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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빈 Aug 28. 2017

논란의 역사:  워터 게이트 스캔들

리처드 닉슨을 둘러싼 논란과 탄핵 그리고 사임까지 

얼마전 우리 헌정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 이루졌다. 그로 인해 새롭게 집권한 집권 세력이 이전 정부의 문제점을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희망으로 이 글을 시작해 본다. 탄핵이라는 것은 국민이 선출한 최고 권력자로부터 권력을 빼았는 행위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들이 국회와 사법부에 행정부의 독재를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이다. 민주주의를 처음 정치 체계로 받아 들인 그리스의 아테네에도 일종의 탄핵이라 할 수 있는 도편 추방제를 운영했는데, 아무리 정치력이 좋고 훌륭한 인물일지라도 아테네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추방 할 수 있는 제도였다. 하지만 아테네의 도편 추방제도에 대해서는 “중우정치”의 대표적인 모습이라 비판을 받고 있는데, 여론을 조작하여 경쟁자를 제거했던 여러 사례들 떄문이기도 하다. 근세 사회에 들어오게 되면서 의회 정치에서 탄핵이 아테네의 도편 추방제도 이후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은 1373세기 영국의 “Good Parliament”가 에드워드 3세의 사후 섭정을 하고 있던 랭카스터 가문의 부패를 규탄하면서 였다. 당시 에드워트 3세의 병사 이후 프랑스에서 획득한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던 영국의 대외적 상황에서 랭카스터 공의 정치적 조언자였던 윌리엄 라트머를 비롯한 사람들이 의회에 의해 탄핵되었다. 결과적으로 탄핵은 실패 하였지만, 라트머를 비롯한 관리들이 재판에 회부되고 공직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탄핵은 본격적으로 민주주의와 의회주의 제도에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독일, 불가리아. 브라질 미국, 영국, 인도, 홍콩, 아일랜드, 이태리등에서 탄핵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브라질의 호세프 대통령이 재정적자를 감추기 위해 국영은행 자금을 사용한 혐의로 탄핵된바 있다. 하지만 근세 역사를 통 털어서 세계 역사에 가장 크게 탄핵이라는 단어를 기억하게 만든 사람은 아마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일 것이다. 1972년 대통령에 압도적인 표차로 재임되었음에 불구하고 물러나야 했던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 실질적으로 탄핵이 되지 않았고, 처벌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탄핵이라는 단어에 가장 많이 연계되는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그의 몰락을 가지고 온 워터 게이트가 이번 논란의 역사의 주인공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한 워터게이트 호텔)


1.     사건의 발단


1972년 6월 17일 민주당의 전국 위원회 사무실이 운영되는 워싱턴 DC의 워터 게이트 호텔에 괴한들이 침입 했다는 신고가 접수 된다. 신고자는 호텔 경비원인 프랭크 윌스. 그는 저녁에 주차장에서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잠금 장치가 테이프로 막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 그는 항상 그렇듯이 청소 직원들이 그런 것으로 생각 했다. 하지만, 12시가 다되어가는 시간에 실시한 재 순찰에서 동일한 테이프가 다시 발견되자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유는 청소업체 직원들이 모두 철수한 뒤에도 테이프로 자물쇠를 막아 놓은 건 이상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긴급 출동한 경찰에 5명의 용의자가 민주당 전국 위원회 사무실에서 체포 된다. 경찰은 그들이 단순 강도를 주장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장비들에서 도청 장비가 있는 것을 발견했고, 사무실에서도 두개의 도청 장비 (한 개는 고장나 있었다)를 발견한다. 5명은 모두 강도 미수와 불법 도청 혐의로 기소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건이 발생할 당시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이 미국 정치 역사에 가장 큰 스캔들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공화당 후보였던 리처드 닉슨은 여론 조사에서 이미 두자리 수 이상의 차이로 닉슨이 우세 한 상화이였다. 어느 누구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선거의 승리와 재선이 확실한 상황에서 무리해서 민주당 선거 사무실을 도청할 이유는 없다고 믿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기획 운영한 대통령 재선 위원회 인물들. 이들은 대통령 선거 이전에는 각종 언론과 반대파 정치인 및 민간 운동가들의 사찰하는 행동을 불법적으로 자행해왔다) 



