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제록 (禁祭錄)] - 67화

잊혀진 왕들의 포효

by 돌부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담벼락 너머로 잿빛 하늘이 희미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밤새 서울을 집어삼켰던 거대한 전쟁은 마치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곳에 있었던 이들에게 그 밤의 기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었다.


월하(月下)의 비밀 거점인 독립문 여관의 지하실은 패잔병들의 야전병원과도 같았다. 공기 중에는 피 냄새와 소독약 냄새, 그리고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깊은 침묵이 뒤섞여 있었다. 돌쇠는 부서진 문을 대신할 새로운 강철문을 용접하고 있었고 그의 등 뒤 그림자는 거대한 산처럼 묵묵했다. 연화는 밤새 수십 통의 보고를 받으며 흩어진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은 이겼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잃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우다 스러져간 동료들의 이름이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상태는….”


최민준이 잠든 지운의 곁을 지키고 있는 장서린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밤새 내린 서리처럼 차갑게 잠겨 있었다. 그는 밤새 담배 한 대 피우지 않았다. 그럴 정신조차 없었다.


“최악이에요.”


장서린은 복잡한 데이터가 떠 있는 의료용 모니터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법의학자로서 수많은 죽음을 봐왔지만 지금 눈앞의 이 ‘살아있는 죽음’은 그녀의 모든 지식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모든 생체 신호는 정상이지만 뇌파가 거의 정지 상태예요. 깨어날 의지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의 의식, 영혼이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그냥 로그아웃해버린 상태라고요.”


그녀는 지운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깊은 옥색으로 변해 고요히 잠든 옥 매미 문양이었다.


“저 문양이 그의 영혼을 빨아들여 최소한의 생명만 유지시키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겨울잠에 든 것처럼. 생명 유지 장치인 동시에 감옥인 셈이죠.”


“깨울 방법은….”

“없어요.”


장서린이 그의 말을 잘랐다.


“이건 의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형사님. 이건….”


그녀의 시선이 방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명상하고 있는 서화에게로 향했다. 서화는 싸움이 끝난 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지운이 새로 써 내려간 ‘삶(生)’의 기록이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떻게 흐르는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치유가 아니었다. 지운의 기록 일부가 그녀의 영혼에 섞여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이제 지운처럼은 아니었지만 희미하게나마 세상의 ‘기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최민준의 어깨를 짓누르는 죄책감의 무게와 장서린의 머릿속에서 충돌하는 과학과 신념의 혼돈, 그 모든 감정의 색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그의 의지가 필요해요.”


서화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를 깨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한지운 그 자신뿐입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그녀의 눈이 테이블 위에 놓인 『금단의 기록』을 향했다.


“그가 돌아올 ‘길’을 우리가 대신 걸어가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그의 싸움을 이어가야 그의 의지도 돌아올 명분을 찾을 테니까요.”


그때 박종윤이 컴퓨터 앞에서 외쳤다.


“찾았어요.”


그의 눈은 밤새 모니터를 본 탓에 핏발이 서 있었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발견의 희열이 담겨 있었다.

화면에는 서울의 지도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한상현이 기록한 북두칠성의 진법과 화천회가 만든 저주의 진법이 겹쳐져 있었다.


“역시 단순한 파괴가 아니었어요.”


그가 말했다.


“화천회는 서울의 지맥 위에 자신들의 ‘거짓된 역사’를 덮어씌우고 있었던 겁니다. 마치 도시 전체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처럼.”


그는 지도를 확대했다. 신곡저수지와 서대문형무소, 정화된 두 개의 점이 이제 희미한 은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다섯 개의 검붉은 점이 서울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최민준이 물었다.


박종윤은 잠시 망설이다 세 번째 점을 가리켰다. 그것은 서울의 중심부 종로에 위치한 오래된 궁궐이었다.


“창경궁….”

“창경궁?”


장서린이 의아해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도 아니고 왜 하필 창경궁이죠? 역사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그래서 ‘왜곡’인 겁니다.”


서화가 그녀의 말을 이었다.


“창경궁은 원래 왕의 웃어른들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가장 효심 깊은 궁궐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그들은 궁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죠. ‘창경원’으로 격을 낮추어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았던 겁니다.”


최민준이 입을 열었다.


“어릴 적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가본 기억이 있어. 그때는 그저 즐거운 놀이공원인 줄로만 알았지. 그 쇠창살 안의 동물들 눈이 왜 그렇게 슬퍼 보였는지 이제야 알겠군.”

“화천회는 바로 그 뒤틀린 역사의 상처를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가장 성스러운 공간을 가장 추악하게 비틀어버린 그 ‘기록’을, 고향을 잃고 낯선 땅의 우리 안에서 죽어간 수많은 짐승들의 한을 새로운 저주의 재료로 삼고 있는 겁니다.”

“그럼….”

“세 번째 저주는 아마도….”


