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_[차단하겠습니다(1)]

소심한 사람의 정말 작은 일탈

by 민돌새








학창 시절, 음악 과목 수행평가를 보기 하루 전 날은 내겐 지옥이었다.



가창 시험이든, 리코더 연주 시험이든 똑같았다.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저 수십 명의 친구들이 나의 훌륭한 연주를 기대하며 주목하고, 한 번의 실수라도 했다간 바로 종이에 '감점'이라고 기록하려고 벼르고 있는 선생님의 시선이 두려웠다.



부담과 걱정 속에서 잠을 설쳤고, 시험 당일 아침에는 꼭 배탈이 났다.



사실 음악 과목에만 그런 건 아니다. 체육과목 수행평가, 중간고사, 모의고사 등 거의 모든 시험 날에는 그랬다.


(의외로 수능 날에는 멀쩡했다.)







다른 친구들은 어쩜 그리 아무렇지 않은지, 부러웠다.





나이가 좀 더 들고 나서야 내게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스물네 살 즈음, 지인 부탁으로 버블티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커피 가족 족보를 외우는 것이 자신이 없어 카페 아르바이트는 절대 안 하려 했는데, 제발 와달라는 부탁에 내심 고마워서 잠시 일했다.







하지만, 역시나 족보는 두렵다. 버블티면 버블티지, 맛이 20가지는 됐다. 토핑 추가는 또 뭔가.



첫 출근 포함하여 이틀 동안, 일단 보고만 있어도 된다는 말에 멀대같이 서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민폐가 되는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눈치를 챙겨 먹다 배부르다 하고 퇴근하는 것이 영 불편했다.




그래서 하루 만에 레시피를 달달달 외웠다. 동생에게 쪽지시험도 봐 달라고 했다.







다음 날, 점장님은 주문 족족 레시피를 완벽하게 구사해 내는 나를 보고는 직원들을 불러 칭찬했다.

칭찬이라는 게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나라는 사람은 또 여기서 새로운 걱정이 생기고 만다.



'레시피를 다 외웠으니 이제 뭐든지 잘 하겠지, 하고 기대하시겠지?'





그날 밤도 오만가지 생각에 잠을 잘 못 잤다.

생각해 보면, 나의 아르바이트 생활은 늘 이 패턴이었다.










입사를 했을 때에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첫 출근 때에는 아침 6시에 맞춰둔 알람이 울기도 전에 눈이 떠져 초조한 마음으로 출근 시간을 기다렸고, 3개월 정도는 다음 날에 할 일을 미리 다 해두고 퇴근했다.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업무 처리 속도가 느리면 눈칫밥을 먹을 것 같아서다.


상사에게 혼이라도 나는 날에는 하루 종일 그 생각이 나서 모든 업무를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어느새 뜻하지 않게, 거진 매일 야근을 해가며 열심히 하는 인턴으로 소문이 났다.







주변에서는 나를 꽤나 좋게 보았다.










하지만 나의 심신은 매일매일 피곤이 추가되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주변 말을 들어보니, 내가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퇴근하면 퇴근한 거지, 집에서도 그렇게 회사 생각만 하면 텐투텐 아니야? 피곤할만하네~. 왜 그렇게까지 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 근데 나는 그게 안되는 사람인가 봐. 내일이 너무 걱정돼."


"퇴근하면 나는 너무 좋아서 회사 생각 하나도 안 나는데. 너도 스위치를 딱 꺼봐!"


"무슨 스위치?"



"업무 스위치. 퇴근하면 딱 스위치를 끄고 퇴근 후에 뭐 할지 행복한 생각만 하는 거지. 맥주를 먹거나, 밤 산책을 하거나 그런 거."





그렇게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나에겐 말처럼 쉽지 않다. 땀이 나는 것을 어떻게 안 나온다 상상해서 멈춘단 말인가?


마음가짐의 문제인가 싶어 며칠 동안 그 '업무 스위치'라는 것을 의식하며 노력해 보았지만, 잘 실천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야근을 해도 좋은 제안서가 나오지 않아 집에 가서까지 작성한 제안서가 오전 회의 중에 대차게 까여버렸다.




처음에는 '그래도 말을 부드럽게 해줄 수도 있지 않나?' 하고 상처를 받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해 간 건데... 그렇게 별로인가?' 하고 억울했다. 내 실력에도 의심이 갔다.




오전부터 마음을 얻어맞고 나니, 오후까지 쭉 생각이 이어졌다.


아직까지도 침을 튀기며 혼을 내던 대표와, 나를 쳐다보기 뭐 해서 애써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동료들의 표정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한 번씩 눈물도 차올랐다.






당연히 업무에도 지장이 갔다.









결국, 그날도 혼날 것을 대비해 다음날 해도 될 일을 하면서 야근을 했다.












아니, 이쯤 되니까 화가 나는 거다.








또 야근이야?


야근하면 뭐 더 좋은 디자인이 나와?


아니잖아. 압박감 속에서 좋은 디자인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어제도 뼈저리게 겪었잖아.


내일 할 일을 오늘 하면? 더 좋은 결과가 나와?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서 맥주나 마셔!








...그래도 될까?








몰라, 해보기 전에는 정말 모르겠어.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혼자 남아있던 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나와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샀다.


엄마에게 난생처음으로 친구들과 외박을 해도 되냐고 물어봤을 때처럼, 이 별것도 아닌 일이 일탈처럼 느껴졌고, 걸으면서 들이킨 맥주의 첫 한 모금은 벌써 나를 취하게 했다.





탄산 거품이 온몸을 감싼다. 머릿 속이 차가워진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 더 빨라진다.










집에 도착해 보송보송하게 샤워를 하고, 가장 편한 옷차림으로 고양이를 껴안았다.


하루 종일 내 생각만 했을 나의 작은 고양이. 부드럽고 따뜻한 솜털이 피부에 감긴다.




아, 이제 자야지. 어제 많이 못 잤으니까.






"애옹 -."


"잘 자, 아가."










내가 하던 것은 야근이 아니라 자해였음을 깨달은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내 방에 있는 모든 스위치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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