2.     사건의 전개: 언론과 사법부의 반격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닉슨과 그 지지자들이 생각한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 되기 시작한다. 일단 선거 사무소에 도청을 하려고 했다는 사실로 연방 수사국 FB수사를 시작하고 수시간 만에 용의자 두명인 마르티네즈와 바커의 수첩과 주소록에서 하워드 헌트라는 이름이 발견 되었기 때문이였다. 하워드 헌트는 전직 CIA요원으로 대통령 재선 위원회의 자금 담당한 고든 리들리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고, 이는 대통령 재선 위원회와 불법 침입 및 도청 사건간에 연개점이 들어 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재선 위원회의 의장이자 전 법무부 장관인 존 미첼은 사건과 위원회의 연관성을 강력 부인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 되는 중 1972년 8월 수사관들은 워터게이트 호텔 용의자중 한명의 계좌에서 25000달러의 수표를 발견하게 되고, 이 수표가 대통령 재선 위원회에서 발행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의혹은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다. 이 무렵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는 이미 사건의 대통령 재선 위원회가 강력하게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알려주는 정보를 얻게 되고, 워싱턴 포스트의 초보 기자였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취재를 통해 이번 사건의 이면에 법무부와 CIA, FBI 그리고 백악관 까지 관련된 은폐 시도가 있다는 사실을 기사화 한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들은 뉴욕과 워싱턴 포스트의 취재 내용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박해 오고 있는 대통령 선거에 모든 관심을 기울일 때라 기사의 주목도가 높지는 않았다. 여기에 닉슨 행정부는 1969년부터 FBI를 이용하여 언론사들의 기자들을 도청하고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에는 세무 조사를 강행하는 등 비판적 언론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에 닉슨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언론들은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즈, 그리고 이후 타임지가 여론을 호도하는 거짓 기사를 만들어 내고, 사실 관계를 왜곡한 기사들을 만들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백악관을 비롯한 권력기관의 개입에 대한 의혹을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기자. 이후 이들의 이야기는 "대통령의 사람들"이라는 영화로 제작된다) 


그렇게 대통령 선거에 모든 이슈가 파묻히는 과정을 거치면서 닉스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표 차이로 대통령에 재선되고, 워터 게이트와 연관된 사실들도 체포된 사람들과 기소된 사람들이 처벌 되는 것으로 끝나는가 했다. 하지만 1973년 1월 미국 연방 지방 법원에서 진행된 사건에서 모든 주류 언론의 이목을 끌게 된다. 당시 사건에 기소된 4명의 침입자들은 모두 유죄를 인정하였고 헌트 역시 유죄를 인정했다. 여기에, 다른 두명의 용의자 (존 멕코어와 리들리)는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사건의 심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재판을 담당한 시리카 판사가 이 사건에 배후에 권력 기관의 관여가 있다고 의심하게 된 것이다. 심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시리카 판사는 용의자들에게 백악관이 이 사건에 관여한바가 있는지를 직접 물어 보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누가 이 강도 용의자들의 변호사 비용을 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용의자도 변호사들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시리카 판사의 이 질문은 모든 주요 언론이 관심을 끌게 됨과 동시에 워터 게이트 사건에 대한 추가적인 언론 조사가 필요함을 인지 하게 된다. 1973년 1월 20일 대통령 직에 취임한 닉슨은 자신의 백악관 비서진들과 연쇄 회동을 통하여 워터게이트 사건이 더 이상 자신의 대통령직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 그는 이 책임을 자신의 백악관 법무 담당인 존 딘에게 부여하고, 백악관에서 나가는 모든 정보를 통제하면서 워터 게이트 사건이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할 것을 명령했다. 한편 같은달 30일에 진행된 워터게이트 사건 최종 판결에서 무죄를 주장한 두명의 용의자 존 멕코어와 고든 리들리에게 유죄를 선고되었다. 하지만 재판을 담당한 시리카 판사는 다시 한번 사건에 배후에 권력기관 특히 백악관이 관여 되어 있음을 강력하게 의심하면서 “ 본 사건의 판결을 통해 어떠한 실체적인 진실도 밝혀지지 못했다”라고 말함과 동시에 미국 의회의 조사를 강력하게 요청하게 된다.

