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불빛이 마지막 가로등마저 삼킨 밤.
지리산 피아골의 폐쇄 탐방로로 발을 들였다.
‘출입 금지’라 적힌 녹슨 팻말은 뿌리째 뽑혀 흙탕물 속에 넘어져 있었다.
새 한 마리 울지 않는 적막.
헤드램프 불빛으로 빗방울 같은 먼지를 휘저으며 앞길을 더듬었다.
손엔 필름 카메라 하나.
셔터를 누를 때마다 내 숨소리까지 필름에 새겨질 것 같은 적막.
고요한 풍경만 찍으며 며칠간 머리를 비우려 했었다.
이상하게도 첫걸음부터 공기가 숨죽인 포식자처럼 내 목덜미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었다.
적막한 공간에서 한참 동안 셔터를 눌렀다.
해질 무렵, 텐트로 돌아왔다.
폴라로이드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숲 건너편 둔덕에서 망원으로 찍힌 내 전신.
발 밑에 연필로 숫자 10이 번져 있었다.
누가, 언제?
낯선 카메라 렌즈가 멀리서 나를 겨눴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다.
기분 나쁜 인사였다.
마치 누군가가 숲 저편에서 “여기 있어”라고 속삭이는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들어온 사람이 있나? 이 사진은 어디서 찍힌 걸까?
머리를 식히러 온 첫날부터, 누군가 고약한 장난을 건네고 있었다.
난 사진을 구겨 멀리 던져버렸다.
왜라는 질문보다 누가, 언제라는 질문만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날 밤, 텐트 벽을 파고드는 섬광에 잠에서 깼다.
텐트 밖에 나와보니 두어 걸음 앞에 두 번째 사진이 떨어져 있었다.
숫자 9.
누군가 바로 곁까지 다가왔다는 공포가 심장을 쥐어짜듯 조였다.
렌즈가 다가올수록 나를 보호할 울타리가 한 겹씩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새벽안갯속, 카메라가 사라지고 텐트 지퍼에 새 사진이 집게로 꽂혀 있었다.
숫자 8.
내 얼굴이 절반 이상 프레임을 채웠다. 텐트 앞에는 깨진 렌즈 조각이 있었다.
카메라를 찾았더니, 어느새 박살이 나 있었다.
내 시야를 뚫고 들어온 사진 속 눈빛이, 마치 나 대신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방어막이 무너진 느낌.
서둘렀다.
짐을 꾸려 하산하던 중 돌다리 위에 사진이 또 하나 놓여 있었다.
숫자 7.
어깨가 잘려 나가고 배경은 먹물처럼 새까맸다. 렌즈는 한 걸음 더 파고들었다.
바로 목 뒤에 낫이 닿은 듯,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압박이 뼛 속까지 스며들었다.
내 공간이 잘려 나가는 공포가 현실로 다가왔다.
낙엽 더미를 헤치다 발끝에 사진이 걸렸다.
숫자 6.
턱과 입술만 남은 극단적 클로즈업.
입술 옆엔 손가락 그림자가 스쳤다.
숨 쉬는 틈새까지 들킨 듯 얼굴이 저릿했다.
렌즈 너머 손가락이 내 살을 짓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살갗이 얼어붙었다.
갈림길 표지목에 핀처럼 꽂힌 사진.
숫자 5.
코끝과 뺨 일부만. 배경이 지워져 피사체만 붕 떠 있었다.
존재가 잘린 채 공중에 매달린 기묘한 부유감—지금 이 숲에 서 있는 내가 진짜일까, 사진 속 조각들이 진짜일까? 현기증이 속에서 일렁였다.
주차장까지 1 km 남은 비탈에서 또다시 사진을 발견했다.
숫자 4.
한쪽 눈썹이 프레임 경계에 걸려 잘려 나갔다.
바로 앞에서 시선을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거리는 눈금 하나. 내가 달아날 틈보다 사진이 다가올 시간이 더 빠르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차가 보일 즈음, 사이드미러에 사진이 겹쳐 있었다.
숫자 3.
남은 건 한쪽 눈가와 창백한 흰자. 동공에는 낯선 실루엣이 반사돼 있었다.
그리고 운전석 손잡이에 끼워진 사진.
숫자 2.
눈동자 전체를 가득 채운 초근접 샷. 각막 위 플래시 잔광이 은빛 달처럼 떴다.
차 문 손잡이를 잡은 손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어떻게 운전을 해왔는지도 모르게 집으로 차를 몰았다.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다 사진이 밟혔다.
숫자 1.
홍채 무늬가 깨진 유리처럼 뒤틀린 내 눈.
흙먼지가 사진 모서리에 말라붙어 있었다.
마지막 방어선이라 믿었던 집 앞에서, 공포가 문턱을 넘어왔다.
현관 비밀번호 네 자리보다 카운트다운 한 자리가 더 선명하게 머릿속에 새겨졌다.
서둘러 현관문을 여는 순간, 실내 어둠 속에서 마지막 셔터가 터졌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새하얀 폴라로이드 한 장.
그 한 장이 그것과 나의 마지막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