서화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인간이 아닌 짐승들의 원혼일 겁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고요히 잠들어 있던 지운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한번 까딱- 움직였다.


삐빅-!


동시에 그의 뇌파를 측정하던 모니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평탄하던 그래프 위에 아주 찰나였지만 기하학적이고 복잡한 패턴의 파동이 스쳐 지나갔다.


“방금…!”


박종윤이 소리쳤지만 그가 돌아봤을 때 화면은 다시 평온을 되찾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뇌파가 아니었다. 지운이 하늘의 등대를 통해 보내오던 신호와 같은 패턴이었다. 그의 무의식이 그들의 이야기에 응답하고 있었다. 한지운의 무의식이 보낸 희미한 응답은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는 한 줄기 바람과도 같았다. 그는 혼돈의 바다 속에서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남겨진 동료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창경궁….”


최민준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눈앞에 새로운 전장이 그려지고 있었다.


“궁 주변의 모든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설계도, 보안 시스템, 주변 CCTV, 뭐든지.”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이제 이 기묘한 팀의 현장 지휘관은 그였다.


“잠깐만요.”


장서린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자신의 태블릿에 창경궁의 옛 모습, ‘창경원’ 시절의 낡은 사진들을 띄우고 있었다. 벚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코끼리 열차, 그리고 좁은 우리에 갇힌 맹수들의 사진이었다.


“화천회가 노리는 것이 ‘짐승들의 한’이라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궁궐의 전각이 아니에요.”


그녀는 지도를 확대해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많은 동물이 갇혀 있었고 가장 많은 동물이 병들어 죽어 나갔던 곳. 바로….”

“대온실(大溫室).”


서화가 그녀의 말을 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슬픔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수많은 이국의 생명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마지막 숨을 내뱉었던 그곳이 바로 이 저주의 심장일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민준은 월하의 돌쇠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목표는 창경궁 대온실. 오늘 밤 자정, 그곳으로 진입한다.”


밤 11시 30분, 서울의 심장 종로.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과 소음이 거짓말처럼 닿지 않는 곳. 창경궁의 높고 육중한 담벼락 아래 세 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짙은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마지막으로 각자의 장비를 점검했다. 최민준은 허리춤의 리볼버를, 장서린은 손목의 센서를, 서화는 품속의 옥거울을 매만졌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는 마지막 결전을 앞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그들의 귓속에 박종윤의 목소리가 찌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흘러들어왔다. 그는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비밀 거점에서 도시의 모든 신경망을 해킹하고 있었다.


— “5분 후 궁 전체의 보안 시스템과 열 감지 센서가 5분간 마비됩니다. 북쪽 담벼락 일제가 만든 배수 시설 중 가장 오래된 제3배수관, 거기가 유일한 침투 경로입니다. 5분입니다. 그 이상은 보장 못 합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세 사람은 박종윤이 열어준 길을 따라 넝쿨로 뒤덮인 배수관 입구로 스며들었다.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 코를 찌르는 것은 퀴퀴한 물때 냄새와 녹슨 쇠 냄새였다. 발밑으로는 차가운 물이 흘렀고 등 뒤로는 자신들이 지나온 도시의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그들은 오직 서로의 희미한 숨소리에 의지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수십 미터의 짧은 거리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출구의 희미한 달빛이 보였을 때 그들은 쇠창살을 뜯어내고 마침내 궁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으로 나온 그들을 맞이한 것은 숨 막힐 듯한 고요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좀먹는 지독한 슬픔의 기운이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고궁의 단아하고 유려한 처마선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밤이슬을 머금은 이름 모를 가을꽃들이 청아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완벽한 풍경 아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슬픔이 짙은 안개가 되어 깔려 있었다. 장서린의 센서는 원인 불명의 극저주파와 전자기장 이상 신호를 경고하며 미친 듯이 울려댔다. 서화는 눈을 감은 채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의 영적인 귀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최민준은 형사의 직감으로 이질적인 한기를 느꼈다. 이곳은 단순한 범죄 현장이 아니었다. 이곳은 수십 년간 쌓여온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 아래 고향을 잃고 낯선 땅에서 스러져간 수십, 수백 마리 짐승들의 원혼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크르르릉….


어디선가 굶주린 맹수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장서린은 자신의 센서를 꺼내 들었다. 화면에는 인간의 것이 아닌 수백 개의 생체 파동이 잡히고 있었다.


“그들이… 아직 이곳에 있어요.”


세 사람은 대온실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옛 동물원의 흔적이 곳곳에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텅 빈 원숭이 산, 물이 마른 물개 쇼장, 녹슨 철창. 그곳을 지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눈들이 그들을 지켜보는 듯한 착각에 소름이 돋았다.


마침내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유리 온실, 대온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아름답고 이국적인 건물. 하지만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생명의 온기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죽음의 한기였다.


“여깁니다.”


서화가 중얼거렸다.