(미국 지방 법원의 존 시리카 판사. 워터게이트 사건의 재판을 진행하면서 사건 은폐에 대한 강력한 의구심을 가지게 된 시리카 판사의 역할로 워터게이트 사건이 많은 언론과 여론 그리고 의회의 관심을 받게 된다)



3.     의회 청문회 그리고 대통령의 비밀 대화

1973년 2월 7일 시리카 판사의 강력한 요청과 언론의 의혹 제기로 시작된 워터 게이트 사건에 대해 조사하기 위한 미 상원 조사 위원회가 구성된다. 이들은 닉슨 대통령의 선거 기간 동안 불법적인 행위가 있었는지를 조사하고, 이와 같은 사실들을 대통령이 지시 했는지 또는 은폐를 지시 했는지 여부를 밝혀 내고자 했다. 3월 23일 최종 판결문을 읽는 자리에서 시리카 판사는 무죄를 주장했던 용의자 존 메코어의 자필 편지를 공개한다. “이번 사건에 용의자들은 정치적인 압력에 의해 유죄를 인정하거나 침묵을 강요 받았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백이였으며, 백악관에는 결정적인 치명타였다. 3월 28일 닉슨은 법무부 장관인 리처드 클라인디엔스트에게 백악관 직원이나 자신 모두 워터 게이트 사건에 대해 아는바가 없다고 얘기 했지만 사건의 은폐 조작의 책임을 지고 있던 존 딘은 점점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4월 15일 리처드 닉슨은 존 딘이 워터 게이트 사건의 조사를 받은 수사관들과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존 딘이 모든 은폐 공장에 중심에 있다고 뒤집어 씨우기 위한 미팅을 가진다. 이 미팅에서 존 딘은 자신과 대통령의 대화가 녹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고, 다른 비서진인 홀드먼과 얼릭먼이 물러나긴 하지만 모든 워터 게이트 사건의 은폐의 주범으로 자신이 지목될 것이라는 사실을 닉슨과의 대화에서 인지하게 된다. 4월 17일 존 딘은 법무부의 조사관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닉슨에게 공개하고, 헐드먼과 얼릭먼 역시 조사 대상에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4월 30일이 되자 닉슨에게는 다른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존 딘은 최소한의 진실을 밝히고 사과를 함으로써 대통령적인 구하자고 했지만 이는 이미 거부된 상태. 그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닉슨은 자신의 최측근인 홀릭먼과 얼릭먼이 워터 게이트 사건에 연관된 바가 있다고 발표하고 그들을 해고한다. 하지만 사건을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닉슨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홀드먼과 얼릭먼은 닉슨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그를 보좌해온 측근들이였고, 워터게이트 사건이 커지지 않도록 최 전방에서 언론과 국회 법무부를 상대해온 사람들이였다. 하지만 그들이 물러나자 닉슨이 이모든 일들을 직접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와 함께 닉슨은 새롭게 임명된 법무부 장관인 엘리옷 리차드슨에게 특별 검사를 임명하여 워터 게이트 은폐 의혹에 대해 조사 하도록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의회 증언으로 닉슨 행정부의 불법적인 정보 습득 및 관리 행위를 폭로한 내부 고발자 존 딘. 그는 닉슨이 자신을 워터게이트 은혜 의혹의 주범으로 몰아 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내부 고발자로 변모했다. 내부 고발자로 변하기 이전 존 딘은 닉슨에게 은폐 시도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대통령직을 유지 할 것을 요청 했지만 닉슨에 의해 거부 당한다.)



그리고 5월 17일 미 상원의 워터게이트 청문회가 시작되었고, 5월 18일에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할 특별 검사로 아치볼드 콕스가 임명되었다. 닉슨은 이제 의회의 정치적인 조사와 법무부 특별 검사의 형사 조사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특히 엘리옷 리차드슨은 아치볼드 콕스 특검에 대통령과 워터게이트 사건의 연관성을 조사 해줄것을 요청함으로써 일부 측근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려고 한 닉슨의 의도가 벗어난다. 그리고 6월25일. 백악관 법무 담당관이자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 총책임을 맏았던 존 딘이 상원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 딘은 전국 TV로 생방송 되는 청문회에서 245페이지에 달하는 증언서를 8시간 동안 읽어 내려갔다. 내용에는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일어났던 각종 불법적인 감청, 언론 통제, 사건 은폐, 강도 행각을 통한 자료 탈취, 정보 조작 행위를 비롯한 불법적인 선거 운동 및 음모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7월 16일에 증인으로 출석한 백악관 부 보좌간인 알랙산더 버터필드에게 대통령 집무실에 감청 장치가 있다는 증언을 한다. 존 딘의 주장은 단순한 그의 주장일 수도 있었지만 집무실에 설치된 비밀 감청 장치는 존 딘의 주장을 증명 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있는 사안이였다. 그리고 모든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은 백악관의 비밀 도청 내용에 쏠렸다. 과연 닉슨은 무엇을 말했는가? 그리고 이를 전혀 알지 못했던 일부 백악관 직원들과 정부 관리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특별 검사인 아치볼드 콕스와 의회는 닉슨 대통령에게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된 비밀 도청 내용을 담은 테이프를 제출 할 것을 요구 했다. 그러나 닉슨은 이를 안보와 국가 기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제출을 거부했다.



