 코르벳을 비롯한 소형 전투함 9척, 36척의 기뢰함을 동원하였고, 그 외에도 민간의 어선과 요트를 비롯한 600여 척의 배를 동원하여 최대한 많은 병력들을 덩케르크에서 철수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독일 공군의 지속적인 공습과, 도버 해역을 지키고 있던 독일군 잠수함의 공격은 덩케르크를 탈출해서 영국으로 향하던 병사들에게 지옥을 선사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진행하던 중 해안가 있는 병사들을 독일군 공군기들이 공격하는 장면이다.



29일 오 후부 터는이 전까지 병사들을 태우고 운항하던 배를 공격하던 독일 공군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해변에 나와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서있는 병사들을 목표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여 더욱 많은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영국 공군 역시 독일 집단 학살을 막기 위해 덩케르크 해안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날아왔지만 숫자적 우위와 공군 전술적인 이점을 가진 독일 공군의 공격을 다 막아내진 못했다. 5월 29일은 덩케르크 철수가 가장 큰 위험에 빠진 날이기도 하다. 독일 공군은 29일 하루 동안 10척의 영국군 구축함과 8척의 일반 함정을 침모 시켰다. 특히 29일 오후에는 방파제에서 병사들을 태우기 위해 정박했던 10척의 영국군 구축함 중 7척이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아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구축함이나 배들이 덩케르크를 빠저 나왔다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독일 해군은 연합군의 탈풀을 막기 위해 영불 해협 간에 곳곳에 기뢰를 부설해놓고, 기뢰를 피해 항해하는 배들을 공격하기 위해 잠수함들을 배치시켜 놓았다. 병사들을 나르기 위해 최대한 무개를 가볍게 하고 프랑스에 도착해 병사들을 갑판에 가득 채운 영국 해군의 배들은 잠수함의 먹잇감이 되었다. 29일 덩케르크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3개의 항로 중 남부 항로를 통과하던 영국 구축 함중 3척이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탈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을 태웠던 배와 함께 바닷속에 수장되었다. 하지만 이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5월 29일 영국군은 4만 7천여 명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덩케르크에서 병력을 태우고 영국으로 돌아 오다가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있는 영국군 구축함이다)


한편 덩케르크 해안 철수 구역에 대한 방어 전투는 30일까지 계속되었다. 방어선을 지키던 영국군은 병사들이 모두 죽거나 부상당해 대대장급 장교들이 기관총 사격을 할 만큼 큰 피해를 입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특히 31일 뉴포트 지역을 돌파당할뻔한 영국군은 긴급 투입된 지원병력과 함께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 냈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 중에 전장을 이탈하는 병사들에 대한 즉결 처분과 같은 극단적인 지휘 행위도 영국 군내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반면 이렇게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5월 30일과 31일 2일 간독일 공군은 나쁜 기상 상황으로 공세에 나서지 못했고, 이 양일간 영국군은 12만 명이 넘는 병력을 덩케르크에서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5월 31일 영국 원정대의 사령관인 고트 경도 프랑스를 최종적으로 떠난다. 6월 1일이 되자 독일 공군과 육군은 덩케르크에 있는 연합군의 병력을 최종적으로 격멸하기 위해 최종 공세에 들어가지만 독일 공군의 공세가 이어지기 전까지 6월 1일에만 6만 4 천명의 연합군이 프랑스를 떠날 수 있었다. 영국군의 최종 후퇴를 담당했던 부대중 4000명의 잔류 부대는 6월 2일과 3일 밤을 이용하여 탈출에 성공하고 야간을 이용하여 4일까지 지속된 최종 철수 작전에서 프랑스군 10만 명이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총 33만 명의 연합군이 덩케르크 해안을 떠나 영국에 도착한다.

덩케르크 해안에서 독일 공군의 공격을 받는 영국군 병사의 모습. 소총으로 대항하려고 하는 절망적인 모습이 담겨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왜 무너졌나?