세 사람은 굳게 닫힌 온실의 문을 열었다. 안은 정글과도 같았다. 수십 년간 사람의 발길이 끊긴 탓에 열대의 식물들이 미친 듯이 자라나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습하고 더운 공기와 짙은 흙냄새, 그리고 피비린내.


“저기….”


최민준이 손전등으로 온실의 중앙을 비추었다. 그곳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하지만 연못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물이 아니었다. 검붉은 피였다. 그리고 그 피의 연못 위로 수십, 수백 마리의 동물 뼈들이 마치 끔찍한 예술 작품처럼 기이한 형태로 쌓아 올려져 있었다. 호랑이의 두개골, 코끼리의 갈비뼈, 기린의 목뼈, 원숭이의 손뼈,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탑’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탑의 가장 꼭대기에는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는 죽연이 아니었다. 짐승의 가죽과 뼈로 만든 누더기를 걸친 비쩍 마른 남자였다. 그의 피부는 병적으로 창백했고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빠져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동물의 것처럼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침입자… 나의 조용한 왕국을 더럽히는… 어리석은 인간들….”


그의 목소리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긁혀 나오는 듯한 기괴한 소리였다. 그의 손에는 동물의 뼈를 깎아 만든 피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들리는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죽어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가 피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삐이이이이이이익-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날카로운 초음파. 그 순간, 그들을 둘러싼 열대의 식물들 사이에서 수십 개의 굶주린 눈동자가 일제히 떠올랐다. 뼈 피리 소리는 공기를 찢는 비명과도 같았다. 날카로운 바늘 수천 개가 뇌의 가장 깊은 곳을 직접 찌르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었다.


크르르르르….


어둠 속에서 떠오른 수십 개의 굶주린 눈동자들이 그 소리에 응답했다. 열대의 식물들 사이에서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더 이상 평범한 짐승이 아니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우리 안에서 죽어간 맹수들의 원혼. 화천회의 저주에 의해 그 한(恨)은 뒤틀리고 증폭되어 끔찍한 괴물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몸은 반쯤 썩어 뼈가 드러나 있었고 텅 빈 눈구멍에서는 붉은 안광이 증오처럼 타올랐다.


“너희를 위한 진정한 장송곡은 바로 이 아이들의 분노다.”


남자가 피리를 멈추고 앙상한 손가락을 까딱했다.


크아아아아아-!


가장 거대한 코끼리의 원혼이 굉음과 함께 달려들었다.


“젠장, 흩어져!”


최민준이 외치며 몸을 날렸다. 거대한 상아가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콘크리트 바닥이 두부처럼 부서져 나갔다.


“소용없어요!”


장서린이 소리쳤다.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아요! 저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저주라고요!”

“그렇다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힘으로 상대하면 될 일.”


그 순간, 어디선가 네 번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위엄이 담긴 목소리였다. 세 사람은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온실의 가장 높은 곳, 유리 돔의 부서진 철골 위 한 남자가 달빛을 등지고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지운이었다.


“지운 씨!”


서화가 놀라 외쳤다. 그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그의 손에는 낡은 붓 대신 눈부신 황금빛을 발하는 ‘사인검(四寅劍)’이 들려 있었다. 그의 몸을 휘감던 위태로운 기운은 사라지고 그의 비취색 눈동자는 완벽한 평온을 되찾아 있었다. 그는 마침내 왕과 기록자, 두 개의 존재를 완벽하게 하나로 합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네놈… 그 기운은… 왕…?!”


뼈를 두른 남자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졌다.


“어떻게… 벌써….”

“길을 잃었을 때 길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지운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역적을 어찌 왕이 용서할 수 있겠느냐.”


그의 말이 끝나자 그는 철골 위에서 몸을 날렸다. 그의 의지에 응답하여 온실 안의 모든 ‘기록’들이 검 끝으로 모여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


황금빛 검이 코끼리 원혼의 머리를 꿰뚫었다. 고통의 비명은 없었다. 대신 코끼리의 붉은 안광이 서서히 꺼져가며 생전의 맑고 슬픈 눈으로 돌아왔다. 그 거대한 몸이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뿌우우우우-


그것은 마지막 순간, 머나먼 고향 아프리카의 초원을 향해 보내는 길고 슬픈 울음소리였다. 지운은 그를 해방시킨 것이다.


“감히… 나의 아이들을…!”


남자가 분노에 차 뼈 피리를 다시 불었다. 남아있는 모든 맹수들의 원혼이 일제히 지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지운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입니다!”


서화가 외치며 푸른 옥 호랑이 조각상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주문을 외자 조각상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산군(山君)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저놈들은 살아있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부술 필요도 없지!”


최민준은 총알에 경면주사를 듬뿍 바르며 외쳤다.


“약점을 찾았어요!”


장서린이 소리쳤다. “호랑이는 목! 사자는 앞발! 저곳을 공격해야 속박이 풀려요!”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방적인 학살이 아니었다. 잊혀진 왕들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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