(닉슨이 집무실 비밀 도청 테이프를 공개하지 않는 것에 대한 풍자 만화.)



4.     닉슨 탄핵의 위기에서 결국 물러나다

이제 모든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미국 국민들의 관심은 닉슨의 비밀 도청 내용에 집중되었다. 그 내용이 닉슨의 워터 게이트 사건의 관여 여부를 밝혀 내는 결정적 증거인 스모킹 건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닉슨은 특별 검사 아치볼드 콕스에게 집무실 도청 테이프의 소환 요청을 철회 할 것을 명령 하였지만 콕스는 이를 거부 하였고, 양측을 둘러싼 긴장이 극대화 되기 시작했다. 10월 20일 닉슨은 법무부 장관 엘리엇 리처드슨에게 특별 검사 콕스를 해고 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은 이를 거부하고 자진 사임을 한다. 이에 닉슨은 법무부 차관 윌리엄 럭셀스하우스에게 콕스의 해임을 다시 요구한다. 그러나 법무부 차관 역시 이를 거부하고 사임한다. 코너에 몰린 닉슨은 법무부 차관보 로버트 보크를 통해 특검을 해임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는 닉슨의 정직성에 대한 심각한 의혹을 낳게 되고 언론은 “토요일의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사태를 조명한다. 점차 악화되는 여론에 밀려 TV에 나와 인터뷰를 한 닉슨은 11월 17일 유명한 “I’m not a Crook” (난 사기꾼이 아니다)라고 주장 했지만, 이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그가 사기꾼이라는 이미지만 강화 시켰다. 그리고 미국 대배심을 통해 1974년 3월 닉슨의 집무실 비밀 도청 내역을 공개 하라는 판결이 내려졌고, 1974년 7월 24일 미연방 대법원은 비밀 도청 내역이 담긴 테이프 전체를 편집 없이 공개 할 것을 판결함으로써 닉슨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테이프에는 존 딘과 닉슨이 1973년 3월에 가진 대화 내용을 비롯해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행한 행위와 계획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1974년 8월 5일 추가로 공개된 테이프에 대통령과 그의 측근인 스윙글스, 그리고 홀드먼이 워터게이트 사건이 벌어지고 며칠 뒤에 나눈 대화가 담겨 있었다. 그 대화에는 CIA를 이용해서 FBI의 수사를 방해하고 막을 것을 논의하는 내용이 있었고, 이것으로 닉슨의 미래는 이미 결정 되어 버리게 된다. 최종 테이프가 공개 되기 전 7월 24일, 열린 미의회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27-11로 사법권 및 재판권 방해 혐의로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고 29일과 30일에 각각 집권 남용과 의회 모독 혐의로 탄핵이 제안된 상황에서 마지막 테이프의 공개는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테이프 공개 후 하루 뒤인 8월 6일 의회 법사위에서 탄핵안에 반대표를 던진 10명의 의원들이 탄핵안에 찬성함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8월 7일 공화당 수뇌부의 베리 골드워터와 휴 스콧이 백악관을 찾아와 사임을 요구하자 1974년 8월 8일 저녁 전국에 생방송되는 TV를 통해 닉슨은 대통령적을 사임하게 된다.