덩케르크 작전이 끝나고 영국 신문은 이 작전을 가리켜 기적이라 불렀지만, 영국군은 병력 이외에 대부분의 장비를 프랑스에 두고와 향후 수개월 동안 전투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덩케르크를 통해 영국으로 탈출한 대부분의 프랑스군 은영 국 남부에 집결했다가 프랑스가 독일군에 최종적으로 항복하게 된 6월 22일까지 프랑스로 돌려보내졌다. 영국 국민들은 돌아온 병사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영국 정부와 해군, 그리고 처칠을 찬양했지만, 덩케르크의 성공은 승리가 아닌 다시 싸우기 위한 잘 진 전투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덩케르크와 릴 전투, 그리고 아라스 전투 등에서 성공적인 전투를 보여주었음에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졌고, 프랑스는 영국군의 철수하고 군 수뇌부의 사 기가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제대로 된 싸움도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육군과 당대 최고의 해군을 가진 영국군이 재 무장을 선언한 지 6년도 안된 독일군에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몰락은 역사를 통해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전형적인 실패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전차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에 의해 개발되었고, 가장 현대적인 전차인 르노사의 FT-17은 1차 세계 대전 말기 기동전의 진수를 독일군에게 전수하기도 했었다. 특히 1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육군 중령이었던 조지 패튼은 르노 전차를 이용하여 독일군의 전격전과 유사한 전투를 수행하여 독일군에 큰 충격을 안겨준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탱크의 활용에서 보병의 보완적인 위치를 넘어서지 않도록 하는 교리를 유지하였고, 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을 살려 강력 한진지와 화력을 우선시하는 전략을 고수함으로써 전략 -전술적인 부분에서 독일군에 뒤쳐졌다. 특히 프랑스 군의 경우 2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대통령에 오르는 샤를 드골과 에밀 마이어 같은 군 전략가들이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막대한 손실을 안겨준 참호전과 강력한 요새, 그리고 물량전의 타계책으로 전문화된 군대와 보병의 기동성 강화, 그리고 탱크의 집단 운용 및 공군 전력 강화와 같은 군사 구조 개혁을 30년대 중반에 강력하게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적응하지 못했다. 여기에 스페인 내전을 거치면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던 현대화 및 강화를 육군 강화 및 요새 개발에 뒤에 놓음으로써 독일군에게 전략적인 우세를 안겨주는 모양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공군과 육군의 기동화의 부족은 무선 통신 기술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쳐 전선이 빠르게 변화하는 새로운 전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특히 프랑스 전선에서 프랑스군이 일정 지역을 점령하고 통신용 전화선을 깔면 독일군 탱크와 기계화 보병들이 이를 이용해 프랑스군의 위치를 파악 한 다음 전화선을 끊고 통신이 두절된 부대들을 각개격파 해 버리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프랑스군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전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프랑스 군 사령부를 비롯한 군 수뇌부는 마지노 라인의 강력함에 고취되어 벨기에 정보당국이 파악한 아르덴 산악 지역을 통한 독일 기갑 군의 기습 가능성과 에방-에말 요새에 대한 독일 공수 부대의 기습 가능성도 무시했다. 당시의 프랑스 군의 모습은 스스로를 세계 최강의 육군이라 치켜세우면서 자신들을 상대로 독일군이 폴란드군을 상대했듯 모험적인 전술을 택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이러한 확신 때문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상황에 따라 전쟁 이진행 되리라는 편향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한 패전이었다.


2차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대통령에 오른 샤를 드골이 1934년 출판한 Vers l'Armée de Métier (전문 군대를 향하여). 프랑스 군의 기계화와 전문화를 주장했다.
전후 프랑스 대통령에 오른 샤를 드골의 모습. 2차 세계대전 이전 프랑스군의 비대화와 화력지상주의를 비판하고 기계화 전술의 도입을 주창한 선지자이기도 했다.


