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속도의 물결
프로젝트의 위기는 잔잔한 파문만을 남기고 지나갔다. 파트너사와의 협력은 이전보다 훨씬 더 원활해졌고, 이대리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나를 그저 상사로만 대하지 않았다. 때로는 업무 외적인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고,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내게 다가와 조언을 구했다. 단단한 논리로 상대를 제압했을 때 얻었던 ‘인정’과는 다른 종류의, 따뜻한 ‘신뢰’가 우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김 부장은 나에게 더 큰 프로젝트의 기획을 맡겼고, 나는 더 이상 버거워하지 않고 묵묵히 그 무게를 감당해냈다. 내 보고서는 더 이상 붉은 펜으로 난도질당하지 않았고, 회의실에서의 내 발언에는 힘이 실렸다. 나는 유능한 직장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어떤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성공의 기쁨도, 동료들의 신뢰도, 그 무엇도 내 안의 빈 공간을 완전히 채워주지 못했다. 마치 잘 닦인 유리창 너머로 완벽하게 짜인 풍경을 바라보는 구경꾼이 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지만, 그 풍경 속에 나는 없었다.
그것은 마치, 만조를 앞두고 모든 움직임이 멎어버린 바다와 같았다. 수면은 잔잔하고 평화로웠지만, 그 아래에서는 아무런 입질도, 생명의 신호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득 차 있지만, 흐르지 않는 물. 나는 내 삶의 ‘조금’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금요일 저녁, 나는 몇 주 만에 처음으로 현관 구석에 세워두었던 낚싯대를 꺼내 들었다. 아버지의 병상, 그리고 그 이후의 혼란 속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나의 가장 날카로운 안테나. 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카본 로드의 차가운 몸체를 닦아냈다. 그 감촉 속에서 지난 시간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럭의 맹렬한 저항, 허무하게 터져나가던 목줄, 그리고 마침내 손에 쥐었던 승리의 묵직함까지. 나는 낚싯대를 닦으며 생각했다. 나는 왜 다시 바다로 가려 하는가. 이전처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아니면 짜릿한 손맛을 느끼기 위해서? 그 어떤 것도 명확한 답이 되지 못했다. 그저, 이유 없이, 그 고요한 수평선이 그리웠다.
토요일 새벽, 나는 방파제가 아닌, 인적이 드문 작은 갯바위로 향했다. 우럭을 잡겠다고 사투를 벌였던 거친 조류가 흐르는 곳이 아니었다. 파도가 거의 없는, 호수처럼 잔잔한 내만이었다. 나는 쿨러조차 가져오지 않았다. 고기를 담아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목적 자체가 오늘의 나에게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장 가벼운 루어 채비 하나만을 들고 바다 앞에 섰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캐스팅을 반복했다. 던지고, 감고, 또 던지고. 밑걸림을 피하기 위해 바닥을 읽으려 애쓰지도 않았고, 입질을 받기 위해 특정 포인트를 집요하게 노리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내 손끝에서 풀려나가는 낚싯줄의 감각과, 허공을 가르는 루어의 작은 비행, 그리고 수면에 닿을 때 퍼지는 작은 파문에만 집중했다. 이전의 캐스팅이 목표물을 향해 쏘는 화살이었다면, 오늘의 캐스팅은 그저 허공에 그리는 무의미한 선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잡기 위한’ 낚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던지기 위한’ 낚시였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비워지고, 오직 단순한 행위의 반복만이 남았다. ‘다음 주 보고서는 어떻게…’, ‘파트너사와의 관계는…’, ‘아버지의 다음 검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의 사슬이, 캐스팅이 반복될수록 하나씩 끊어져 나갔다. 마치 스님이 묵주를 돌리듯, 나는 낚싯대를 통해 나의 번뇌를 허공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가져온 보온병의 커피를 마셨다. 입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초조하거나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 평온함이,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 완전한 균형의 상태가 얼마 만에 찾아온 평화인지 몰랐다.
나는 깨달았다. 이전까지 나에게 낚시는 언제나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깨달음을 얻든, 고기를 얻든, 나는 늘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빈 쿨러는 나의 무능과 실패를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그 낚시 이후,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잡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누나에게서 온 문자였다.
‘아빠 오늘 처음으로 혼자 숟가락 드셨다!’
짧은 문장과 함께, 희미하게 웃으며 밥을 뜨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앙상한 손으로, 떨리는 숟가락을 힘겹게 입으로 가져가는 그 모습.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이곳에서 무의미한 캐스팅을 반복하는 동안, 아버지는 병실에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싸움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수십 킬로그램의 저항을 버텨내는 것보다 더 위대한, 단 몇 그램의 숟가락을 들어 올리는 그 싸움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낚싯대를 접었다. 빈 낚싯대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충만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깨달음이나 성취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어진, 순수한 도구의 무게였다. 나는 더 이상 바다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답은 언제나 내 삶의 한가운데에, 내가 마주해야 할 현실 속에 있었다. 병실 침대 위 아버지의 떨리는 손끝에, 나를 믿어주는 동료의 눈빛 속에. 바다는 그저, 그 답을 마주할 용기를 주는 고요한 거울일 뿐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다음 주말에는,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병원 근처의 공원이라도 산책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요일 아침, 분주하게 오가는 동료들과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속에서도, 내 안에는 작은 연못 같은 고요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세상의 속도에 나를 맞추려 애쓰지 않았다. 조급함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모든 것을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였다. 출근길 지옥철에서 몸이 밀려도 이전처럼 짜증이 솟구치지 않았고, 아침 회의 자료에 찍힌 오타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전 팀 회의 시간, 김 부장은 상기된 얼굴로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렸다.