5.      워터 게이트는 왜 일어 났는가?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의 비밀주의와 소통 부재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와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집착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 들여진다. 닉슨 스스로 워터게이트 호텔에 사람들을 보내 민주당 선거위원회의 사무실을 도청하도록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현재는 밝혀진 사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닉슨은 재선을 통해 대통령에 임명되면서 압도적인 표차이로 승리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찬반 여론으로 두갈래로 갈라진 여론에 밀려 베트남 철군을 결정했지만 베트남을 절대 포기하거나 베트남의 공산화를 두고볼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대통령 선거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를 확인해야 차기 행정부의 정책을 집행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그는 거의 선거 본부와 선거 기획단에 민주당의 선거 전략과 약점을 더욱 자세히 면밀하게 검토하고 정보를 수집해 줄 것을 요구했고, 이에 그의 측근들이 워터게이트에 있는 민주당 선거 본부에 대한 도청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러한 도청과 감청을 비롯한 각종 불법적인 정보 수집 행위는 이미 1971년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반전 운동가인 대니엘 엘스버그의 정신과 의사의 상담 기록을 훔쳐내는 것과 같은 행위 들이 그런 행위였고, 이런 행동들을 수행한 사람들이 워터 게이트 사건때 체포된 인물들이였다. 결국 워터게이트 자체는 단순히 실패한 불법 도청 사건이였지만, 닉슨과 그 측근들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불법적인 행위가 모든 대중들에게 공개 되어 정권의 몰락을 가지고 올 수도 있는 일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사건이 발생하자 닉슨과 그 참모들은 사건의 은폐에 앞장 섰고, 이런 시도는 상당히 오랜 시간 성공적으로 수행되는 것 같았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 미국 역사상 정치 스캔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유일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닉슨의 대외 정책에 대한 의회의 견제가 이루어졌으며,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에 운영되는 각종 지원 단체에 대한 자금 운영의 투명성이 높게 요구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내에 언론의 입지가 강해지고 언론인의 지위가 50년대 맥카시즘 반대 운동 이후 더욱 강해진 계기가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진실과 정의는 결국 그 모습을 드러내는것. 후버 국장의 사망 이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FBI는 정권에 대한 충성이 강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FBI는 사건을 수사 하면 할수록 백악관과 법무부 그리고 CIA의 방해가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고, 결국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의 총 책임을 맡은 마이클 펠트 부국장이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수사에 방해를 받고 있는 사안들을 언론에 비공개적으로 유포하게 된다. 그가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에게 지속적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의 정보를 제공한 정보 제공자였다. 실지로 마이클 펠트는 워싱턴 포스트 이외의 여러 언론에 이와 같은 사실들을 제공하고 공론화 하고자 하였지만 이에 관심을 가지고 기사화 한 사람들은 워싱턴 포스트와 이후 뉴욕 타임즈였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되는 사람은 미국 지방 법원의 시리카 판사였다. 그는 자신의 앞에 주어진 사건의 배후에 더 큰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이를 자신의 권한으로 알아 내고자 노력 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밝히는 것이 자신의 권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를 공론화 하고 의회에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하여 여론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법관의 의무가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시리카 판사의 행동은 정당화 되고 존경받을 수 있다. 그가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을 했는가의 여부를 두고는 아마도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역시 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고민과 진실의 추구는 결국 닉슨의 모든 노력을 물거품을 만드는 시금석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닉슨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언론과 법조인의 사명감을 통한 진실의 추구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너무나 잘 들어난 사례가 아마 워터게이트 사건 일 것이다.

6.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심판 최종 결정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국회 탄핵 소추 이후 3개월간 진행된 대통령의 탄핵 심판은 우리 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칠 수 있을 것임과 동시에 개혁과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 본다. 가장 큰 이유는 탄핵 심판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진 사법 체계의 허술함과 공정성의 부재, 그리고 전문직 특히 법조인과 정치인들의 수준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일종의 자괴감을 주었다. 하지만 이런 느낌들이 이들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자성과 시스템에 대한 보완의 필요성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법조인과 사법 체계에 대한 알수 없는 신비감을 접을 수 있게 되었고, 정치인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수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언론인들과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의 허상과 위선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된것 만으로 우리 사회는 다시 한번 변화와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본다. 물론 탄핵 국면과 특별 검사들의 수사, 그리고 각종 의혹들을 통해 알려진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부조리에 대한 인지도 우리 사회의 변화에 기여 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유명 작가이자 강연자인 지그 지글러는 “문제를 해결하는 첫번째 단계는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 문제가 무엇인지 인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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