독일군의 놀라운 성공 그리고 성공에 가려진 약점들


독일군이 프랑스 전역에서 거 둔 전과는 전 세계를 패닉에 빠지게 했다. 세계 최강 프랑스 육군이 전쟁 개시 2주가 채되기도 전에 괴멸되었다는 사실과, 독일군이 보여준 놀라운 스피드의 진격은 이전에 어떤 전쟁에서도 볼 수 없었다. 심지어 독일군 총 참모본부와 히틀러 마저도 독일군의 승리에 너무 놀랐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성공은 조공을 맡아 네덜란드, 벨기에로 침공한 독일 B 집단군이 예상을 뛰어넘는 전과를 올리면서 네덜란드 군과 벨기에군을 격파한 것과 뮤즈 강에서 프랑스 군이 결정적인 반격을 기회를 놓친 것과 같은 운도 따른 면이 없지 않지만, 독일군의 성공은 전차와 항공기 그리고 기계화 보병을 적절하게 잘 융합시킨 바에 따랐다. 또한 전장에서 실제 작전 을지 휘했던 구데리안을 비롯하여 롬멜과 같은 지략가들이 총참보 본부와 히틀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설정한 전략 목표를 얻기 위해 병사들을 독려하고 진 격을 멈추지 않은데도 그 공로가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독일군의 승리는 이후 독일군에게 크나큰 아픔이 된다. 먼저 독일군이 프랑스 침공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이 지휘관들의 뛰어난 지휘 능력과 전술 적용으로 두드러지지 않아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점이다. 독일군의 가장 큰 문제점들은 아래와 같았다.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주력인 4호 전차. 포신이 짧고 구경이 큰 특징을 보인다. 주로 보병과 같이 이동하며 보병에게 화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1.    독일군은 기갑 전력을 집중 운용하는 방식으로 탱크의 숫적 우위를 항상 점유하는 전술을 적용했지만, 탱크 자체는 프랑스 군이나 영국군의 탱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독일군은 대전 차용인 3호 전차와 보병 지원용 4호 전차를 따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고폭탄과 구경이 큰 장갑탄과 고폭탄을 모두 쓸 수 있는 구경이 큰 포를 전차에 탑재하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대전차 용으로 개발된 3호 전차가 뛰어난 기계이고 높은 효율성을 갖추었지만 프랑스군이나 영국군의 전차를 상대하기에는 무기가 빈약하고 장갑은 너무 얇았다. 때문에 아르스 전투나 스톤 지역 전투에서 소수의 영국 마틸다 전차나 프랑스의 Char B1등에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했다. 프랑스 전투 이후 독일 육군은 비교적 프레임이 튼튼한 4호 전차의 장갑을 강화함과 동시에 주포를 강화하는 계획을 실시하고자 했지만, 프랑스 전역의 승리에 도취된 히틀러의 명령에 이와 같은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소련과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독일군은 프랑스-영국 전차보다 훨씬 우수한 T-34 전차와 마주하게 된다.


1941년 11월  이후에 개량된 4호 전차. 주포의 길이가 길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대구경의 대전차 탄을 쏠 수 있는 75mm 대전차 포를 장비 했다.


2.    독일 공군은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전선, 그리고 프랑스 전선에서 무적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공군의 주력 기종인 Me-109나 폭격기인 Do-17, HE-111 그리고 급강하 폭격기인 Ju-87 스투카는 육군의 근접 지원 및 중거리 공격에 알맞은 비행기들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공군의 궁극적인 목표가 제공권의 장악과 상대방의 공군력 괴멸이라고 볼 때, 독일 공군은 이와 같은 주도적인 입장을 맡기에는 조금은 부족한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항속 거리와 무장 능력이었는데, Me-109는 프랑스에서 이륙하여 영국 상공으로 날아가 영국 하늘의 제공권을 장악하기에는 항속거리가 짧은 기종이었다. 기종의 설계 개발 단계에서부터 제공권 장악을 위한 비행기가 아닌 요격기로 설계되었기 때문이기도 한 문제로 이후 동부 전선에서도 이와 같은 항속거리의 문제는 독일을 상대하는 국가들의 생산 시설을 공격하거나 이를 무력화시키는데 부족하다는 사실로 드러난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수송대의 모습. 동부 전선에서 찍은것으로 추정된다. 기계화된 현대식 부대로 알려진 독일군의 수송부대는 차량이 아닌 말이 주요 운송 수단이었다.


3.    독일 육군은 빠르게 기계화를 진행하면서 전차와 보병 운송 수단에 대한 개발을 빠르게 진행하여 왔지만 이들을 지원하는 수송 부대의 기계화에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독일 육군은 이후에 일부 수송 부대의 운송 수단을 자동차로 변환했지만,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도 독일군의 주요 수송 수단은 마차와 말로 구성된 수송단이었고, 이는 빠른 진격을 생명으로 하는 독일군 기갑 군에 항상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해변에서 공격 받고 있는 영국군의 모습


