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도진의 마지막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항복 선언이자, 그가 평생을 지켜온 이성과 합리의 세계에 기꺼이 균열을 내겠다는 허락이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하진을 정신이 온전치 못한 피해자나, 무속 세계의 이질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나침반을 바라보는, 절박한 탐험가의 눈빛이었다.
사무실의 공기는 담배 연기와 묵직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하진은 한참 동안이나 망설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죽은 아이의 목소리, 그의 기억과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던 순간, 어머니를 향한 의심, 그리고 손바닥 위에 나타난 가면의 파편까지. 현실의 언어로 옮기는 순간, 모든 것이 값싼 괴담처럼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서하진 씨.”
윤도진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그녀를 재촉했다.
“나는 당신이 겪은 일이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을 파헤치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건 ‘패턴’이에요. 아무리 기괴한 현상이라도, 범죄는 반드시 패턴을 남깁니다.”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서, 오히려 하진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증언은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아이, 김민준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처절한 기록이었다. 콜센터에서 처음 들려왔던 아이의 목소리, 머릿속에 강제로 각인된 주소,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웃음소리, 그리고 아이의 영혼과 접촉하는 순간, 폭풍처럼 휘몰아쳤던 기억의 파편들까지. 하진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건조한 목소리로 그 모든 것을 쏟아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다시 한번 김민준이 되어야 했다. 엄마의 따스했던 품과 차갑게 식어버린 집 안의 공기, 문틈으로 훔쳐보았던 공포의 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새하얀 가면의 남자가 내밀었던 얼음 같은 손의 감촉까지. 그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 심장을 할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어느새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윤도진은 단 한 번도 말을 끊지 않았다. 그는 수사관의 냉철함으로, 하진이 털어놓는 모든 비현실적인 증언들을 수첩 위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아이의 목소리’, ‘기억의 유입’, ‘감정의 동기화’.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최대한 객관적인 단어로 치환하며 사건의 얼개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하진의 이야기가 민준의 어머니와 백면도깨비의 거래 장면까지 이르렀을 때, 윤도진의 펜이 처음으로 멈췄다.
“‘운’을 담보로 한 거래....”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남자가... 백면이 아이의 ‘운’을 제물로 삼아, 어머니의 더 큰 ‘운’을 불러오겠다고 했다고요.”
“네. 똑똑히... 그렇게 들었어요.”
윤도진은 수첩의 다른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김민준 군의 모친, 박선영 씨의 계좌를 실종 직후 추적했었습니다. 이상한 점이 있었죠. 그녀는 평범한 주부였는데, 실종되기 몇 주 전부터 거액의 주식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일반인은 알기 힘든 비상장 주식이나 위험성이 높은 파생 상품에 만요. 더 이상한 건, 그 모든 투자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는 겁니다. 단 몇 주 만에 수십억 원의 수익을 냈어요. 당시에는 유능한 투자 컨설턴트를 끼고 한 작전이거나, 혹은 내부자 정보를 이용한 범죄일 거라고 추정했었죠.”
그의 말이 하진이 본 환영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백면은 정말로 인간의 ‘운’을 뒤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인 부(富)와 성공을 미끼로 던지고, 그 대가로 가장 순수한 것, 아이의 생명과 영혼을 앗아간 것이다.
“그리고 박선영 씨는 그 돈을 단 한 푼도 써보지 못하고 아이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시체도, 흔적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윤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사건의 조각들이 맞춰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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