“다들 알다시피 지금 과장급 이상은 전부 연말 마감 프로젝트에 붙어 있어. 손이 모자란 상황이야. 그래서 이번 신규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첫 단추, 초기 기획 단계는 두 사람에게 맡기려고 해.”
회의실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김 부장은 나와 김현승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팀의 명운이 걸린 프로젝트야. 여기서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나중에 수습하느라 배는 더 힘들어져. 그러니까 두 사람이 책임지고 완벽하게 초반 세팅을 해줘야 한다는 소리야. 실패는 용납 안 돼.”
순간,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나와 내 옆자리의 김현승에게로 쏠렸다. 김현승. 그는 나와 입사 동기이자, 팀 내에서 가장 다른 색깔을 가진 남자였다. 언제나 한발 앞서 달렸고, 가장 빠른 길을 찾아냈으며, ‘결과’라는 두 글자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과정이란 결과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경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책상은 늘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어지러웠지만, 그의 실적 보고서는 늘 한 치의 오차 없이 깔끔했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암묵적으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김현승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노트북에 무언가를 빠르게 타이핑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는 조급함이 아니라, 승리를 확신하는 자의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나는 직감했다. 이것은 김 부장이 우리 두 사람에게 던진, 일종의 시험대라는 것을. 우리의 다른 방식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를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프로젝트 팀의 첫 회의는 바로 그날 오후에 소집되었다. 김현승은 기다렸다는 듯 회의실 화이트보드 앞으로 나섰다.
“자, 다들 아시겠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경쟁사들도 이미 비슷한 제품을 준비 중이라는 첩보가 있어요. 우리가 가장 먼저 시장을 선점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건 속도입니다.”
그는 보드마카 뚜껑을 열고, 거침없이 타임라인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개발, 디자인, 마케팅, 론칭. 모든 것이 두 달 안에 끝나는, 숨 막히는 일정이었다. 팀원들은 그의 속도감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언어는 명쾌했고, 그의 논리는 단단했다.
“완벽한 제품을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일단 빠르게 최소 기능 제품(MVP)을 만들어서 시장의 반응을 보고, 문제점은 그때그때 수정해 나가는 방식으로 가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린 스타트업’ 방식이죠. 완벽한 준비를 하려다간 기회 다 놓칩니다.”
그의 말에 몇몇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논리는 명쾌하고 힘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거침없는 물살 속에서 불안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물때나 지형은 무시한 채 무작정 가장 좋아 보이는 포인트에 낚싯대를 던지는 성급한 낚시꾼의 모습과도 같았다. 저 멀리 포말이 이는 곳은 대물이 있을 확률도 높지만, 동시에 수중여에 채비가 터져나갈 확률도 가장 높은 곳인데.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김현승 대리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속도가 중요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다 보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김현승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에 ‘또 시작이군’ 하는 듯한 미세한 짜증이 스쳤다.
“예를 들면 어떤 거죠, 박주원 대리님? 지금 우리 상황에, 보지 않아도 될 사소한 것들 말씀이신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상대해야 할 시장, 즉 고객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제품을 만들기에 앞서, 우리가 타겟으로 하는 고객층의 숨은 니즈를 파악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모래밭에 사는 가자미를 잡을 건지, 돌밭에 사는 우럭을 잡을 건지에 따라 채비와 미끼가 완전히 달라지듯이 말입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물결’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를 먼저 읽어야, 헛된 캐스팅을 줄일 수 있습니다.”
내 말에 김현승이 피식 웃었다. 그는 보드마카를 내려놓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물결이요? 박주원 대리님, 여기는 한가로운 낚시터가 아니라 전쟁터입니다. 우리가 그 물결 구경하는 동안, 경쟁사들은 이미 그물 던져서 고기 다 건져 올릴 겁니다. 고객의 니즈는 시장에 직접 부딪혀서 배우는 겁니다. 분석은 최소화하고, 실행으로 증명해야죠.”
“실행으로 증명하다가 배가 좌초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전속력을 내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으니까요.”
회의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팀원들은 나와 김현승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젊은 사원들은 김현승의 속도감에 매료된 듯했고, 경력이 있는 과장급들은 내 신중론에 일리가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김 부장은 팔짱을 낀 채, 우리의 논쟁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바다에서 배운 지혜는, 사무실이라는 또 다른 바다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의 신중함은 그의 눈에 그저 우유부단함으로 비칠 뿐이었다. 고요 속에서 감각을 벼리는 나의 시간과, 소란 속에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그의 시간. 우리는 너무나 다른 속도의 물결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홀로 남아 텅 빈 화이트보드를 바라보았다. 김현승이 그렸던 숨 가쁜 타임라인은 지워져 있었지만, 그 잔상은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아버지와의 주말 이후 찾아왔던 내면의 평화는, 김현승이라는 거친 파도 앞에서 속절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낚시가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하는 문제와 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