독일군은 왜 멈추었나? 그리고 그들이 멈추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실은 독일군이 왜 수 차례 진격을 멈추었냐라는 점이다. 전후에 많은 독일 장군들, 특히 A 집단군 사령관을 지낸 륀쉬테트 같은 장군들은 프랑스 전선에서의 진격 멈춤이야 말로 전쟁 기간 내내 독일이 자초한 잘못된 결정 중 최악의 결정이었다고 비판하며, 모든 것이 히틀러 때문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 하는 이야기 중 하나로는 히틀러가 전쟁 말기 덩케르크에서 영국군의 탈출하도록 놔둔 것이라 주장했다는 증언도 있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영국과의 전쟁보다는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국군에게 최악의 패전을 안겨주는 대신 도망치도록 함으로써 영국의 호의를 얻어 평화 협정을 맺고자 하는 목적이 이런 결정에 뒤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히틀러가 육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을 뿐 공군에 의한 영국군과 연합군의 탈출을 봉쇄할 것을 명령하였던 점을 보면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독일군의 진격 중단 명령이 내려지게 된 것에는 아래 몇 가지 사안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 본다.

3호 전차를 타고 진격중인 독일군.


1.    독일군 합동 참모 본부와 상급 지휘부는 탱크만의 독자적인 진격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독일 탱크가 프랑스나 영국군의 탱크와의 전투에서 이길 수 없음을 이미 인지하여, 자칫 무리한 진격을 하다가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볼 것을 우려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에 따라 지나치게 빨리 진격하여 보병과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진격을 멈추게 하였다. 특히 이미 언급한 아라스 전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 군의 반격을 당한 독일군은 탱크만을 앞세운 공격의 측면이 노출되는 문제가 있다고 보고 보병의 호위 없이 탱크를 진격시키지 말 것을 명령한 것은 이런 분석에 힘을 실어 준다.

2.    독일군 기갑 부대의 진격을 수송대가 따라올 수 없음으로 인해 진격을 중단시키지 않았을 경우 독일군의 기갑 부대는 심각한 연료 부족과 탄약 부족 그리고 병사들의 휴식 부족으로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이미 얘기한 독일군의 수송 체계의 낙후성에 대한 분석이 한몫을 하고 있다.

3.     본 륀스테트와 히틀러가 24일 만났을 당시 같이 배석했던 헤리만 괴링이 독일 공군만으로 포위망에 갇혀 있는 연합군을 괴멸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육군에게 필요한 휴식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이유로 등장한다. 괴링이 히틀러에게 공군에게 기회를 달라고 했다는 사실은 륀슅테트가 확인하였다, 당시 상황을 회상은 륀쉬테트는 독일 공군이 기갑 군을 지원하는데 많이 지쳐있어 공군만의 능력으로 연합군을 괴멸시킬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고 회상하였는데, 괴링의 간청이 진격 중단의 직접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일종의 구실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2차 새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처칠. 수상 임명 직전까지도 당내와 국내의 인기는 미미했고 덩케르크 철수의 성공이 없었다면 처칠의 수상직도 곧 끝날 운명이였다.


독일군의 진격 중지 명령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역사학자들 간에 계속되고 있지만, 일 독일군이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면 5월 25~26일 경에 독일 기갑 군이 덩케르크에 연합군보다 먼저 도착하였을 것이라는 것에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도 동의를 한다. 만일 독일군이 덩케르크에 연합군보다 먼저 도착했다면, 연합군은 바다를 통해 탈출하는 것을 포기하고 베이 강 원수의 계획에 따라 남쪽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탈출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성공하던 실패를 하던 엄청난 수의 영국군과 프랑스 군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영국군이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 못하고 덩케르크 인근에서 항복하였다면 (싱가포르에서 그랬듯이) 2차 세계 대전의 결과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영국 정부의 회의록과 정부 부처 간의 메모, 보수당 내부의 기록들을 살펴본 역사 학자들은 만일 덩케르크의 기적이 없었다면 영국은 포로로 잡힌 영국 원정대의 무사 귀환 및 영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대가로 독일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 주장하는 처칠은 아마 수상직에서 낙마했을 것이고, 헬리팩스 경과 같은 온건파가 정권을 잡고 독일과의 평화 협정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독립과 왕실의 안위를 위해서 당시 최강으로 불리던 영국 해군과 영국의 해외 식민지도 양도를 고려하고 검토를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만일 덩케르크의 기적이 없었다면, 그리고 독일군이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면, 유럽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였건, 누군가에겐 천운이 작용한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그로 인해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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