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신방죽

by 돌부처

세 달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초여름. 정읍  북면 용호동 들판은 노르스름한 먼지 안개로 자욱했다.


어른들은 논바닥을 쿡쿡 찔러보며 갈라진 틈의 깊이를 가늠했고, 아이들은 저수지 둑길을 돌아다니며 “올해 농사 망했다”는 어른들 말을 장난처럼 흉내 냈다. 그 작고 둥근 둑못—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신방죽이라 불렀다. 머리가 희끗한 이들은 “물을 다 퍼내면 고기도 사람도 없어진다”라고 속삭였지만, 밖에서 온 젊은 기술관에게는 그냥 미신쯤으로 들리는 소리였다.


그 젊은이는 총독부 토지조사국 수리조사반 소속 박윤서였다. 일본 와세다 농림학교를 갓 마치고 돌아와 첫 현장 발령을 받은 스물다섯, 오늘만큼은 자신의 학문이 낡은 전설을 단숨에 잠재울 것이라 믿었다. 그는 수레에서 물레방아식 양수 펌프를 내리며 선언했다.


“이 물을 하루 만에 비울 겁니다. 지하 암반을 확인하고 새 관개 수로를 내죠. 물은 길만 통하면 흐르게 돼 있습니다.”


그 앞에서 마을 면서기 강태성이 모시 두루막을 바람에 날리며 고개를 저었다.


“박 기수 나리, 예부터 이 못은 손대면 화를 당한다 해서 ‘신지(神池)’라 부릅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시지요. 저수지 바닥에는 큰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과학이 미신을 이기는 걸 보여 드리죠.”


윤서는 미룰 생각이 없었다. 마을 장정들이 모여 펌프 바퀴를 돌리고, 가죽 벨트를 감아 수차날이 빙글빙글 회전했다. 밤새 퍼 올린 물은 흙탕물과 함께 긴 수로를 타고 논두렁으로 흘러갔다. 붉은 명주실을 묶은 커다란 붕어 한 마리가 실험용으로 못 한가운데 풀려났고, 그 실 끝에는 잘 보이라고 대나무 막대기가 매달렸다.


“붕어가 빠져나갈 지하 구멍 따위 없습니다. 실이 어디서 끊기는지 지켜보세요.”


하루가 채 되지 않아 수면은 눈에 띄게 내려갔다. 갈대 아래 숨은 올챙이 무리가 우글거렸고, 물이 빠질수록 지독한 진흙 냄새가 진동했다. 해 질 녘 즈음, 윤서는 수면을 비추는 석양빛에 들뜬 듯 웃었다. 대나무 막대기는 아직도 한가운데에서 펄쩍이는 붕어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수차는 여전히 돌고 있었지만 수위가 더 이상 줄지 않았다. 오히려 수면이 멈춘 자리에서 잔물결이 너울처럼 피어났다. 장정들이 퍼낸 물만큼 방죽이 텅 비어 있어야 했지만, 금세 어느 순간부터 물이 원래 깊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펌프가 역류하는 것입니까?” 한 장정이 물었고, 윤서는 고개를 저었다.


“역류할 구조가 아니에요. 수심이 저렇게 유지될 리가 없는데….”


그때였다. 둑 아래 논둑 쪽에서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아이들 손엔, 방금 전까지 방죽 한가운데 떠 있어야 할 붉은 명주실이 들려 있었다. 실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길게 잡아당긴 듯 논둑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윤서는 손전등을 들고 강태성과 함께 실을 따라갔다. 삐걱거리는 대나무 울타리를 넘어가자, 마른 계곡 바닥 한복판에 누군가가 무릎까지 흙에 파묻힌 채 흔들리고 있었다. 실이 허리춤을 칭칭 감고 있었고, 그 사람은 펌프를 돌리던 장정 이복수였다.


“누가… 끌고 가요… 물속에서….” 이복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흙을 헤치며 간신히 소리를 냈다.


강태성이 황급히 손을 뻗쳤지만, 흙바닥은 물에 적신 종이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복수는 가라앉는 진흙과 함께 허리까지, 가슴까지, 그리고 머리까지 파묻혔다. 실오라기가 그의 몸을 감은 채 흙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곧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지하 공동(空洞)인가….” 윤서가 입술을 떨며 중얼거렸다. 그는 도망치듯 방죽으로 달려 돌아왔다. 수차를 멈추려 했지만, 이미 바퀴축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수차가 빨아들인 물이 아닌, 어딘가에서 불어난 물이 수차를 뒤에서 밀어 돌리는 형국이었다. 기이한 울림과 함께 방죽 바닥 깊은 곳에서 거품이 솟구쳤고, 물은 잠시 후 넘칠 듯 출렁였다.


밤을 꼬박 새웠지만, 다음 날 해가 뜨자 방죽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물이 차올라 있었다. 붉은 실도, 장정들을 태웠던 소형 나룻배도, 거대한 수차 장비조차 모두 온데간데없었다. 윤서는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빈 수로를 바라보았다. 논둑으로 흘러가던 물길도 새벽 사이 말라 있었다.


“못이 물을 되돌려 먹어 버린 게지요.” 강태성이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믿지 않으셔도 좋으나, 결국 물이 흔적을 없애 버렸습니다.”


윤서는 아연해했다. 자신의 지식으로 설명할 틈조차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끔찍했다. 관찰 기록은 텅 비어 있었고, 수면 아래에서 무엇이 움직였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남은 건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깔끔하게 채워진 물 뿐이었다.


며칠 뒤, 총독부 조사반이 도착했다. 하지만 사라진 장비나 실종자에 대한 단서는커녕, 방죽 속 수압과 수심을 측정한 기록도 얻을 수 없었다. 물속에 넣은 유리 다관은 바로 윗부분에서 두 동강이 났고, 잠수봉은 눈금 없이 뚝 끊겼다. 조사반 책상 위에 남은 보고서는 단 한 줄이었다.


“신지방죽 저수 수위를 임의로 저하시키는 행위는 주민 및 설비 안전에 중대한 위해가 있으니 금지 조치할 것.”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해 음력 이월 초하루, 장정들의 열이 가시지도 않은 날이었다. 굵은 장대비가 들판의 먼지를 눅여 가라앉혔고, 방죽의 수면은 정확히 둑 가장자리까지 차오른 채 더 오르지도, 줄지도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삵처럼 숨어 숨죽였다.


다음 해 봄, 논길엔 새로운 수로가 나지 않았다. 신방 죽은 여전히 제 깊이를 유지했고, 마을 아이들은 둑을 돌아갈 때면 꼼짝없이 부는 갈대 소리에 놀라 달아났다. 붉은 실은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고, 고기잡이 그물을 담그려는 어부도 없었다.


윤서는 그 뒤로 본청에 소환됐다가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남은 장정들은 밤마다 방죽가를 맴돌며 실종된 이를 애도했지만, 아무도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전설은 재확인된 셈이었다. 이제 더 이상 “신방죽 물을 다 퍼내면…”으로 시작하는 경고는 반신반의가 아니라, 두 눈으로 본 자들의 굳은 침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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